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지담 May 25. 2024

결과를 정하고 과정으로 입증한다

이기론(利己論) - Ch3.  해체, 그리고 脈!

결과를 정하고 과정으로 입증한다.


나를 해체한 후 중심이 되는 명제 가운데 오늘은 다들 뻔히 아는 명제이지만 나의 사고체계에 재정리를 시킨 '결과를 정하고 과정으로 입증한다'로 썰을 풀어보고자 한다. 


논리를 펴기 전에 '우리 인간의 본성은 추구'에 있다는 진리를 먼저 전제한다.

추구, 즉 욕구(求)한다. 

욕구하지 않으면 진화하지 못하기에 욕구는 인간의 본성이다.

이 본성(性)은 본유(有)된 본양(樣)과 본질(質)을 지닌 자체로서 바라는 바를 향한 과정이기에 욕구는 당연한 이치에 의한 진행이다.  


욕구하는 동물로서의 인간이기에 인간에게는 매순간의 성장이 어쩌면 의무이자 권리이다. 성장이 성취한 느낌, 성취감을 경험케 하고 이 성취감은 욕구를 향해 더 큰 성취를 위해 진화한다. 

이 결말이 결과이다. 

즉, 결과 = '욕구하는 바'다.

내가 원하는 바는 무엇인가?

나의 욕구는 무엇인가?

같은 질문이지만 이에 대한 답을 정하는 것이 우선되어야 한다. 


왜? 가다보면 어찌 되겠지 해서 되는 일보다는 정해놓고 그 길을 찾아, 따라, 만들어 가는 길이 내 인생을 더 효율적이고 진보적이면서 더 커다란 성취감을 맞보게 하며 이 성취감이 결국 '나의 본성'대로 가는 길임을 증명해내는 삶에 가까워지기 때문이다. 가다보면 어찌 되겠지 하다가 '이 산이 아닌가보다', '내 길이 아니었나보다' 싶은 경험을 아마 상당히 가지고 있을 것이다. 내 경험이 '남의 삶을 대신 살아준' 경험으로 쌓이길 바라지 않는다면 '원하는 바', 즉 욕구를, 결과를 정하고 가는 것이 훨씬 스스로에게, 나아가 세상에 이롭다는 사실만큼은 명제로서 받아들여야 한다.


또한 결과로 과정을 입증한다.는 명제는 괴테가 말한 '이해한만큼 소유한다'와도 결을 같이 한다. 이해(理解)한다는 것은 다스려(理) 풀어냈다(解)는 것이다. 이미 머리 속에서 논리적으로 해답을 지니고 있다는 말이다. 그러니 이해, 즉 논리로서 풀어낸 해답을 정한 후 행하면 내 몸에, 내 인생에 체화된다. 체화는 곧 소유를 의미한다. 그러니 행하는 모든 과정은 입증하는 절차이다. 


자, 나의 삶을, 나의 목적을, 목적을 위한 목표를, 목표의 결과를 나는 지니고 있는가?

그렇게 '원하는 바'가 있는가?

원하는 삶은 있는데 해내야 하는 목표가 없다면 이 무슨 기괴한 모순이란 말인가?

원하는 삶이 있다면 해내야 하는 목표도, 목표에 따른 과정도, 과정에서의 의무도 함께 동반하는 것이 당연하 이치가 아닌가?

누구의 소유물이 되기에는,

누구의 제2인자가 되기에는,

또 세계의 어느 왕국의 쓸만한 하인이나 도구가 되기에는

나는 너무나도 고귀하게 태어났다(주).


고귀하게 태어났으니 고귀하게 쓰이기 위해서라도 우리는 내가 '욕구하는 바'를 결정하고 하루를, 시간을 소모해야 한다. 이 때 지나보내야 하는, 지나가는 하루의 시간은 소모가 아니라 투자가 되는 것이며 이 모든 시간, 하루를 '과정'이라 이름붙여 보자.


나의 하루가 나를 통과한 후 과거의 무엇으로 남길 바라는가?

그렇게 지나간 하루들, 즉 과거가 쌓여 미래에 어떤 결과로 드러나게 된다. 다시 말해, 지나갔는데 다시 내 앞에 어떤 정체로 드러난다는 의미가 된다. 과정은 반드시 결과로서 드러나게 된다. 과정은 과거이며 결과는 미래인데 지나보낸 것이 내 앞에 원하는 결과로서 등장하는, 참으로 기묘한 연결이다.


켜켜히 쌓인 축적이 응축으로, 압축으로 그렇게 스스로의 화학변화를 거쳐 미래의 어떤 예상하지 못한, 이해하기 어려운 어떤 시점, 즉 전혀 다른 시간에 전혀 다른 차원의 모습으로 그 변화된 모습을 드러낸다. 결과는 과정의 축적과 응축, 압축의 폭발인 것이다.


여기서 잠깐, 욕구와 욕망, 욕심, 탐욕을 구분할 필요를 제기한다. 

