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대원이 아빠 Aug 24. 2022

강낭콩의 한 살이

마음을 짓는 시간 1화

강낭콩의 한 살이

글·사진 : 꿈장  


초등학교 4학년 과학 책에는 '식물의 한 살이' 단원이 나온다. 학습에 들어서면 각자 강낭콩을 화분에 심어 몇 달 동안 애정을 갖고 정성껏 키우는 장기 프로젝트가 시작된다. 


"관심을 두고 잘 키우면 꽃이 피고 꼬투리가 생길 거예요. 물만 잘 주면 대부분 1~2주 안에 싹이 트는데 잘 자라지 못해도 여러분 탓은 아니에요. 가끔 처음부터 약한 강낭콩들도 있거든요. 좀 더 기다려주거나 새로운 씨앗으로 다시 심으면 되니까 열심히 잘 키워봅시다!" 



처음 강낭콩을 심을 때 아이들의 표정은 너무나도 진지하다. 팻말에 강낭콩 이름을 예쁘게 쓰고 물을 주며 설렘을 감추지 못한다. 과연 내 강낭콩은 언제 싹이 틀까? 그 날 알림장에는 '떡잎 나오면 사진 올리기'라고 적어두었다. 그 말을 잊지 않던 아이들은 며칠 후, 하나둘씩 싹이 튼 모습을 사진으로 올렸다. 일주일이 흘러도 전혀 싹틀 기세가 보이지 않는 아이들에게는 새 강낭콩을 주었다. 동시에 싹을 틔웠다가 금방 죽어버리면 번식에 어려움이 있어 강낭콩마다 싹 트는 시기가 많이 다를 수도 있다던데 정말 그래서일까. 어쨌든 내 경험상 새로운 씨앗을 받아서 다시 심으면 다들 두 번째엔 꼭 성공했으니 걱정은 없었다. 그즈음 교실에 따로 심은 우리 반 강낭콩 '꿈장이'도 늦게나마 싹을 틔웠다.

*꿈장이 : 꿈꾸며 성장하는 어린이의 줄임말 


날이 따뜻해서 아이들의 강낭콩이 '꿈장이'보다 훨씬 빨리 자라기 시작했다. 교실이 햇빛이 덜 드는 곳에 있어서인가? '꿈장이'는 키가 작고 본잎의 색깔이 연한데 아이들의 강낭콩은 벌써 지지대를 세워줘야 하고 진한 초록색 본잎들이 무럭무럭 자라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수줍은 남자아이 건이가 다가왔다. 처음 씨앗을 받아 3주가 훌쩍 지난 때였다.  



- 선생님, 제 강낭콩이 안 자라요.

- 괜찮아. 꿈장이도 키가 작잖아. 천천히 자라는 강낭콩도 있는 거지 뭐.

- 그게 아니라 강낭콩 싹이 아직도 안났어요.

- 뭐? 떡잎도?  



떡잎이 나오고도 모자라 시들시들해질 시기였다. 그런데 아직 싹이 트지도 않았다니 그 동안 얼마나 답답했을까. 나야 꿈장이가 느리게 자라든 빨리 자라든 큰 상관 없지만 건이는 어떤 마음으로 싹트길 기다렸을지. 벌써 지지대를 세우는 친구들의 인증샷을 보며 부럽기도 했을 것이다. 꼭 강낭콩이 잘 자라는 게 경쟁거리는 아니지만 다들 자기 화분에 꽃이 피길 간절히 바란다. 꽃이 피면 강낭콩이 곧 꼬투리가 생길 거라는 단서를 준 셈이니 그때부턴 편안한 마음으로 물만 잘 주면 된다. 


건이에게 강낭콩을 새로 준 뒤 나도 '꿈장이'를 자세히 살펴보았다. 사실 이 녀석도 싹이 트긴 했지만 과연 꼬투리가 생길지 의문이다. 강낭콩을 삼년 째 키우는데 이렇게 약한 애는 처음이라 지지대도 못세우고 시든 본잎만 몇 번째 뜯어내고 있다. 폭풍 성장하는 모습을 보여주면서 너희들 강낭콩도 이렇게 될거다 보여줄 작정이었는데 웬걸 하얀 곰팡이같은 것만 생기고 있다. 식물이 잘 자라는 조건을 가르치고도 이토록 잘 자라지 않는 이유가 뭔지 알 수가 없다. 나도 내가 느리게 자라는 것 같은데 너도 그렇구나. 문득 더디게 자라는 식물에서 내 모습이 보여 동병상련이 들었다. 

