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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담 May 18. 2024

일은 일이 가는 길이 있다
나는 자격을 갖추는 걸로

이기론(利己論) - Ch3.  해체, 그리고 脈!

일은 일이 가는 길이 있다. 그러니 나는 '일'에 적합한 사람으로서의 자격을 갖추는 것이 내 할일이다.

나를 해체한 후 중심이 되는 명제 가운데 하나이다. 


일. 그리고 나.

일과 나는 인과관계가 아니라 상관관계에서 바라볼 필요를 전제하고 이야기를 시작하려 한다. 그러기 위해 우선 일과 나에 대한 정의부터 내리는 것이 좋겠다. 


'일'이란 '결과', 나아가 '원하는 결과'를 의미하며

'나'란 '일의 결과를 바라는 주체자로서의 개인'을 의미한다. 조금 더 보태어 내게 '일'이란 나 자신이 사명으로 여기는, 본질적으로 타고난 것을 이루는 크고 작은 결과들을 의미한다. 


일이란 결과다. 결과란 원인을 시작으로 과정을 거쳐 탄생한 '창조된 무언가'다. 모든 진화는 창조를 전제하니 인간, 인간사회의 모든 진화는 창조된 것으로부터다. 또한 '일=창조=원하는 결과'라고 개념화되었다면 우선되어야 할 것이 '결과'를 보는 눈이어야 한다. 즉, 일의 끝에서 전체를 보는 시각이 필요하다. 이 시각으로 볼 때 '나'는 그저 '일'을 위한 도구이며 수동체인 것이다. 일과 나를 상관관계로 볼 때 일은 나에게 늘 명령한다. 

왜? 

결과니까. 

결과에 서 있는 주체는 '일'이며 과정을 이어가는 주체는 '나'이니까. 

결과는 자신의 정체를 세상에 드러내기 위해서 과정을 움직이려는 자체동력을 지니고 있으니까.


따라서, 

전체를 보는 눈은 시작부터 과정 전체의 '합일(合一)'이 없다면 가능하지 않다. 그렇다면 무엇이 합일을 이뤄야 한다는 말인가? 합일을 이루기 위해서는 '부분'을 알고 이해해야 한다. '원하는 결과로서의 일 전체'를 보는 합일을 위해 '나'와 나를 둘러싼 '나 외의 모든 것'이 부분이라고 하겠다. 그렇다면 우선 '나'부터 살펴보자. 


'나'라는 사람은 성격을 지니고 있다. 하나로 규정되기 어려운, 감정과 이성이 복합적으로 작용하며 다양한 성질의 성격들을 지니고 있다. 


'성격(Personality)'이란 단어는 라틴어에서 파생되었는데 개인을 특징짓는 육체적, 심리적, 환경적 요인을 모두 포함하는 전체적 속성이며 Persona, 연극배우들이 쓰던 가면에서 유래되었다. 또한 'through(통하여)'라는 의미의 'per'와 'speak, sound(말하다, 소리내다)'라는 의미의 'sonare'가 조합된 말이기도 하다. 개인으로서의 나.는 수많은 가면을 지니고 나의 내외면을 가면으로, 소리로 드러낸다. 그것이 성격이다. 감각과 의지를 지닌 self와 ego로서의 나, 타자와의 관계를 드러내는 상호주체자로서의 나. 이 다양한 가면으로 나는 '일'과 상관된다.


