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 오글오글: 2월호 추억>
<월간 오글오글>은 글쓰기 모임 오글오글 작가들이
매 월 같은 주제로 발행하는 매거진입니다. 2월호
주제는 '추억'입니다.
어린 시절 나에게도 신나게 뛰놀았던 장소와 풍경이 있었을 터인데 딱히 인상적이지는 않다. 어려서부터 조용하고 내성적이었던 나는 주로 동네 친구 한 두 명과 집에서 인형놀이를 하거나 책을 읽는 등의 차분한 놀이를 하곤 했다. 뛰놀았던 추억은, 글쎄다. 오빠의 자전거 뒤에 매달려 타고 다녔던 정도일까?
또래 아이들이 하던 고무줄 뛰기나 공기놀이에도 별다른 관심이 없었다. 대신 3살 터울의 오빠를 졸졸 따라다니곤 했는데 오빠가 매우 성가셔했던 기억이 난다.
우리 오빠를 비롯한 동네 오빠들은 무척 개구쟁이였다. 놀이터 한편에 불을 피워 메뚜기와 개구리를 구워 먹으며 몰려다녔다. 충격적 이게도 한참 뒤에 오빠들이 구웠던 것이 메뚜기가 아니라 방아깨비라는 사실이 밝혀지긴 했지만.
정월대보름이 다가오면 오빠들은 깡통에 구멍을 뚫어 쥐불놀이 기구를 만들곤 했다. 나는 언제나 조용히 지켜볼 뿐이었다. 불을 붙여 깡통을 신나게 돌릴 때면, 보는 것만으로 짜릿했다. 한 번은 쥐불놀이 시연을 한다며 깡통을 신나게 돌리다가 마른풀을 모아둔 언덕에 불을 내 소방차가 출동하기도 했다. 정말이지 못 말리는 개구쟁이들이었다. 이것은 나의 추억일까? 오빠의 추억일까? 그렇게 어린 시절 나는 모든 놀이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지 못하고 먼발치에서 바라만 보는 얌전하고 조용한 아이였다.
그렇다고 나에게 기억할 만한 추억이 없는 것은 아니다. 나에게도 추억은 있다. 그리고 나의 풍경에는 언제나 바다가 있었다.
코끝이 얼얼하게 시린 바람과, 바람에 섞인 옅은 소금의 냄새. 그리고 백사장에 찍힌 어지러운 갈매기의 발자국. 나에게 있어 어린 시절 떠오르는 추억이란 그런 것이다. 고등학교 3학년을 앞두고 있던 겨울이었다. 유달리 추었던 그 겨울에 보충수업을 이유로 방학임에도 매일 학교에 가야 했다.
그날 친구와 나는 집에서 나와 학교로 가는 대신 바다로 향했다. 학교 가는 길에 바다가 있었으므로 잠시 옆길로 샜다고 해도 무리가 없겠다. 입시 스트레스와 학업에 지쳐 일탈을 꿈꿨다는 그런 이야기이면 좋으련만 안타깝게도 친구와 나는 그다지 공부에 관심이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학기 중에는 매일 야간자율학습을 해야 했고, 방학조차 마음대로 쉴 수 없는 현실에 불만이 가득했다.
그날 아침의 바다는 유달리 고요했고 눈부셨다. 넓고 긴 백사장에 사람이라고는 친구와 나, 딱 둘 뿐이었다. 인적이 없는 겨울의 해안가는 갈매기 무리가 점령하고 있었다. 그들이 남긴 발자국은 마치 미스터리 서클처럼 가운데서부터 퍼져나간 모양새였고 친구와 나는 징그럽다며 ‘꺅꺅’ 비명을 질러댔다. 굴러가는 낙엽만 봐도 웃음이 나온다던 예쁜 나이었다. 별다른 이유 없이 즐거웠고 매섭게 몰아치는 차가운 바다 바람도 그렇게 상쾌했다. 학교 따위, 입시 따위, 수능 따위 다 잊고 싶었다. 그렇게 학교에 메여있기에는 우리는 너무 젊고 피 끓는 청춘들이었다. 패딩 점퍼가 허용되지 않아 교복에 모직 코트하나 걸치고, 스커트에 검정 스타킹만 신어도 추위를 견딜 수 있었던 건 우리의 피가 뜨거웠던 탓일 것이다.
피가 끓는 것과는 상관없이 슬슬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친구와 나의 ‘삐삐‘가 요란하게 진동하기 시작했고 ’ 삐삐‘와 함께 나의 심장도 바운스 바운스 요란하게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엄마가 남긴 음성메시지를 듣기 위해 인근의 공중전화 부스로 향했다. 전화기 너머로 들려온 엄마의 메시지는 대략 이러했다.
“학교 안 가고 어디를 간 거야, 담임한테 전화 왔다. 이놈의 가시나들, 느그들 죽고 싶나? 좋은 말로 할 때 빨리 학교 가라.”
아니, 딸이 학교에 가지 않고 사라졌는데 엄마는 이런 메시지를 남긴 것이다. 차라리 집으로 돌아오라고 따뜻하게 말해줬으면 좋으련만. 고백하건대 앞서 비슷한 일이 여러 번 있었으므로 엄마의 반응은 지극히 정상이었다. 지금 내 딸이 나와 똑같이 행동한다면? 어휴. 생각도 하기 싫다.
학교를 안 간 용기에 비해 겁은 또 매우 많았던 우리들은 짧은 방황을 끝내고 학교로 돌아갔다. 그날, 학교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하교 후 엄마가 무슨 말을 했는지는 전혀 기억이 나지 않는다.
단지 그날의 해변과 갈매기와 우리들의 웃음소리, 그리고 내 친구 ‘H’만 또렷이 남아있다. 코끝이 얼얼하게 시린 바람과, 바람에 섞인 옅은 소금의 냄새와 함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