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세기 프랑스의 색채 학자 슈브릴의 색채 이론에 근거하면, 정통 점묘법은 그림을 그릴 때 붓의 끝이나 브러시 등으로 찍은 다양한 색의 작은 점을 이용하여 시각적 혼색을 만드는 기법이라고 설명할 수 있다. 나는 그 정통에 과감히 반기를 든다. 왜? 나는 못하니까! 나는 그저 검은색 볼펜 하나로 농담(濃淡)만 달리하는, 이른바 사파 점묘법을 구사하는 뻐킹 아마추어일 뿐이다. 그저 취미로 볼펜을 이용하여 도화지에 점을 톡토톡 찌끄릴 뿐이다. 잡객의 시선에서 점묘이기 때문에 가장 좋았던 점은, 한번 잘못 그으면 돌이킬 수 없는 선과 달리 잘못 찍은 점 근처에 다른 점을 켜켜이 덧찍음으로써 실수가 무마된 것처럼 보일 수 있다는 점이다. 이를 전문용어로 '뽀록이 나지 않는다'라고 한다. 아무튼, 그렇게 반복적으로 점을 쌓아내면 그림 실력이 들키지 않으면서도 완성하면 나름 있어 보이는 그림이 짜잔 하고 완성된다.
언제부터 점찍는 데에 맛이 들려버린 걸까? 때는 바야흐로 2020년 초반 즈음, 국방의 의무라는 완전군장을 양어깨에 짊어진 일병 즈음. 툭하면 일만 한다고 해서 별칭이 일병인 그 일병 말즈음. 군대에서 처음 점묘법에 매료가 됐다. 주로 입체도형이나 유명인들의 사진을 보고 점을 찍곤 했고, 보통 평일에 독서와 공부라는 명목으로 야간 연등을 신청해 연등 마감시간인 자정까지 내리 두 시간 동안 점을 찍곤 했다. 일과로 지친 몸과 마음을 잠으로 해소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조용한 야간의 옅은 형광등 아래에서 해소했으니 점을 찍는 것은 내 나름의 스트레스 해소제였다고도 할 수 있겠다.
내가 찍은 점들을 본 동기들은 '일일이 점을 찍었다고?' 라는 말과 함께 '미친놈인가'라는 감상을 뱉어내곤 했다. 누군가가 펜을 쥐고 수시간동안 점만 그렸다고 한다면 나도 그러한 반응이 나올 것 같긴 하다. 물론, 개인차는 있겠지만 나는 보고 그리는 것은 기본이요, 간단한 입체도형을 보고 그리는 데만도 몇 시간이 걸리기에 상대적으로 다른 화법보다 더욱 많은 시간을 들이며 그림을 그리게 된다. 점 하나하나를 섬세하게 찍어내는 과정이 고단 할 텐데 빠르게 선 슥슥 그어가면서 그림 그리면 되지 왜 굳이 시간을 갈아서 그림으로 바꿔내는 것을 선택했냐고 묻는다면, '재밌으니까'라고 대답하겠다. 아이러니하게도 스스로 '넌 그림을 잘 그리지 않아!'라는 평가가 기저에 깔려있었기 때문에 입대 이전의 나는 펜을 잡아도 글을 쓰면 썼지 결코 그림을 그리진 않았다. 여전히 실력에 대한 나의 생각은 달라지지 않았다. 못 그린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동시에 잘 그리고 있다고도 생각한다. 음, 즐기는 데에 실력이 중요할까? 아니! 난 그렇게 생각 안 한다.
그것만으로도 나는 충분히, 누구보다 잘 그려가고 있는 것이다.
사실, 위에선 매료가 됐다곤 했지만 그땐 사실 매료라기보다는 중독에 가까웠다. 점을 찍다 보면 가끔 무아지경의 경지가 이런 건가...? 하는 기분이 들 때가 있다. 서서히 주변의 사물과 사람들이 사진의 아웃포커스처럼 빠지는 그런 순간 혹은, 도화지에 찍히는 점이 나의 온 세상인 것만 같은 꽤나 중독성 있는 그런 순간을 경험하기도 했다. 사랑하는 그 무언가에 점점 빠져드는 느낌과 가장 맞닿아있다고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이처럼 점묘는 그 이름처럼 무언가에 '점점 묘하게' 빠져드는 방법을 알려준다. 서두르지 않고 나긋이, 느린 춤을 추듯 점점 묘하게 그렇게 빠져드는 방법을 알려준다. 지금 와서 돌이켜보면 그저 재밌어서 시작했지만 한편으로는 점이 주는 그 이면의 가치를 믿고 있기에 비효율의 끝에서조차 그 손을 놓지 않은 것일지도 모른다.
최선을 다해 둔 바둑도 복기해 보면 분명 잘못이 있듯, 사람도 과거를 반추하면 분명 후회되는 일들이 있다는 이야기를 필두로 여러 이야기를 비롯해 바둑은 인생과 닮은꼴이 많다고들 한다. 바둑이 인생과 닮아있듯 점을 찍는 것도 삶과 닮아있다고 나는 믿는다. 한 점 한 점 쌓는 점이 티끌처럼 별 볼일 없어 보일지라도 모이면 선이 된다. 선이 모이면 면이 되고, 면은 입체를 이룰 수 있다. 이렇듯 점점 묘하게 쌓이는 점들은 종래엔 보이는 것이든, 보이지 않는 것이든 쌓인 무언가를 만들어 낸다. 우리도 매일 같이 시간이라는 것을 쌓아낸다. 그리고 그 흘러가는 시간의 순간순간마다 각자만의 본질적이거나 절대적인 가치들을 촘촘히 세워낸다. 이는 시작이라는 점에서 출발해 어딘가를 향해 떠나는 여행과 같다. 흔히, 여행의 끝은 집이라고들 하지만 나는 여행의 끝에는 늘 새로운 여행이 있다고 생각한다. 생과 명은 유한할지라도 여행만큼은 무한하기에, 그 유한한 삶에서 떠날 수 있는 무한한 여행이기에, 더욱 가치 있다고 믿는다. 여행의 매력은 순간이니까, 삶의 매력은 선명히 호흡하는 순간이니까, 더더욱 가치 있다고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