꿈장이에겐 아무 잘못이 없다. 햇빛이 조금 덜 드는 교실에서 어쩌다 보니 조금씩 어긋난 조건들 때문에 더디게 자란 것이다. 처음부터 약한 강낭콩이었을 수도 있지만 나름대로 흙 속에서 뿌리를 뻗으며 고군분투했겠지. 


게다가 꿈장이를 키운 나도 할 만큼은 했다. 흙을 바꾼다든가 다른 시도를 더 했다면 잘 자랐을지도 모르지만 그때는 더 좋은 방법을 찾지 못했다. 


내가 만약 건이의 입장이라면 강낭콩 싹트지 않는데 느긋하게 기다렸을까? 뒤쳐지길 싫어하고 뭐든 잘하고 싶어하는 성격이니 기필코 강낭콩 꼬투리를 얻어냈을 것이다. 아이들에겐 누구는 꽃이 크게 피고 누구는 꼬투리가 작을 수도 있다고 그래도 괜찮다고 말하지만, 정작 내 일이 되면 나는 좀처럼 느긋해지지 못하는 사람이다. 


한 살 한 살 먹어갈수록 성숙해지고 강해져야 한다는 생각이 든다. 전보다는 현명해지고 맷집도 세졌지만 그래도 여전히 느리다는 걸 안다. 게다가 이젠 어려보인다는 말 뒤에 '생각보다 나이를 많이 먹었네요?'라는 말이 붙으니 늘 내가 몇 살이고 어떤 위치인지 돌아보게 된다. 나이를 먹으면 자연스레 여유롭고 어른스러워질 줄 알았는데 아니란 걸 알았다. 철없어 보였던 친구가 부모가 된 모습을 보니 이젠 그 친구가 더 어른인 것 같다. 


다들 자기 화분에 꼬투리가 생기길 바라듯 나도 내가 생각한 삼십대의 모습이 있었다. 꽃이 피면 곧 꼬투리가 생긴다는 힌트를 얻듯이 무언가 꽃이라 착각했다가 실망하는 일들도 자꾸 생겼다. 반복된 실패를 돌아볼 때마다 자책의 늪에서 벗어나느라 무진장 애썼다. 그런 나에게 지금 해줄 수 있는 말이 무엇일까. 솔직히 지난 날 어떤 상황에서도 '나름대로' 최선을 다했다. 아무 잘못이 없다기엔 실수도 하고 조금 약한 씨앗이지만 그건 강낭콩의 잘못이 아님이 분명하다. 


얼마 뒤, 건이 강낭콩도 싹이 텄다는 글이 홈페이지에 올라왔다. 거기엔 "새로 받은 씨앗도 세 개 중에 한 개만 싹이 텄지만 이제라도 싹이 터서 너무 기뻐요!"라고 적혀있었다. 자기만의 속도로 식물을 소중하게 키우는 건이에게 나도 배운다. 바람에 흔들리는 꿈장이에게 아주 작은 지지대를 세워주었다. 언제까지 자랄지 모르겠지만 할 수 있는 데까지 잘 키워보기로 다짐했다. 그리고 내 삶도 정성껏 가꾸기로 마음 먹었다.  


몇 년 전 나를 믿지 않겠다고 다짐한 잘못된 결심부터 뿌리를 뽑고, 뭐가 문제인지 파고드는 생각의 순환도 제거한다. 잡초 뽑듯이. 더 자라면 버틸 수 있게 마음의 지지대를 세울 일들도 하나씩 찾아볼 것이다. 이대로 본잎이 시드는 걸 지켜보기엔 아직 쨍한 여름이니까. 


� 지금 그대로 내 인생을 사랑할 수 있다면 아주 많이 행복하리라 � 


나의 에세이, 꿈장의 <마음을 짓는 시간> : 네이버 블로그 (naver.com)




당신과 나의 이야기, 러프(ROUGH) 
2022년 8월 19일 금요일 글입니다. 매주 좋은 글과 시선을 전할게요.



매거진의 이전글 장마와 고양이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