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ncore '엄마의 유산' - 8번째 편지
곧 출간을 앞두고 있는 '엄마의 유산'은 2023년 15편의 초고에 이어 2024년 30편의 편지로 다시 쓰여졌습니다.
브런치 독자들에 의해 다시 재탄생한 'Encore 엄마의 유산'은 감사의 의미로 매주 목요일 5:00 a.m. 1통의 편지씩 발행하고 있습니다.
또한, 엄마의 유산 북디자인은 호주에 거주하는 인기 브런치작가이자 아티스트 근아작가님의 작품입니다. 표지에 담긴 깊은 의미와 글 사이사이 삽입되는 일러스트도 앞으로 공개될 예정입니다. 근아작가의 '엄마의 유산'은 매주 일요일 발행됩니다!
세상에는 '성공'에 대한 수많은 경구와 명언들이 있어.
그런데 이 것들에 담긴 함정과 함수를 읽어내지 못하면 오히려 성공이 네게서 등을 돌릴 지 모르니
몇가지만 본질적으로 들여다보도록 하자.
엄마는 너의 인생이 성공으로 달리길 가장 바라는 1인이니까!
엄마의 말에 궤변처럼 들릴 지도 모르겠다마는...
진정한 성공이 무엇인지 오늘은 아주 쉽고 단순하게 말해주고 싶어.
우선 성공을 규정한 몇가지 명제에 대한 엄마의 궤변같은 생각을 얘기해볼께.
'실패를 두려워하지 말라'는 말을 귀가 따갑도록 들었을거야. 하지만 이 말에는 묘한 함정이 있단다. 실패는 두려운 것이야. 두려워하지 않을 수가 없어.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을 정도의 멘탈을 가진 사람은 그리 흔하지 않아. 두려움은 피할 수 없어. 그냥 안고 가는거야. 그게 용기지. 그러니까 '실패를 두려워하지 말라'는 말에는 '도전을 두려워하지 마라 안하던, 못하던, 해내야 하는 그런 도전에는 반드시 실패가 있을 수 있다'는 의미지.
도전은 안 해본 것이라 낯설어. 안하던 것을 하면서 실패 안하기가 쉬울까? 어쩌면 도전을 하면서 실패하지 않으려는 마음은 오만일 수 있잖아. 아니면 어설픈 도전이거나.
그러니, 낯선 그 것을 그냥 하면 돼.
그냥 하면 되는 것은 그냥 하는 거야.
도전에는 감정이 필요없어.
그냥 하는 거니까.
도전과 함께 부록처럼 오는 실패는 충분히 두려워해도 돼.
하지만 도전도 안하면서 실패가 두려운 이유는 네 기억 때문이야. 모든 감정은 반복될수록 스스로 커져서 네 속을 꽉 채운단다. 그래서 지레 겁먹는다는 말이 나온 거지. 두려움도 그래. 하지만, 두려움도 쓸모 있어. 두려움이 극도로 커질 때, 그래서 너무너무 실패를 겪고 싶지 않을 때 그때 기다리던 성공이 와.
도전-실패-재도전-또 실패-그러다가 성공.
그래서 결국엔 모든 과정을 딛고 성공!!
그런데... 그런데 말이야.
도전하지 않는 것!
도전무-실패무-결국 결과는 0!
아무 것도 안하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아.
뭐, 이런 삶이 아무 일도 안 일어나서 무난하게 보이기도 하겠지만 길게보면
인생자체를 실패로 만들겠다는 위험할 정도로 야심찬 계획인거지.
그리고, 성공하면 두려움이 끝날까? 성공해도 두려워. 계속 지키고 싶은 욕구가 생기니까. 즉, 두려움은 늘 네 안에 있는 감정이니 '두려움'이 도전하고 안하고의 기준이 되면 안 된단다. 네 안에 있는 욕구가 세상으로 나오고 싶어 안달난 신호가 '두렵지만 도전해볼까?'라는 느낌이지.
그러니 너의 '도전'은 널 통해 세상이 뭔가를 하겠다는 신호인 것이야.
뭐와 함께?
