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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담 May 04. 2024

중심을 잡고 흐름에 따른다.

이기론(利己論) - Ch3.  해체, 그리고 脈!

지금 이 글은 [이기론]의 CH1. 나는 나를 해체하기 / CH2. 나를 해체해보니에 이어진 CH3. '해체, 그리고 脈!'입니다. 따라서, 지난 글들을 먼저 읽어보시기를 권해드립니다.


나를 해체하고 나를 다시 발견하는 과정을 글로 정리하면서 나의 삶의 원리는 아래와 같이 15가지로 정리(아래 사진참고) 되었다고 언급했었다. 이 중 오늘은 중심을 잡고 흐름대로 따른다에 대한 '내 삶의 중심'을 적어보려 한다.


나의 가장 큰 장점이라면 참으로 말을 잘 듣는다는 것이다. 나는 내 말도 참 잘 듣는다. 뱉은 말은 거의 지킨다. '밥 한번 먹자'라는 말도 쉽게 하지 않으니 어쩌면 지킬 말만 뱉는지도. 아무튼 나는 바보처럼 말을 잘 믿고 잘 듣고 잘 따라한다. 그러다가 바보가 된 경우도 여럿인데 바보니까 바보가 된 것이니 이상할 것도 없다.


맹목적으로 순종하는 것 참 잘한다. 물론, 아무 말이나, 누구 말이나 듣는 천치는 아니다. 그저 들을만하다 싶어 듣겠다 했으면 무조건 이유불문하고 토도 달지 않고 잘 따른다. 그런데 바보처럼 순종을 잘하는, 미련하다시피 그냥 묵묵히 하고 있는 나의 성향 덕에 나는 나를 조금 더 사랑하게 되었다고 감히 말할 수 있겠다. 또한, 이렇게 말을 잘 듣는, 게다가 무조건적인 순종을 나 스스로에게 명한 것은 원리, 중심에 한해 맹목적인 것이며 그렇게 따라보니 삶이 유리해졌고 유리해지는만큼 더 순종적으로 따르게 되어 '합리가 아닌 비합리를 규명하는 지혜'에, 그리고 '논리적으로 깊고 선명하게 생각하는 힘의 어리석음'을 깨닫게 해주었다고 감히 말할 수 있다.

결론적으로 말해

변하지 않는 것이 중심이다.

변하지 않는 것은 원리,

변하는 것은 원칙.

따라서,

변하지 않는 것을 중심에 두고

나머지는 흐름에 따른다.

이불변응만변(以不變應萬變-)인 것이다.)


변하지 않는 원리, 내 삶의 중심이 되고 그 중심에 따라 나머지는 그냥 흘러가게, 일어나게, 벌어지게 냅두며 산다. 이를 하나씩 거론하자면,


첫째 중심은 양극의 원리다.

모든 것에는 이면이 있다. 현상에는 본질이 있고 결과에는 원인이 있고 보상에는 대가가 따르고 성공에는 실패가 필요하며 산출의 이면엔 투입이 있다. 이 가운데 내게 보이는 것들은 결과, 보상, 성공, 산출과 같은 것들일텐데 어리석다면 보이는 것으로 판단을 하겠지만 탈(脫)이분법적인 사고를 아는 지금 보이는 이면의 보이지 않는 것 또는 이미 지나가버린 것, 즉 본질, 원인, 대가, 실패, 투입을 염두에 두고 주어진 '보이는 현상'들은 그대로 흘러가게 내버려둔다는 의미다.


이러한 맥락에서 둘째 중심은 인과의 원리다. 

방금전 말했듯이 보이는 모든 것은 보이지 않는 것의 결과다. 즉, 내가 하는 행동 모두는 보이지 않는 나의 내면의 표현인 것이다. 내가 손에 쥔 결과는 내가 투입한 양에 있다. 여기서 '양'이란 자원의 총칭을 대변하는 말이다. 정성일수도, 자세일수도, 시간일수도, 돈일수도, 능력일수도 있다. 뭐든 내가 투입한 양만큼 손에 쥐게 된다. 손에 쥔 것이 좋다면 투입이 좋았기 때문이며 그렇지 않다면 투입도 그렇지 않았던 것이다. 비범한 결과를 바란다면 비범한 양만큼 투입되어야 하고 큰 것을 바란다면 크게 쌓일만큼의 양이, 강한 것을 원하면 약한 것이 강해질 때까지 투입이 되어야 한다. 따라서 지금 내게 일어나는 현상이 나약하고 적거나 작고 보잘 것 없는 결과라면 원인에서 해답을 찾아야지, 결과를 주무르며 미주알고주알하지 않겠다는 것이다. 결과는 그대로 흐름대로 따르되 중심은 원인을 바꾸는 것에 있다.


