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Letterist Oct 12. 2024

그럼에도 불구하고 '잡채'

퇴직 편집자의 시시콜콜

추석엔 본가와 처가에 갑니다.


두 곳 모두 그리 멀지 않기에 잠을 자고 오진 않습니다.

그냥 양가 어른들과 각각 밥 한 끼씩을 먹고 오지요.


'어차피 자주 보는데 굳이 이것저것 준비하지 마시라.'

입 아프게 얘기해도 늘 입만 아플 뿐.


엄마도 어머님도, 명절엔 늘 이런저런 음식을 하십니다.


각기 다른 두 집이지만 명절 음식이 어디나 늘 그러하듯 상차림이 크게 다르진 않습니다.


마장동과 비슷한 문화를 갖고 있는 본가의 경우엔 메인에 소갈비찜, 그 옆에 육전, 그리고 잡채.

본가보다 좀 더 밸런스 잡힌 식문화의 처가는 메인에 소갈비찜, 그 옆에 삼색 나물, 그리고 잡채.


소갈비찜이야 늘 독보적인 왕좌의 메뉴이니 그렇다 치면, 겹치는 메뉴는 보통 '잡채'인 경우가 많습니다.


잡채


만들 때 참 손 많이 가는 음식이지요.


당면 불려 삶고 시금치 데치고 당근 썰고 버섯 썰고 양파 썰고 각각 따로 볶고 (본가의 경우엔 여기에 밑간한 고기 볶음이 들어가고 처가의 경우엔 얇게 썰어 삶은 어묵이 들어갑니다) 그리고 이 많은 재료를 간 딱 맞게 버무려 내는 일은 여간 귀찮은 일이 아닙니다.


하지만 이렇게 손이 많이 가는 음식임에도 불구하고 잡채는 우리네 밥상에서 보통 사이드 메뉴 취급을 받지요.


소갈비찜의 자리는 감히 쳐다볼 수도 없고, 전이라도 잘 부쳐져 있다 싶으면 그 자리 역시 언감생심입니다.

명절날 밥상에 둘러앉은 식구들의 젓가락질도 잡채보다는 아무래도 다른 음식에 더 자주 가게 되지요.


손은 많이 가는데 젓가락은 그리 많이 오지 않는 음식, 잡채.

그렇기에 잡채는 조금은 서러운 그런 음식입니다.


이번 추석, 전 그 서러운 잡채를 이미 두 번 먹었습니다. 처가에서 한번, 본가에서 또 한 번.


그리고 아마 최소 두 번은 더 먹을 것 같네요.

본가에서도, 처가에서도 갈비찜은 남지 않았지만 잡채는 꽤 남았기에.

싸주신 잡채가 냉장고 안에 그득 있으니 말입니다.


양가 어머님이 그렇게 싸주신 두 잡채를 정리해 넣다 보니 문뜩, 생각 하나가 스칩니다.



우리 모습도 잡채랑 별다를 게 없구나..



생각해 보니 저는 그동안 주로 조연의 삶, 잡채 같은 삶을 살았습니다.


신문사에 다닐 땐 기자들을 뒷받침해 주는 마케팅 부서의 일원으로,

출판사에 다닐 땐 온갖 저자들을 빛나게 해주는 책 뒤의 편집자로 말이죠.


조금 더 생각해 보니 어디 나만 그랬겠느냐 싶습니다.


자기 자리에서 그저 묵묵히 일하는 우리네 수많은 보통 사람들.

그들이 들이는 시간은 귀하고 그들의 노력은 분명 진하건만, 명절 밥상의 젓가락처럼 냉정한 우리 사회는 그 귀한 시간, 그 진한 노력에 결코 쉽게 박수를 쳐주지 않습니다.


고생은 내가 했는데 박수는 쟤가 받고..

피똥은 내가 쌌는데 승진은 얘가 하고..


난 정말 열심히 했는데..

내가 들인 노력과 시간은 정말 별 의미가 없었나..?

난 언제까지고 이렇게 조연으로만 있게 되는 걸까..?


혹시 내가 가는 이 길이 애초에 답이 없는 망해버린 길인 건 아닐까..?


그렇게 심란한 와중에 목구멍이 포도청인지라 또 얼른 해내야만 하는 잡채 같은 일들..

그래서 바쁘고 힘든데 머리는 복잡하고 내 속이 속이 아니게 되는 그런 잡채 같은 경험들..


아마 대부분 겪어보신 적 있으실 테지요.



하지만 여러분,


역시 잡채 같은 경험을 하고 있는 제가 감히 말씀드립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잡채 만들기를 포기하지는 않기로 합시다.


우리네 엄마들이 매 명절마다 남아버리는 잡채를 '그럼에도 불구하고' 매번 만들었듯,

그렇게 저도, 또 여러분도 우리 각자의 일을 '그럼에도 불구하고' 해낼 수 있길 바랍니다.


잡채 잘 만들 줄 아는 이는 다른 음식도 대부분 다 잘하게 되는 법.

잡채 할 줄 알면서 나물 못 무치는 이 없고

잡채 할 줄 알면서 불고기 못 볶을 리 없습니다.

잡채 할 줄 알면서 버섯볶음 못 만들 리 없고

잡채 할 줄 알면서 간을 못 맞출 리 역시, 없습니다.


잡채를 만들며 이 요리 저 요리에 다 능숙해지듯, 우리들 각자가 지금 하고 있는 일 또한 분명 그럴 겁니다.


비록 당장은 내가 하는 이 일이 주목받지 못하는 그런 일이지만, 비록 당장은 내가 빛을 못 보는 조연이지만. 그 묵묵함을 견뎌낸 어느 날, 우린 분명 발견하게 될 겁니다.


그 잡채 같은 일을 해내며 어느덧 길러진 우리 안의 수많은 능력과 감각, 그리고 이를 향한 진심 어린 찬사와 세상의 바쁜 젓가락질을 말이죠.


그러니 부디 멈추지 않으시길, 포기하지 않으시길 바랍니다.


저도 저만의 잡채를 묵묵히 만들면서,

여러분의 잡채 만들기 또한 진심으로 응원하겠습니다.


오늘도 감사합니다.

매거진의 이전글 맛있던 장어구이집.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