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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슬 Oct 28. 2022

준비성

Plan B? Plan C!

네이버 지도나 구글 맵 등, 모바일상으로도 쉽게 길을 찾을 수 있게 해 주는 어플들 덕분에 우리는 쉽게 초행길에서 목적지를 찾아갈 수 있다. 그런데 휠체어를 타고 길을 찾다 보면 어플을 사용하고 있음에도 눈 뜬 장님이 된 것 같은 기분을 느낄 때가 많다. 때문에 나는 어플의 사용 여부나 초행길 여부에 상관없이 도착 예상 시간보다 훨씬 일찍 집을 나설 채비를 해야 했고, 준비성은 그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길러졌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나서 바로 대학에 진학하지 않고 1년 간 자기개발에 힘쓰는 시간을 보내면서, 자주 서울을 왔다갔다 했다. (참고로 나는 영국으로 유학오기 전까지 지방에 살고 있었다.) 입시 때문에 시도하지 못했던 각종 자격 시험을 응시하기도 했고, 때로는 콘서트와 같은 문화 생활을 즐기기 위해 서울에 다녀오기도 했다. 그러나 그때마다 나의 발목을 잡은 공통적인 요소가 하나 있었으니, 바로 정해진 시간까지 입실 / 도착하는 것이었다. 이유는 생각보다 간단하다.

대부분의 휠체어 사용자들은 장애를 증명할 수만 있다면 웬만한 국내 지역 장애인 콜택시 (줄여서 장콜)를 이용할 수 있다. 이것도 지역마다 조금씩 조건이 다르기는 하지만, 어쨌든 휠체어를 탄 채로 탈 수 있는 교통수단인 데다 지하철이나 버스에 비해 좀 더 다양한 지역을 운행하기 때문에 인기가 많은 선택이다. 그러나 넘치는 장콜 수요에 비해 운행되고 있는 택시의 수는 턱없이 적어서, 운이 나쁘면 30분 걸어서 갈 수 있는 거리를 이동하기 위해 2시간, 3시간까지 대기해야 하는 수가 있다. 반대로 이렇게 오랫동안 대기할 것이라고 예상하고 미리 장콜 배차를 신청했다가 너무 일찍 차가 도착해서 급하게 떠나야 하는 경우도 종종 있다. 이런 불확실성 탓에, 하루에 약속을 여러 개 잡는 건 불가능에 가깝다. 물론 이런 장콜에 기댈 필요 없이 부모님 찬스를 쓴다면 이야기가 또 달라지겠지만. 


그러면 여기에서 생기는 의문점이 하나 있다. 그럼 휠체어를 타는 사람들은 버스나 지하철을 아예 타지 못할까? 우선 한국을 기준으로 이야기하자면, 수도권 중심으로 저상버스가 다니기는 하지만 실제로 이를 이용할 수 있는 휠체어 승객들의 수는 적다. 저상버스를 타려면 기사님이 리프트를 내려 주셔야 하는데, 이 리프트가 제일 잘 고장난다.... 때로는 기사님과 미리 눈맞춤을 하는 등, 내가 이 버스에 탈 것이라는 신호를 제대로 보내지 못하면 버스가 서지 않는 경우도 있다. 영국의 경우에는 조금 이야기가 다르다. 영국의 모든 버스에는 휠체어 마크가 붙어 있는 버튼이 하나씩 달려 있는데, 이 버튼을 누르면 자동으로 리프트가 내려오게끔 되어 있다. 물론 가끔 이 리프트가 고장난 영국 버스들도 있다. 하지만 버튼을 누르기만 하면 혼자서도 휠체어를 탄 상태로 버스에 탑승할 수 있고, 버스 내에서도 동일하게 휠체어 마크가 그려진 버튼을 누르면 다음 정거장에서 자동으로 리프트가 내려온다. 한마디로 버스 안에서 누르는 버튼은 '저 다음 정거장에서 내릴 거에요!'라고 기사님께 알려드리는 신호가 되는 셈이다. 

지하철은 한국과 영국이 비슷한 것 같다. 둘 다 휠체어를 타고 다니기에 좋은 노선과 그렇지 않은 노선들이 공존한다. 한국은 일부 역(공항철도 홍대입구역, 4호선 회현역 등등)에서 '발빠짐을 주의'하라는 안내 방송이 나오는데, 이런 역들은 열차와 플랫폼 사이의 간격이 너무 넓어서 휠체어 사용자가 혼자 다니기에 상당히 위험하다. 자칫 휠체어 바퀴가 그 사이에 끼면서 안전사고로 이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영국은 해당 문제에 대해 플랫폼과 열차 사이의 간격에 따라 각 역을 다른 색으로 표시한 노선도를 제공하고 있다. 하지만 당연히 너무 간격이 넓은 역들도 있고, 출발하는 역에서는 엘리베이터가 있었는데 도착하는 역에는 계단밖에 없는 불상사가 생기기도 한다.


