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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슬 May 20. 2023

유학을 왔는데, 휴강이다

툭하면 파업하는 영국에서 유학생으로 살아남는 법

글을 들어가기에 앞서, 국가적인 시위는 비단 영국에서만 일어난 일이 아님을 미리 일러두고 싶다. 프랑스에서도 연금 개혁 시위로 인해 파리가 뒤숭숭했고, 그리스에서는 열차 사고가 일어난 뒤 시민들이 들고일어났다. 영국의 시위는 급격한 물가 상승을 따라가지 못하는 월급 문제 때문인데, 직종을 가리지 않고 거의 날마다 시위가 일상처럼 번졌다. 이 글은 그 중에서도 영국 대학가에서 벌어진 시위들과 내 대학 생활을 중점으로 다룰 예정이다.



작년 9월 갓 대학에 입학했을 때 가장 힘들었던 건, 아무래도 매 주 읽어야 하는 자료의 분량이었다. 과마다 다르겠지만, 국제관계학과 세계사를 복수전공하고 있는 나는 모든 과목을 합치면 최소 150페이지 가량의 책과 학술지를 수업 전까지 읽어가야 했다. (참고로, 모든 과목은 매 주 1회의 강의와 1회의 수업을 진행하며, 수업은 소규모의 토론으로 이루어진다. 미리 독서를 해 가지 않으면 수업을 따라갈 수 없을 정도다.) 지금이야 요령이 생겨 필요한 부분을 빠르게 찾아 읽는 스킬이 늘었지만, 멋모르던 1학기 초에는 강의를 듣지 않는 모든 시간을 독서에 할애해야 할 정도로 수업 준비에 위압당했었다. 거기에 에세이 과제라도 나온다고 하면, 수업 준비를 위해 읽는 것과는 별개로 추가적인 읽을 거리들이 늘어났다. 복수전공 특성상 학기 중반부터는 사실상 일주일에 하나씩 에세이 과제가 새로 나왔다. 그렇게, 읽고 쓸 것들에 쫓기듯 살다가 첫 학기가 마무리되었다. 그래도 2학기가 되어 이제는 읽는 데에 조금 익숙해졌다 싶을 때쯤, 전국적인 대학가 시위가 장기간 이어졌다. 강의와 수업이 분명 있었는데, 없어졌다. 


모든 교수님들께서 시위에 참여하신 건 아니다. 영국 대학가의 시위는 UCU라고 하는 대학 노동 조합에서 전국적으로 (지금까지도) 주도한 것인데, 과목에 따라 노조 소속이 아닌 교수님들께서 가르치시는 수업은 정상적으로 운영됐다. 그러나 몇 가지 불편한 점들은 여전히 존재했다. 아무리 내가 듣는 수업이 정상적으로 진행된다고 해도, 시위가 있는 날이면 노조 구성원들이 학교 건물들을 점거하고 학생들이 들어가지 못하게 막는 경우가 많았다. 한 번은 조별 과제가 있어 친구들과 도서관에서 만나기로 했는데, 시위대가 도서관에 들어가지 말라고 입구를 막아서서 당황스러웠었다. (이건 나중에는 이렇게까지 극단적으로 진행하지는 않기로 논의가 됐는지, 2학기 중간부터는 건물 출입을 못하는 일은 없었다)


강의 휴강은 정말 잦았고 (때문에 몇몇 강연자들은 코시국 당시 이루어졌던 온라인 강의 녹화본을 대신 제공했다), 내가 속한 소규모 그룹을 지도하시는 교수님께서 시위를 하시면 수업까지 취소되는 경우도 꽤 있었다. 기간을 정해 놓고 매일 시위한 건 아니지만, 공교롭게도 시위하는 날짜와 수업 날짜가 겹치면 그냥 취소라고 생각해야 했다.  그나마 세계사 과목들은 여러 가지의 선택지들 중에 원하는 질문들을 골라 서술형 답변을 제출하는 방식으로 최종 시험을 치렀기 때문에, 시위의 영향이 크지는 않았다. 그냥 그 주제들을 피하고 나머지 주제들만 준비하면 그만이었으니까. 문제는 국제관계학이었다. 국제관계학 수업은 1년 동안 배운 주제들 가운데 하나를 골라 정책 제안서를 제출해야 했는데, 시위 때문에 제대로 낭패를 봤다. 학교 측에서 강의를 제공하지 못한 수업 주제로는 학생들을 평가할 수 없게끔 막았는데, 하필 제일 관심 있던 주제의 강연자가 시위에 참여하면서 아예 그 주제를 다루는 게 불가능해졌기 때문이다.

1년의 모든 수업들이 마무리된 지금 (시험 기간)까지도 시위가 이어져, 심한 경우 학생들의 최종 시험을 채점하지 않겠다고 파업하시는 분들도 계시다. 학교 측에서는 이렇게 되면 학생들이 학점을 받을 수 없기 때문에 어떻게든 패널티를 주겠다고 하는 모양새이긴 한데, 솔직히 어떻게 될지 잘 모르겠다. 


