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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etterist Dec 27. 2024

타이어 공기압이 낮습니다.

퇴직 편집자의 시시콜콜.

35... 넉넉하네..

34... 이 정도면 괜찮네..

33... 흠.. 그래.. 아직은 뭐..

32... 아.. 곧 뜨겠네.. 어디로 가지..


대충 35 즈음부터 그 아래로 하나씩, 겨울철마다 나는 숫자를 세곤 한다.

숫자는 낮아지는 기온에 발맞추어 차근차근 낮아진다.

35, 34, 33, 32, 31, 30... 29...!


그렇다. 오늘 이야기는 바로 타이어 공기압에 대한 이야기이다.



     

'어이쿠 오늘 엄청 춥네, 불 들어오려나?'

아직 안 들어왔네. 다행이다.


'으아 오늘은 더 춥네? 오늘은 진짜 뜨겠는데?'

어? 아직 안 뜨네. 다행이다.


32, 31, 30을 지나 대충 29 즈음에 이르면 들어오게 되어있는 차량 타이어 공기압 경고등을 내가 겨울마다 초조한 마음으로 기다리는 건 저 경고등에 특별한 애정을 품고 있어서는 아니다. 좋든 싫든 어쨌든 분명하게, 그리고 곧 마주하게 될 경고등이니까. 그냥 그래서일 뿐이다.


물론 차량 계기판에 공기압 경고등이 켜진다 한들 차가 곧바로 망가지는 것은 아니다. 다년간의 경험상, 경고등을 밝힌 채 그대로 주행을 해도 사실 딱히 치명적인 문제가 생기지는 않는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겨울날의 내가 마치 숭한 무언가의 집행을 기다리는 초조한 피집행자의 심정으로 이를 매일같이 기다리고, ‘다행이네..’ 라는 안도를 내뱉곤 하는 것은 성격 자체가 도무지 무던하지 못한 나에게 카센터라는 곳이 제법 껄끄러운 곳이기 때문이다. 특히, 다른 볼일 없이 그저 타이어에 바람을 넣기 위해 방문하는 카센터는 더더욱 말이다.

 

"안녕하세요"

(최대한 밝게 건네려 늘 노력하지만 내가 억지로 보일 수 있는 밝음의 최대치는 보통 사람들의 무표정과 유사하다. 태생적으로 내가 좀 그렇다)


"저 혹시.. 타이어에 바람 좀 넣을 수 있을까요? ^^?"


라는 어색한 말 뒤에 나는 꼭 "비용은 얼마일까요?"라는 말을 재빨리 덧붙이는데 이는 순전히 '타이어에 공기 넣는 행위에 비용을 청구하고, 지불하는 것이 과연 합당한 일인가?' 에 대한 사회적 합의가 아직 덜 되어있기 때문이다. 개인적으로는 당연히 이 행위에도 적정 비용을 지불해야 마땅하다고 생각하지만, 아직 세상이 그렇게까지 각박해지지는 않은 덕에 이 행위에는 적정 시장가라는 것이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차라리 '공기 주입 3000원, 혹은 5000원' 등의 문구가 쓰여있으면 오히려 당당하게 좋으련만, 우리네 카센터 아저씨들 대부분은 그깟 몇 푼의 돈보다는 그냥 적당한 수준의 츤츤한 대화 몇 마디를 조금 더 선호하시는 것 같기도 하고 말이다. (이는 카센터에는 아직 낭만이 남아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하지만, '적당한'이란 단어는 본질적으로 애매모호한 단어이기에 성격이 무던치 못하고 걱정을 굳이 만들어 해대며 붙임성도 별로 없는 나 같이 모난 이들은 저 낭만의 카센터에서 때때로 저 홀로 곤란을 겪게 되는 것이리라. '혹시 내가 꽁으로 뭔가를 요구해 대는 염치도 없는 그런 놈으로 보이기라도 하면 어쩌지?' 라는 걱정을 품게 되는 그런 곤란을 말이다.


나 역시 그런 곤란을 매년 겨울마다 겪어왔기에 겨울이 깊어지고 숫자가 정직하게 내려갈수록 내 신경은 점점 예민해지곤 했는데 올 겨울에도 이 비극에 예외는 없었다.


아침 최저 기온이 영하 7도에 달했던 오늘, 계기판의 숫자는 드디어 29에 달했고 내 예민함 역시 절정으로 치달았다. 혹자는 '아니 그럼 그냥 대충 겨울철 되면 곧바로 카센터 가서 미리 바람 넣으면 되는 거 아닌가? 왜 굳이 그걸 초조하게 기다린대?' 라는 의문을 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이는 없는 걱정도 굳이 만들어서 해대는 나 같은 이들을 잘 모르기에 품을 수 있는 의문일 뿐이다. 공기압이 아직 덜 내려갔는데 미리 타이어에 바람을 넣어버렸다가 더 추워질 게 분명한 깊은 한겨울에 또 공기압이 내려가버려서 두 번 카센터에 가게 되면 이 얼마나 난감하겠느냐는 말이다.


어쨌든, 나는 날카롭게 벼려진 신경을 한껏 곤두세운 채 온갖 잡생각에 휩싸이기 시작했다.