욕구(求)와 욕망(欲望)은 크게 다르지 않다. 구하고 / 바라고. 큰 차이는 없다. 하지만. 이 차이를 아는 것과 모르는 것은 엄청나게 다른 관점으로 나를 들여다볼 수 있는데 욕구, 즉 구하는 것과 욕망, 즉 바라는 바는 나를 수동체로 보느냐 능동체로 보느냐의 차이라고 할 수 있다. 주체이자 능동체인 나로서 나를 보느냐 객체이자 수동체인 나로서 나를 보느냐의 차이다.


구한다는 것은 원하는 것을 찾는다는 의미를 지니고 

바란다는 것은 원하는 것을 찾으려는 마음이다. 

찾는다는 것은 그것을 지닌 누군가에게 달라고 애걸할 수도, 응당한 대가를 지불할 각오도 되어 있음을 의미하며 바란다는 것은 마음이 그렇다는 것이다. 


따라서, 구하는 것은 나를 수동적으로 순응케하는, 가장 본성적인 순수함을 지닌 나로서 나를 바라보는 관점이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인간은 욕구의 동물이라 하지 욕망의 동물이라 하지 않는다. 욕망은 사전적으로도 탐욕을 바라는 마음이라 정의되어 있는데 아마도 망(望), 즉 '바란다'는 의미에서 순수성이 배제된 탐욕이 내재되어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욕구, 욕망하는 마음을 욕심이라 규정하고 아무 대가도 치르지 않고 가지려는 도둑질 심보를 그저 탐욕이라 규정할 때


인간의 본성이 욕구하는 것이며

욕구는 바라는 결과이며

결과는 과정의 축적으로 올 미래라는 단순한 논리, 진리 안에 엄청난 마음가짐이 내포되어야만 진정 '욕구'가 현실이 됨을 인정할 수 있을 것이다.


자, 내가 원하는 바, 즉 욕구가 내 마음을 진동시킨다. 

마음이 진동으로 파장을 일으키면 모든 정신은 그 에너지를 현실로 만들기 위해 분주해진다. 과거기억부터 남의 기억까지, 세상의 모든 정보를 통털어서라도 그 파동의 진폭만큼 일사분란하게 움직여댄다. 정신이 그리 움직여주면 팔다리도 가만히 있지 못하고 여기저기로 이리저리로 행동을 강요한다. 자, 원하는 것을 위해 내 정신이 내 팔다리에 명령하는 것이다. 즉, 의무로서 나는 내게 명령한다. 욕구하는 순간 의무가 따라붙는다. 그 과정의 현상은 내 온 몸이 무언가를 쫓는 것으로 드러난다. 이 모든 움직임의 시작은 그러니까 '욕구'로부터다. 간절하면 간절할수록 파동의 진폭은 더 크고 길게 파장을 몰고 와 결국에 미래에 벌어질 '결과'를 내 앞으로 당겨온다. 


결과적으로, 

욕구의 현실화(결과)는 

'의무의 이행정도(과정)'이다.


그런데 결과를 미리 정하고서 움직이지 않으면 앞서 말한 진폭단계에서 가슴의 진동이 정신으로, 팔다리로 움직일 때 우왕좌왕, 좌충우돌대다 결국 예상치 못한 이상한 결과를 떠안게 될 지도 모를 일이다. 

확률적으로 결과를 정하고 가는 길과 그렇지 않은 길을 갈 때 '결과'를 도출하기 위해 과연 어느 쪽의 확률이 높겠는가? 단순한 산술계산만으로도 너무 뻔한 답이 나온다. 


높은 확률로서 얻은 '결과'외에도

결과를 정하고 움직여서 과정으로 그 결과를 입증하면 결과외의 큰 선물을 너무나 많이 얻게 된다.


첫번째 선물은 '과정'에 진입하는 신의 기적적 개입이다. 운이나 기적과 같은 '나'라는 인간의 범주가 아닌 세상이 어떤 식으로든 만들어놓은 연결고리의 한 가닥이 자석처럼 내게 포착되거나 달라붙는 것이다. 이렇게 볼 때 주구장창 내가 글에서 주장했던 기준의 중요성을 확고하게 정립할 수 있을 듯하여 다시 한번 거론한다면, 


우왕좌왕하는 과정을 거치는 당연한 시기에도

높고 단호한 기준을 잡은 자는 기본에 충실한 기준을 중심으로 움직이다. 반면

높지도 단호하지도 않은 모호한 기준을 지닌 자는 기본도 없는 바닥에서 기어다닐 수 있다.

단호한 기준을 지닌 자는

기준을 중심으로 기본에 충실하여 기대를 가져오며 이는 신의 개입으로 기세를 몰고와 기적을 일으키지만

기준이 없거나 너무 낮은 자는

기본의 부실함으로 기분에 좌우되며 기교를 부리다 결국 기대만 잔뜩 부풀린 채 기억에서 지워버리고픈 결과를 만들어낸다.