두려움 손잡고!
왜?
용기는 항상 두려움의 손을 잡고 등장하거든.
그러니 두려움없이는 갈 수 없어.
성공은 네가 원하는 때에 네가 오게 하는 것이 아니라
성공 자체가 '이제 너에게 가도 되겠다'고 판단한 그 때에 너에게로 간단다.
그러니 실패가 두려우면 두려워하고!
그 두려움을 잘 이용해 봐.
극도로 두려워도 돼.
두려움의 크기만큼 용기도 커지고
성공도 덩달아 커지니까.
도전은 감정이 필요없으니
그냥 하고
그 뒤에 찾아오는 실패도 그냥 당하고.
그렇게 실패가 너무너무 싫어질 때 성공은 알아서 네게 등장할거야.
가능성 앞에서도 한발짝도 물러서지 않는 정신앞에 신이 도우려 서 있대[1].
'실패는 성공의 어머니'라는 말도 많이 들어봤지? 이 말은 진리야. 실패없는 성공은 드무니까. 하지만 이 말에도 역시 함정이 있단다. 내가 너희들의 엄마인데 '엄마'라는 존재는 궁극적으로 자신보다 자식이 더 잘난 사람으로 잘 살아가길 본능적으로 바래. 실패가 엄마이고 성공이 자식이면 분명 성공은 실패보다 커질 수 있어.
하지만 어떤 엄마는 자식을 망치기도 하잖니.
엄마의 그릇된 지식과 인품이 자식의 인생을 오히려 망가뜨리지.
그런데 엄마없이 자식이 태어날 수 있을까? 흔하지는 않지만 실패없는 성공도 있어. 그러니 실패와 성공을 부모자녀관계로 보지 말고 그저 인과관계로 보면 좋겠다. 어떠한 현상을 접할 때 네 사고 속에 그것을 풀어내는 명제가 어떻게 규정되어 체계로 연결되어 있는지는 너무 중요해. 현상을 바라보고 해석하는 틀이 되거든. 그러니 실패와 성공을 부모자녀관계가 아닌, 인과관계로 사고의 틀을 재정비하면 아마도 너의 실패가 다른 관점으로 보일거야.
그렇다면,
동쪽에서 씨를 뿌렸는데 서쪽에서 싹이 틀 수도 있어. 전체적인 시각에서 보면 실패없는 성공은 없지만 부분적인 시각에서, 그러니까 지금 이룬 '실패없는 성공'은 이미 쌓아온, 너도 감지못한 채 지나간 수많은 선취경험에서의 실패들이 모여 지금 성공의 열매로 맺어진 것이라 할 수 있지. 그래서, 어떤 이가 별로 실패하지 않고 뭔가를 이루는 것처럼 보일 때, 부러워하거나 질투하지 말고 그 사람이 보이지 않는 곳에서 일궈왔던 노력과 작은 성공, 작은 실패들이 반드시 있다는 것을 명심하렴.
여기서 우리는 커다란 진리를 알게 되지.
뿌린대로 거둔다.
모든 것에는 이유가 있다.
그리고,
모든 것은 모든 것과 연결되어 있다.
전체는 부분의 합이 아니다...
지금 네게 좌절감을 맛보게 했던 그 모든 실패들이 더 큰 성공을 위한 영양분이 되어줄거야.
또한, 대개 원인이 있어야 결과가 오지만 결과가 먼저 온 후 이유가 찾아지는 경우도 있단다. 그러니 '실패'에 초점맞추지 말고 '성공'에 초점맞춰야 해. 네가 관심두는 것, 초점맞추는 그것이 무엇이든 너의 에너지를 먹이삼아 자라. 실패에 초점맞추면 실패가, 성공에 초점맞추면 성공이 커지지. 물론 실패+성공=결과이니 실패에 초점맞춰 실패의 결과를 가져가든 성공에 초점맞춰 성공의 결과를 가져가든 어차피 어떤 결과든 얻게 되어 있어.
미래를 보든 과거를 보든 모두 인생이지만
어디에 초점맞추는지는 선택이야.
초점맞춰진 그 곳이 더 단단하게 자라지.