그렇다면 '원하는 결과로서의 일'이 지닌 커다란 2개의 요소 가운데 하나인 '나'는 본성적으로 때에 따라 가면을 바꿔가며 일 전체가 가고자 하는 맥락을 흐트리기도, 엮어내기도, 엉키게도, 풀리게도 할 수 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일이 되어 가는 과정의 어디서 어떻게 무엇으로 엮어내고 풀어버릴 지를 나는 가늠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저 때론 감정에 지배당해서, 때론 이성적인 판단의 오류인지도 모른 채, 혼자 북치고 장구치고 하면서 일이 가는 길을 훼방놓을 수도 있다는 의미가 된다. 하기 싫어지기도 하고 자신의 능력을 의심하기도 하며 더 좋은 무언가에 홀리기도 하니 일이 결과를 만들어내는 경우와 그렇지 못한 경우에 '나'라는 변수는 참으로 통제불능이라고 할 수 있다. 결국, '일의 결과가 나에게 달려 있다.'라거나 '일은 내가 주체적으로 해나간다'는 말에 대해서 반은 맞고 반은 그르다.     


그렇다면, 또 하나의 변수인 '나 외의 모든 것'은 어떨까? '일'에 영향을 미치는 나 외의 모든 것은 정말 다양하다. 능력, 사람, 돈을 비롯해 모든 환경적 요소들이 '일의 결과'에 영향을 미친다. 무조건 상관관계가 있다. 많든 적든 긴밀하든 아니든 무조건 영향을 미친다. 


그런데 여기서 간과해서는 안될 전제조건이 필요하다. 역사적으로 '창조'된 것들은 말도 안되는 환경에서 탄생한 경우가 수두룩이다. 전기도, 자동차도, 인쇄기술도, 기타등등 모든 창조가 '기가 막힌', '말도 안되는' 상황의 결부로 창조되었다. 그러면 보여지는 요소 외에 보이지 않는 요소가 더 긴밀한 영향을 미친다고 할 수 있다. 가령, '운', '기회'같은 것들이다. 


따라서, '나 외의 모든 것'이라는 전제에는 

'보이는 것'보다 '보이지 않는 변수'에 더 집중할 필요가 있다. 


일전체를 미분화하지 않으면 그 일의 어떤 지점에서 어떤 신기하고 기묘한 상황이 개입되어 일이 결과로 이뤄지는 지 알 수 없다. 그렇다고 경험해보지 않고 제대로 알지 못하는 '새로운 일'을 내가 어찌 미적분화하겠는가. 그저 나는 

'원하는 결과로서의 일'을 위해 

쓰이는 도구를 자처하겠다. 

그 일이 찾는, 그 일에 어울리는 인물이 되기 위해 자격을 갖추고 

필요하다면 연마하고 

넘치면 깎아내면서 

일에 제일 적합한 자가 되는 것만이 

내가 할 수 있는 전부인 것이다.


일, 즉 창조에는 반드시 전조가 있다. 

사람은 기존의 내 크기보다 작거나 딱 내 크기만한 일은 '바라지' 않는다. 그런 일은 그냥 하면 되기 때문이다. '바란다'는 것은 지금 이루기에는 버겁거나 너무 큰 것이기에 '바라는' 것이다. 즉, 지금의 내가 파괴되어야만 그것을 얻을 수 있다. 창조의 전조는 파괴다. '바라는 바의 탄생', 그러니까. 일, 창조는 지금의 내가 파괴되는 것을 전조증상으로 과정에 반드시 투입시키고야 만다. 고통, 시련, 시행착오, 실수, 과오, 오류. 포기나 기타의 유혹, 이런 것들이겠지. 따라서, 일은 일이 가는 길목에서 반드시 나를 파괴하고야 만다. 


이 때의 파괴는 긍정을 위한, 긍정을 전제한 파괴이니 달갑고 감사하게 나는 이 모든 부정을 받아내야만 한다. 이 모든 부정의 과정을 지나가야만 한다. 거쳐야만 하고 견뎌야만 하고 피해서는 안된다. 이 말도 안되게 치열하고 지루하고 어렵고 난해한 과정 모두는 결과(일, 창조)를 위한 전조다. 따라서, 파괴되는 아픔이 지나갈수록 결과는 내 앞으로 다가오고 있음을 의미하며 더 지독하게, 더더더더 견뎌내는 소수에게 '결과'는 '성취'라는 이름으로 보상된다. 