아, 이제 진짜 곧이겠구나.. 어디서 넣어야 할까..? 주말에 고속도로 타기 전엔 넣어야겠는데.. 어? 근데 내일이 주말이잖아? 그럼 오늘이네? 아.. 근데 기름도 넣어야 되겠다. 근데 일단 바람은 어디서 넣지? 작년에 갔던 곳으로 갈까? 거기 아저씨 좋았는데.. 이번에도 흔쾌히 해주실까? 그때 그 아저씨가 안 계시는 건 아닐까? 다른 곳으로 갈까? 거기가 아저씨는 좋았는데 길가에 차 대기가 너무 곤란했잖아.. 어디로 가지? 공임나라에서 한번 찾아볼까? 간 김에 차량 점검도 좀 의뢰해 볼까? 얼마 전부터 차에서 미세하게 이상한 소리 나잖아(참고로 말하자면 아내는 이 소리가 전혀 들리지 않는다고 했다. 아주 작은 소리이기는 하다) 이거 먼저 수리하고 나서 '아, 근데 바람도 좀 넣어주세요'라고 하면 굉장히 자연스럽지 않을까? 근데 차 수리비 왕창 나오면 어쩌지? 나 돈 별로 없는데? 아.. 골 아프네.. 아.. 근데 이거 진짜 곧 불 들어오겠다..

      

무던함과는 거리가 멀어도 한참 멀고 온갖 잡생각을 떠올리며 스스로의 마음을 괴롭게 하는 데에는 도가 튼 나의 멋진 성격 덕분에 오늘 아침, 영등포에서 목동으로 향하던 타이어 공기압이 낮은 차량 한 대 안에는 갖은 번뇌가 강물처럼 흘렀더랬다.




그렇게 차를 몰아가던 길,

영등포에서 목동으로 가는 길은 거리가 가깝기도 가깝거니와 눈 감고도 갈 수 있을 만큼 내겐 익숙한 길이었기에 강물처럼 흐르는 번뇌에는 그 어떤 제약도 가해지지가 않았고 그렇게 물살은 점점 거세어져만 갔다. 그 덕에 나는 정말 별 이상한 생각까지도 다 할 수가 있었는데 그 이상한 생각이란 바로 이런 것이었다.


근데 현대차 애들은 그래도 좀 착하네..


'현대차는 좋은 차네'도 아니고 현대차 '애들'은 '착하네' 라는 생각.

이 뜬금없는 생각이 바로 오늘 내 생각의 종착지였다.


그렇다면 나는 왜 뜬금없이 굴지의 글로벌 대기업 현대차 임직원들의 '선함'을 생각했는가?


이는 안양천을 넘어가는 동안 결국 등장해 버린 계기판의 경고 문구에 내가 나름의 감동을 받았기 때문이었는데 그 경고 문구의 정확한 워딩인즉슨 이러하였다.


타이어 공기압이 낮습니다.


새삼스러운 문구도, 특별히 미학적으로 아름다운 문구도 아니었건만 나는 진심으로 저 짧은 문구에 큰 감동을 받았는데 이는 현대차 측이 심보를 조금만 매섭게 먹었더라면 대략 아래와 같은 식의 문구를 띄우는 일도 충분히 가능했으리란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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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실제 저렇게 긴 문구를 계기판에 띄울 수는 없겠지만 대충 예를 들어 보자면 그렇다는 것이다.


인스타나 유튜브를 통해 온갖 것을 광고하는 영세한 개인사업자들이야 그냥 그렇다 쳐도 어느 정도 규모 있는 회사들조차 누군가의 불안과 공포를 양분 삼아 그저 자신들의 이득을 취하려고만 하는 세상이니까, 그런 심보가 '마케팅 기법'이라는 이름으로 근사하게 포장되는 세상이니까, 걱정에 휩싸인 누군가의 불안에 진심으로 귀 기울이는 이보다는 그들의 불안을 빨아먹는 이들이 훨씬 더 능력 있는 사람으로 대우받는 세상이니까. 그러니까 현대차 역시, 하려고 들었으면 충분히 할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현대차의 계기판에 띄워진 경고 문구는 그저 담백하고, 맥락에 맞았으며, 중언부언하지 않았고, 무척 적확하기만 했을 뿐, 그 어떤 이득을 취하려는 의도가 전혀 없어 보였으니 이 어찌 감동을 아니 받을 수 있었겠는가.


혹시 아직도 이걸 안 해보셨느냐? 남들은 다 하고 있는데 모르셨느냐? 하지만 괜찮다. 이제 저희를 알게 되셨으니 아무 걱정 마시라! 이거 하나만 사시면 만사가 그냥 싹 다 오케이다!


잠깐! 당신 지금 위험하시다! 당신처럼 그렇게 살면 무슨무슨 위험이 몇 프로나 증가한다! (혹시 암이나 잔혹한 당뇨 등에 걸리고 싶으신 거냐?) 하지만 역시 걱정 마시라! 이제 저희를 알게 되셨...(이하 중략)..


돈 벌어먹는 일이 중한 일이라는 것은 알지만 그래도 좀 적당히들 했으면 좋겠다는 마음이 간절한 것은 내 팔자가 아무래도 크게 돈 벌어먹을 팔자가 못 되기 때문일까?


크게 돈 벌어먹을 팔자가 못 된다면 널리 읽히는 팔자라도 되면 참 좋겠건만 이 역시 ‘충격!’, ‘공포!’,  ‘긴급!',  ‘화제!’, '대위기!' '특별진단!' 따위의 키워드를 남발해 대는 이들의 몫으로 이미 넘어간 것 같으니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공기압이 낮아진 타이어처럼 슬슬 쭈그러드는 일밖에 없는 것일까?


하는 생각이 들어 오늘은 영 기분이 좋지 못하다.


일단, 경고등을 끄러 가야겠다.

낭만의 카센터로, 혹시 필요할지 모를 현금도 꼭 챙긴 채 말이다.




2024. 12. 27.

샤를의 법칙이 원망스러운 추운 날에.

레터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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