이렇게 원인이 되는 것을 다시 변화시키기 위해선 기준이 필요하기에 셋째 중심은 기준의 원리다.

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기준 아래로는 내려가지 않는 것이 중심이다. 무슨 일을 하든 그것의 기준부터 잡고 그 위를 바라본다. 그러면 수준이 높아진다. 쉬운 예로 나의 경우, 2년여전에 글에 목표가 생겼다. 그래서 기준을 '매일 쓴다.'로 잡았다. 그런데 '매일 쓴다'로 기준을 잡으니 한줄을 쓰든 한장을 쓰든 들쑥날쑥이었다.  글의 양이 쌓이는 속도도 느리고 아울러 글수준도 느려터지게 오르는 것이다. 우연히 브런치작가가 된 그날부로 나는 기준을 매일 새벽 5시 발행으로 확 높여버렸다. 그 기준 아래로는 내려가지 않으려 애쓰는 동안 나의 글실력은 조금씩 오를 것이라 확신했기 때문이다.


넷째 중심은 힘의 원리다.

모든 창조와 창조로 이어지는 진화는 힘과 비례한다. 강력한 내면의 욕구는 창조로 이어지고 창조된 그것이 강력하면 할수록 진화의 속도나 영역은 가속도가 붙는다. 결국, 힘이 강한 곳, 파장이 큰 곳, 확장성이 있는 곳, 지속적으로 유지가 가능한 곳으로 사물과 사태는 움직인다. 없는 힘은 표현할 수가 없다. 힘은 내면에서 길러지고 외부로 표출된다. 창조되는 모든 것은 사고의 힘에 좌우된다. 행동 전에 존재하지 않으면 안된다. '존재'의 힘, 강도에 따라 '행동'할 있으니 결국, 존재와 행동의 양은 비례한다.  따라서, 나의 중심은 탓, 체하지 않고 나의 힘(정성, 노력, 깊이, 능력 등)을 키우는 것이 중심이지 나의 외부의 것을 바꾸는 것이 중심이 아니다. 나의 힘이 약해서 벌어진 현상이라 해석하고 나에게만 나를 집중시키는 것이다.


따라서, 힘을 키우기 위해 지켜야 할 것, 다섯째 중심은 행동의 원리다. 

현재, 오늘, 지금의 중요성과도 일맥상통하다고 하겠다. 지금까지 언급했던 내용에 따라 보이지 않는 것, 결과보다는 원인, 수준보다는 기준, 표현보다는 힘이 중심이 되며 이를 위해 나는 오늘하루 우선적으로 해야할 양을 채우는 것이 그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것을 인지했다. 하고하고 또 하고, 될때까지 하고, 즉시 하고, 미루지 않고 해내는 양이 쌓여야만 나는 변화되고 그 변화가 나의 삶을 바꿀 수 있는 것이다. 그러니 나의 중심은 항상 '했느냐, 안했느냐'에 있다.


이렇게 중요한 원리는 '해야할 것 먼저, 하고 싶은 것 나중'이며 '양이 쌓여야 질적인 화학변화'가 일어난다 이기에 여섯째 중심은 양의 원리다.

모든 시작은 양을 채우면서부터다. 구구단을 배우는 것이나 자전거를 타는 것과 같다. 틀려도 외웠고 넘어져도 다시 탔다. 틀리는 양, 넘어지는 양, 틀린 것을 맞춰간 양, 넘어졌다가 일어나는 양이 쌓여야 틀리지 않고 넘어지지 않고 말 그대로 '잘' 외우고 '잘'타는 순서에 이른다. 즉, 양이 없으면 '잘' 할 수 없다. 양을 쌓지 않고서는 질적인 차원을 논할 수 없다. 100도까지 열의 양이 쌓여야 물이 수증기로 변하고, 번데기로 보내야 하는 시간의 양이 쌓여야 나비가 되고 물속의 올챙이가 일정 기간 아가미로 호흡해야만 개구리가 되어 물밖으로 나온다. 액체가 기체가 되고 고치에 날개가 돋고 물속에 살던 녀석이 물밖으로 나오는, 양은 질적인 화학변화를 일으킨다. 어떤 일을 하든 양을 쌓는 것이 중심에 잡혀 흔들리지 않아야만 내가 원하는 '변화된 나', '보이지 않지만 원하는 미래' 즉, 지금과 다른 차원의 삶을 만들어낼 수 있는 것이다. 이를 위해 양이 중심이지 잘했니 못했니, 좋으니 안좋으니 하는 것은 주어진대로 따른다.