결국 이 모든 정황을 고려했을 때, 휠체어 사용자에게 있어서 지도 어플의 도착 예상 시간은 사실상 '도착 희망 시간'이다. 같은 거리를 이동해도 휠체어 자체의 속도가 상대적으로 느린 데다, 다른 사람들이 계단이나 에스컬레이터를 이용해 환승역에서 새로운 운임 구역으로 넘어갈 때 휠체어 사용자들은 엘리베이터를 찾아 헤매야 하기 때문에 실질적인 이동 시간이 더 오래 걸릴 수밖에 없다. 대표적인 예시가 바로 서울역. 어쩌다가 콘서트 관람 때 한 번, 비자 센터를 방문하기 위해 한 번 갔던 서울역에서, 결과적으로 두 번 다 헤맸다. 엘리베이터가 한 번에 모든 층을 다 운행하는 것이 아니고, 그렇다고 갈아타야 하는 엘리베이터가 바로 붙어 있는 것도 아니어서 환승하는 데에만 30분 이상이 걸렸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어플에 뜨는 도착 예상 시간만 믿고 느긋하게 준비했다가는 약속에 늦기 십상이며, 인간관계에 있어서도 안 좋은 영향을 끼칠 수밖에 없다. 모두의 시간은 금이기 때문에. 그러니 내가 휠체어를 탄 채로 살아남기 위해서는 크게 두 가지의 일을 미리 해야 했다. 첫째, 어딘가를 가기 전에 미리 휠체어 접근성이 좋은 동선을 조사해서 외울 것. 둘째, 약속 시간보다 최소 1시간 먼저 도착한다고 생각하고 외출을 준비할 것. 나는 대학에 입학하기 직전 구글 맵에서 제공해 주는 360도 회전 기능을 이용해 사진을 찍듯이 기숙사에서 캠퍼스까지 가는 길을 외워 두었고, 도착했을 때 그나마 길을 덜 헤메고 강의를 들으러 다녔다. 아직까지 수업에 지각해 본 적은 한 번도 없다. 그리고 내가 상대방을 기다리는 한이 있더라도 절대로 느긋하게 준비하지 않는다. 남들이 빠르게 5분 내지는 10분 내에 준비해서 외출할 때, 나는 미리 옷을 다 챙겨놓은 상태에서 외출 준비를 시작해도 정말 최소 30분은 걸린다. 그렇기 때문에 '빨리 준비하면 되니까 조금만 유튜브 영상 보다가 씻어야지', '뛰어가면 되니까 이 책 조금만 더 읽다 가야지'와 같은 핑계는 나 스스로에게 통하지 않는다. 


이렇게 앞당겨 외출 준비를 하게 되면 기본적인 할 일은 더 빨리 끝내놓아야 한다. 이를테면 에세이와 같은 학업 과제는 무조건 제출 기한 이틀 전에 미리 제출하려고 노력한다. 교수님들께서는 그날 밤 11시 59분 전까지 제출하라고 하시는 편인데, 그걸 믿고 마지막까지 미루어 두었다가는 급하게 서두르다가 과제의 질이 낮아질 뿐만 아니라, 어떻게든 시간을 쪼개보겠답시고 아침에 자료를 한 페이지라도 더 읽으려다 더 정신 없는 하루를 시작하게 된다. 게다가 막판에 치명적인 오점을 발견하게 되어도 고칠 시간이 부족하기 때문에 제출하기에 급급해진다. 이런 불상사를 막고자 마감 기한으로부터 며칠 전에 과제를 끝낼 수 있도록 여러 가지 계획을 짜고 우선 순위를 정해서 그날그날 공부하는 편인데, 과제를 놓치지 않으면서 여유롭게 하루를 보낼 수 있어 나름 만족하고 있다.


 

휠체어를 타게 되면서 이동 시간을 내 마음대로 조정할 수 없다는 걸 깨달은 이후로 여러 가지 계획들과 시간 관리 능력을 키우게 되었다. 물론 쉽지는 않지만, 어떻게 보면 휠체어를 탄다는 이유로 가지게 된 불리함을 극복하고, 내 나름대로 생존하기 위해 고안해 낸 방법이 아닐까 싶다. 이런 면들 때문에 내가 주변 친구들로부터 '넌 뼛속까지 J다 (MBTI에서 계획형)'라는 이야기를 듣는 것 같다. 때로는 이렇게 미리 준비하지 않아도 쉽게 이동 시간을 단축할 수 있는 이들이 부러울 때도 있지만, 그럼에도 나의 삶을 온전히 받아들이고 살아갈 수 있음에 감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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