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놓치기 싫은 문장이 있었다.
문장은 어떤 때 한 사람의 삶의 근간을 받치기도 한다.
이 튼실하고 든든한 한 줄의 문장은 의식되지도 못한 채 잠재의식 속에서 그 사람을 형성하고, 살아갈 힘을 준다.
샤워를 하며 번뜩이는 문장이 지나갔다. 얼른 글을 쓰고 싶은 기분과 루틴을 어길 수 없다는 생각이 팽팽히 충돌했다. 결국 '운명적 문장이라면 잠재의식 속 떠돌다 어느 날 선물처럼 다시 내게 올 거야'라며 스스로를 다독이고는 묵묵히 계속 씻었다.
오늘은 머리로 글이 써지는 날이었다.
소설책을 읽었는데, 작가의 문체가 그대로 내 머릿속에 이식되어 버렸다.
욕조에서 시간가는 줄 모르고 2 시간 정도 읽고 퉁퉁 불은 몸을 발견하고서야 그만두었다.
그후 내내 생각이 그 문체로 되었다.
나에게는 선물이었다.
아니, 어쩌면 구원이었다.
이렇게 글을 쓰고 싶어 근질거리는 느낌은 너무도 오랜만이었다.
글이 쏟아지는 날들이 전에도 몇 번 있었다.
내게 축복 같았던 나날들.
글은 내 삶이라 생각했었다.
자꾸만 작아지는 삶 속에서 글을 쓸 때면,
펜을 잡고 자판을 두드릴 때면.
내가 커져갔고 이 세상이 마음껏 온전히 내 안으로 들어왔다.
쓴 글이 늘어갈 때는 다른 이가 와서 읽어주길 바랐고 그렇게 브런치에 지원했다.
한 번에 합격하고, 역시 날 알아봤다는 생각과 동시에.
내 색을 지우고 뽑히려고 꾸며내기만 했던 작가신청서가 마음에 걸렸다. 찜찜했다. 앞으로도 그럴 것 같았다.
아니나 다를까, 느낌이 맞았다.
처음 받은 라이킷의 짜릿함, 그 순수함은 곧바로 변질되었다. 내가 아닌 글에 보여진 관심은 독이었다.
한 글자를 쓰기도 전에 어떻게 비춰질 지 생각했다.
라이킷 수에 집착하는 날 볼 때,
더 이상 글을 쓸 수 없게 되어버렸을 때,
삶을 잃은 기분이었다.
글의 첫부분에 말했듯, 문장은 어떤 때 한 사람의 삶의 근간이 되기도 한다.
큰 울림을 주고 하루의 힘이 되어준다.
이러한 문장의 힘을 너무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나도 그런 문장을 주고 싶었다.
그것에 너무 집착했었다.
그런데 비로소 오늘이 되어서야 깨달았다.
멋대로 타인의 삶에 비집고 들어가려는 건 무례하다는 것을.
내가 잘못한 것을,
글이 더이상 안 써졌던 이유를.
문장은 읽는 사람이 환영해야 한다.
자연스럽게, 그 사람이 그 세계로 들여야 한다.
내가 감히 이래라 저래라 할 영역이 아니다.
그래서 마음에 들지 않았나보다. 나도 내 글이,
인위적으로. 그 감동을 주고 싶다는 순수한 마음에 집착을 해버려
변질되었다.
좋은 문장들은 때때로 무례하다.
종종 명언들은 우리를 괴롭힌다.
이미 죽은 사람들이 하는 멋있고 대단한 무책임한 말들은
우리를 책임감 없이 조인다.
지혜로운 자는 행복하고, 힘든 사람은 정신적으로 덜 성장했거나 훌륭하지 않아서 그런 것처럼 만들어버린다.
그럼에도 우리가 이 문장들에 열광하고
진리인 양 떠받드는 이유는,
부자의 비밀을 찾고 빈자를 질책하는 것처럼
나아질 수 있다는 희망을 주기 때문이 아닐까.
나는 실패를 자신의 탓으로 여기라는 많은 자기계발서의 말에,
그게 무엇이든 용서하라는, 긍정적으로 여기라는, 별것 아닌 것처럼 받아들이거나 또는 성장의 발판으로 여기라는 책들의 말에 항상 속으로 반박했다. 삐딱하게,
'성폭력을 겪었어도 그런 말 할 수 있어?'
같잖았다. 당신들이 이걸 겪어도 그런 말이 나올까.
그랬던 것이다.
어떤 것이 진리일 수 있다.
내가 깨달은 진리가 너무 황홀하고 신비해서 얼른 알리고 싶을 수 있다.
그런데 그게 모든 사람의 인생에서 진리이지는 않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서투르고 섣부른, 가르치려 드는 말은, 그리고 글은.
빈축을 사고 상처도 줄 수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래서 조심해야 한다는 것도,
함부로 감동을 주려고 해서도 안된다는 것도.
그래서 내가 할 수 있는 최대의 역할은
그냥
나만이 쓸 수 있는 글을, 아무런 바람도 강요도 없이 적어내는 것이다.
나의 소중한 문장들을 보고
누군가는 소소한 감동을,
누군가는 울림을 느끼며
내가 넣어서가 아니라,
그들이 스스로 선택해서 그들의 세계의 문을 열고 나의 것들을 들일 것이다.
너무 건방졌고,
너무 오만했다.
이를 알고 반성함으로써 난 다시 시작한다.
다시 시작하기로 결단했다.
영혼의 무게에 짓눌리는 나의 고통을
언제나였던 것처럼 글이 다시 날 구원해주길 바라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