결과를 정하고 과정으로 입증한다. 는 명제를 내가 삶의 명제로서 정신에 뿌리박고는 어떤 목표를 세우더라도 구체적으로 정하고서 행동을 반복하는 지겨움과 지루함과 치열함, 이어진 진부함까지 반복반복반복하는 이유는 기본, 기준, 기세, 기적의 인과와 연계, 조화를 확신하기 때문이다.

논리로서 이해되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연합을 삶에서 실천하여 얻은 '뜻밖의 결과'는 '추구하는 동물'로서의 인간본성에 의해 더 큰 결과로 이어진다. 즉, 

지금의 결과는 다음 결과를 위한 

'작용원인'이 되어 

더 큰 결과로 나를 진입시킨다. 

더 큰 결과는 더 높은 기준, 더 단단한 기본, 더 거센 기세, 더 말도 안되는 기적의 연합에 의해 탄생될 것이다.

이 모든 것은 순수한 마음으로 순응하고자 하는 나를 더 순수하게, 더 세상의 이치에 따르는, 더 세상의 조화에 어울리는 이로운 사람이 되는 수순대로 진행되는 것이다. 

즉, 더 큰 내가 되는 것이다. 이것이 두번째 큰 선물이다. 


결국, 결과를 정하고 과정으로 입증한다.는 명제 하나가 

더 큰 나로서 내가 원하는 결과보다 더 거대한 결과를 이뤄낼 수 있는 '위대한 나'. 

'잠재된 무한함을 드러낸 나'를 증명하게 한다. 

진짜 추구하는 인간으로서 진화해나갈 수 있도록 이끄는 것이다. 

전쟁터로 출전하는 아들 키루스에게 그의 아버지는 이렇게 말해준다. 


말타기를 배우지 못한 사람은 신에게 기병전에서 승리하도록 해달라고 요청할 권리가 없고, 

활쏘기를 어떻게 하는지 모르는 사람은 그것을 아는 사람보다 궁수로서 그를 능가할 수 있는 권리가 없으며, 배를 항해할 줄 모르는 사람은 배가 나아갈 방향을 찾아서 배를 구할 수 있도록 기도할 권리가 없다.(주2)'


키루스는 깊이 생각하며 전쟁터에서도 주의깊지 않은 사람은 자신을 보존케 해달라고 기도할 수 없음을 깨닫는다. 전쟁터에 나갈 때도 이겼음을 증명하러 나가는 것이다. '의무의 이행정도'가 과정에서 충실히 쌓였다면 정해진 결과를 증명하기 위해 행하는 것이지, 결과를 만들기 위해 행하는 것이 아니다. 


누군가가 말했듯 삶이 전쟁이라면 나는 전쟁에서 이겼음을 증명하기 위해 오늘 하루를 보내는 것인가, 

아니면 이기고 싶어 오늘 하루를 보내고 있는 것인가.  

결과를 정하고 사는 삶, 가는 길, 하는 일은 

정해놓지 않거나 막연한 결과로 가는 길과

분명 서로 다른 방향으로 내 인생을 이끌 것이다.


단, 함정에 조심해야 한다. 

결과에만 미학적인 추파를 보내는(주3), 뭔가 예견한듯한 착각에 빠지는, 난쟁이가 갑자기 거인이 되려 뛰어가는 그런 짓을 해서는 안된다. 


'과정'에서의 행동이 미분되어 위대한 것을 결코 위대하게 드러내지 않는 섬세함. 그것은 자기행동의 근저에 정의와 보편과 독창성이 골고루 배합되었을 때 탄생한 위대한 결과여야 한다. 그럴 때 세상은 그 결과를 인정하고 지속, 유지, 영원성을 부여할 것이다. 


주1> 세익스피어 존왕(시민불복종, 헨리데이빗소로우, 은행나무에서 재인용)

주2> 키루스의 교육, 크세노폰, 한길사

주3> 키에르케고르선집, 키에르케고르, 집문당


[건율원 ] 

삶의 가치실현을 위한 어른의 학교, 앎을 삶으로 연결짓는 학교, 나로써, 나답게, 내가 되는 학교

(*'가입'하신 분께는 2만원쿠폰 & 무료 강의에 우선적으로 초대해 드립니다.)

https://guhnyulwon.liveklass.com

[지담북살롱]

책, 글, 코칭으로 함께 하는 놀이터,

삶과 사유, 사람의 찐한 이야기가 있는 공간으로 당신을 초대합니다.

https://cafe.naver.com/joowonw

[지담 연재]

월 5:00a.m. [지담단상-깊게 보니 보이고 오래 보니 알게 된 것]

화/수/일 5:00a.m. [삶, 사유, 새벽, 그리고 독서]

목 5:00a.m. ['부모정신'이 곧 '시대정신']

금 5:00a.m. [나는 나부터 키웁니다!]

토 5:00a.m. [이기론 - 어떻게 살아야 할까.]


이전 29화 일은 일이 가는 길이 있다 나는 자격을 갖추는 걸로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