이 때, 잠시 뒤를 돌아보면 우리는 금새 알게 된다. 아! 그 때 그 일이 어떻게 그렇게 됐지? 아! 내가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결과야!, 아! 진짜 이건 말도 안되는 기적이야! 라고.


이렇게 '원하는 결과로서의 일'은 긍정의 파괴외에 반드시 또 하나를 과정에 개입시키는데

그것이 바로  

신의 기적적 개입이다. 운이라고도, 기적이라고도 불리는 신의 개입! 

전혀 예측할 수 없고, 이해할 수 없는 어떤 순간에

가능할 것 같지 않은 놀랍도록 수많은 조합이 복잡하게 연결되어

인간의 지성과 능력을 너머 무엇의 결부와 결합으로 생긴 것인지 도통 알 수 없는 현상. 

일=결과=창조는 긍정의 파괴와 신의 기적적 개입이라는 전조를 전제한다. 


창조(=일=결과)를 위한 2가지 전조.

고통으로 대변되는 시련, 시행착오 등과 같은 파괴와

신의 기적적인 개입! 

일이 가는 길에 결코 가운데 하나만 거쳐가는 경우는 없다. 

모든 현상에는 이면이 존재하니 말이다. 

또한, 신의 기적적 개입은 첫번째 전조인 파괴를 경험하는 자에게만 주어진다는 사실도 간과해선 안된다!


일은 일이 가는 길이 있으니 나는 그 일에 적합한 내가 되면 된다.는 이 단순한 진리에서 '적합한'이라는 단어에 주목해야 한다. '적합한'은 결국 긍정의 파괴를 겪은 자여야 당당히 받을 수 있는 단어다. 긍정의 파괴란 1시간 앉아있을 것을 5분 더 앉아있겠다는 신체와 정신의 의지, 그리고 그것을 이끄는 의도까지, 다시 말해 신체와 정신과 영혼의 결합을 이루며 기존의 나를 파괴하는 것이다. 살이 찌면 기존의 살이 터진다. 이 현상과 같다. 기존의 내가 커지기 위해 나는 파괴되며 터진다. 이 때 신체에 살이 터져 하얀색 줄이 생기듯 정신과 영혼도 터지며 미적분화된다. 화학변화는 이 때 동반된다. 그렇게 정신에도 깊은 주름이 생기는 것이다. 물리적으로 5분 더 앉아있는 변화 이면에는 기가막힌 미세한 화학변화가 동반되고 그 흔적이 남는다.   


일은 일이 가는 길이 있고

나는 일에 적합한 자격을 갖추면 된다.

그 자격조건은 파괴되어 내가 커지는 것이다.


이 말의 깊은 뜻을 조금이라도 아는 지금, 나는 '내가 원하는 결과로서의 일'이 어찌 성취되는지를 이제 알겠다. 그저 나는 오늘도 해야할 것을 하면 된다. 해야할 것이 기존의 날 파괴시킬 것이니까. 이 얼마나 단순한가. 바보는 단순한 것을 복잡하게 풀고 천재는 복잡한 것을 단순하게 푼다는데 복잡한 과정을 통해 단순해졌으니 나는 어제보다 조금 더 바보로부터 멀어지나보다. 


모든 일이 어떻게 끝날 것이며 어떤 뜻을 가지고 있는지에 대해서 겸허한 마음으로 인식한 사람, 

여유있게 사는 시민 하나하나가 그들의 조그마한 정원을 손질하여 낙원으로 꾸밀 줄 알고 

불행한 사람마저 그 무거운 짐을 지고 허덕거리면서도 끈기있게 스스로의 길을 걸어가고 있으며, 

모든 사람들이 똑같이 이 햇빛을 다만 1분간이라도 더 오래 쳐다보고 싶어한다는 사실을 알아차린 사람은 - 그렇지, 그런 사람은 말없이 자기 자신 속에서 스스로의 세계를 창조하는 것이다(주). 


주>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 괴테, 1999, 민음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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