그렇다면 대체 왜 이런 시위가, 한 두 번도 아니라 몇 달 이상 지속된 것일까. 우선 UCU 측의 공식 발표에 따르면, 대학가의 노동 시장이 매우 열악한 환경에 놓여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이들은 그것을 Four Fight+Pension이라고 부르는데, 각각:

1. 물가 상승률을 반영하지 않는 월급제, (Pay)

2. 초과 근무 수당 미제공, (Workload)

3. 대학 내의 계약직 및 비정규직 혹사 (Casualisation), 

4. 젠더 및 인종에 따른 차등적 월급 지급 (Equality),

5. 은퇴 연금 지급 여부 불투명화 (Pension)

때문이다.


세계사에 너무나 진심인 사람이자, 수업으로 배우는 것 이외에도 연구하는 데에 관심이 많은 나는 영국에서 교수로 등단하는 것도 고려하고 있었다. 아무래도 휠체어로 다니기가 정말 좋기도 했고, 내 연구를 하면서 꾸준히 후학을 양성하는 데에 이바지할 수 있는 직업이니까. 그런데 이렇게 하루가 멀다 하고 벌어지는 시위들을 보면서, 대학가에서 일하는 것이 어쩌면 정말 불안정한 선택지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결국 교수라는 직책뿐만 아니라 다른 진로 선택지들도 함께 알아보고 있는 중이다. 실제로 최근 여러 교수님들께 진로 상담을 받았는데, 한 분도 빼놓지 않고 영국에서의 교수직을 추천하지 않으셨다. 지금도 이 정도면 내 세대가 교수직이 될 나이가 되었을 무렵에는 악화되었으면 악화됐지, 좋아지지 않을 거라고 하셨다. (특히 모 교수님께서는 적어도 생활을 영위하게 해 줄 수 있는 다른 직업들이 지천에 널리고 깔렸는데, 굳이 왜 생활비도 제대로 벌기 힘든 분야를 택해서 인생을 힘들게 살려고 하냐고 하셨다.... 이건 좀 충격적이었다)



그럼, 시위로 점철되었던 2학기에는 어떻게 살아남았을까.

우선 매 주 해야 하는 리딩들을 한 주씩 앞당겨서 미리미리 끝냈다. 그 덕분에 두 배로 바빠지긴 했지만, 학업을 놓치지 않으면서 모의 유엔 국제 대회들을 참가했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시위들 때문에 수업이 취소되어서, 대회 준비를 하면서도 사실상 학업적으로 놓치는 부분이 거의 없었다. 2학기에는 유럽권 대학들이 참여하는 대회 1개와 프랑스 파리에서 열리는 대회 1개를 참여했는데, 공교롭게도 두 대회의 일정이 모두 시위와 맞물렸다 ㅎㅎㅎ.... 프랑스 파리도 사실은 한창 연금개혁 시위 중일 때 다녀와서 고생하긴 했는데, 이건 다른 편에서 별도로 다뤄보기로 하겠다.


그리고 시험 준비를 비롯해 각종 평가에 대비할 때는 Office Hour 제도를 이용했다. 수업/강의 시간 이외에 각 교수님께서 일 주일에 특정 시간을 할애해 학생들의 질문에 대답해 주시거나 과제 피드백을 제공해 주시는 제도이다. 물론 이것도 시위에 참여하시는 교수님들은 Office hour을 취소하시는 경우가 왕왕 있었지만.... 같은 과목을 가르치시면서 시위에 참여하지 않으시는 다른 교수님의 office hour을 신청하면서 사정을 말씀드리면 동일한 양질의 피드백을 받을 수 있었다. 휴강이 되면 교수님께 강의 직후 질의응답을 할 수 없기 때문에 불리한 부분들이 있지만, 그걸 어떻게든 메꾸려고 노력했다.


그리고 사담이지만, 나는 한국에 들어가면 분명 공부를 하지 않을 것임을 (겨울 방학 때 미리 겪어봐서) 잘 알고 있기 때문에 봄방학 때는 런던에 잔류했다. 사실 내 과가 성적에 들어가는 거의 모든 평가를 늦봄 - 초여름에 몰아서 치르기 때문에 겨울 방학 때 부담 없이 쉴 수 있었던 것도 있지만 ㅎㅎ...


그렇게 어찌저찌 2학기도 끝났다. 지난 주에는 모든 역사 시험을 치렀고, 이 글을 쓰는 지금을 기준으로 다음 주까지 마지막 최종 에세이만 제출하면 완전히 1학년이 마무리된다. 이번 9월에 이것보다 더 시위가 심해지면 어쩌나 고민이긴 하다. 다른 학교는 그런지 모르겠지만, 우리 학교는 전체 학위 수여 기준에 있어서 1학년보다는 2, 3학년 성적이 더 큰 비중을 차지한다. 그래서 만약 시위가 내년에 더 심해진다면 더 우려스러울 거 같지만... 일단 그건 그때 가서 생각하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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