일곱번째 중심은 '나'이다.

앞서 언급했듯이 체, 탓, 척하는 비겁한 자가 되는 것은 싫다. 따라서 통제할 수 있는 대상인 나에게만 중심을 둔다. 환경이 어쩌구, 시대가, 부모가, 남들이, 자본이 어쩌구저쩌구 거론할 필요가 없다. 어떤 환경에서든 '나'를 변화시키면 주변이 바뀌니까. 나는 모든 것과 연결되어 있으니까 말이다. 따라서, 이불변(以不變)이어야 하는 것은 나밖에 없다. 어떤 현상이든 나는 나에게서 원인을 찾고 나로부터 변화를 시작하는 것이 중심이다.


이런 이유로 여덟번째 중심은 '감각이다.

나의 모든 결과는 나의 행동이 원인이다. 더 풀어보자면, 나의 신체는 행동을 관장하며 행동은 정신으로부터 명령을 받고 정신은 감정의 자극으로 이어지며 감정은 어떤 느낌에 의해 내게로 온다. 따라서 나를 변화시키고 지금보다 나은 삶으로의 질적변화를 원한다면 나의 행동의 가장 근원적인 자극이 되는 감각, 즉 어떤 느낌을 따르는 것이 우선되어야만 한다. 따라서, 나는 제 아무리 머리가 '이건 아닌데...', '이래도 될까...', 또는 나의 감정이 '하기 싫은데..', '좋아하지 않는데...', 강하게 날 자극하더라도 '느낌(feeling)을 더 중심에 두고 머리와 감정 차단한 상태에서 곧바로 행동만 반복한다. 이유는 나를 구성하는 정신, 신체, 영혼가운데 정신과 신체는 내 안에 머물지만 나의 밖에서 나에게 끊임없이 신호를 전해주는 구성요소는 영혼인 것이다. 영혼의 신호가 바로 '느낌'이다. 무조건 큰 것에 작은 것이 담긴다.


그런데 희한하게도 작은 인간인 나의 내면엔 무한한 잠재력이 있다고 하니, 작은 나 안에 큰 나가 들어 있다는 의미가 된다. 큰 나에게 현시점에서 나를 구성하는 정신과 신체가 자극을 줘봤자 자꾸 내 머리속에서만 판단하려 드는데 온 우주를 돌다오며 내게 주는 신호는 머리나 가슴이 아니라 모든 감각을 통해서 어떤 느낌으로 전해지는 것이다. 이것을 내면의 큰 내가 알아차린 그 느낌! 그것이 감각이기에 나는 감각이 더 우선되고 중심이 되며 이에 따른 현상은 그냥 수용한다.         

내 이름의 의미를 들은 지인이 펜에 직접 새겨 선물해준 펜

2014년. 나는 이름을 바꿨다. 중심을 잡고 흐름에 따른다는 명제대로 바꿨다. 닉네임으로 사용하려 한 것이 아니라 호적까지 바꿨다.  


심지 주(注) / 강물 원(沅).

내 이름은 김주원이다.

중심을 잡고 흐름대로 살겠다. 는 나의 다짐이 담긴, 내가 지은 이름이다.      


이러한 중심을 가진 것에 나는 아주 감사하고 있다.

이러한 믿음과 감사가 없었다면 나는

늘 나 스스로 판단하려 애쓰고,

없는 의지를 끌어내려 용쓰고,

다가가지 못할 신기루를 바라며 떼쓰고

그리 살았을지 모른다.

이제 그런 것이 거의 없다.

그저 흐름대로..

나는 본성에, 원리에, 대자연의 대법에 순종한다.     


주> 이불변응만변 - 변하지 않는 것으로 만가지 변화에 대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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