따라서, 실패를 거울삼는 것은 제대로 해야 한다. 이번의 실패가 진짜 나의 성공을 위한 양분인지 해석할 수 있어야 할 것이야. 양분이라는 판단이 들면 그것의 남길 것만 남기고 나머지는 기억에서 없애라.
즉, 실패를 거울삼는 것은 정도껏만 하라는 말이다.
실패를 거울삼으면 네 시야에 실패만이 가득차게 돼.
게다가 '백개의 눈을 지닌 거울처럼[2]' 거울은 너의 실패를 백개로 보여주고 있으니 네 해석이 오히려 오류가 될 수도 있어.
같은 방법으로는 다른 결과를 낼 수 없지.
그러니 거울삼아 잠깐 보되 오래 기억하지는 마.
사실 실패를 거울삼지 않아도 돼.
성공을 가져오려면 실패한 그 방법으로는 안되잖아. 그것에서 무언가가 삭제, 추가되어 그 자리를 다른 무언가로 채워야 하잖니.
그러니
과거가 네 정신을 잡고 있으면 미래로 걷기가 어려워. 네가 바라는 미래의 성공을 가져오려면 미래로 시선이 옮겨져야 해. 그런데 거울을 오래 들여다보고 있으면 과거에 잡혀버린 네 정신이 그 실패와 정이 들겠지. 또한, 사람은 지각하려면 우선 감각적으로 먼저 느껴야 하는지라 실패에서 느낀 감각이 네 지각활동을 제한하게 돼. 그러니 실패를 거울삼는 것은 정도껏만. 그냥 휙. 지나쳐.
그러니 성공이란 단어를 결코 어떤 순간이라도 머리속에서 지워버리거나 흐리게 두지 말라는 것이야.
간혹 어떤 이들은 '성공'을 너무 거창하게 여겨서 오히려 '성공? 나같은 사람이 무슨..'이라며 자기 인생에서 성공이라는 단어를 스스로 없애버려. 혹시 네 머리속에 만약 이런 생각이 있다면 지금 당장 없애라. 부탁 아니고 명령이다. 성공은 작든 크든 성공인 것이야. 네가 엄마에게서 건강하게 잘 태어난 것도 성공, 기다가 걷는 것도 성공, 갓난 아기때 병원에서 포기할 정도로 크게 아팠지만 잘 이겨낸 것도 성공, 초중고등학교를 무사히 잘 보낸 것도 성공. 이번 시험에 몇점을 받겠다고 목표한 것을 이룬 것도 성공, 가고 싶은 학교에 간 것도 성공. 모든 것이 크기와 시간, 나이와 무관하게 성공이야.
그러니 '성공'을 너무 거창하게 여기지 말고 밥먹듯이 그저 일상언어로 지녀야 할거야.
그래야 그것이 네게서 떠나지 않아.
떠나지 않는 것을 우리는 '습관'이라고 하지.
성공도 습관이고 실패도 습관이야.
습관은 일상을 만들고 일상은 인생을 만들지.
이렇게 작은 성공은 더 큰 성공으로 이어져. 기다가 걷다가 뛰게 되는 것처럼. ABC를 외워야 단어를, 문장을 읽어내는 것처럼. 성공은 이렇게 작은 것에서 시작해 서로 연쇄적으로 네 인생에 등장하지 결코 독립적으로 어느 한 순간에 짠하고 등장하는 마법이 아니란다. 그러니 '일상'속에서 가볍게 여기는 모든 것들에서 작은 성공들이 습관이 되길 바란다.
그러고 보니 성공, 참 쉽고 단순하지? '성공적인 인생'이라는 말이 거창해 보이지만 이 시작은 작은 성공에 대한 기억, 그 기억이 주는 동력, 그 동력으로 지속적으로 성공을 이어가는 작은 행보들이 쌓여 만들어진단다, 작은 성공을 가볍게 취급하지 말고 작은 성공이 큰 성공을 견인한다는, 이 연쇄적인 인과의 원리를 꼭 기억하렴.
성공은 연쇄적으로 발생하면서 그 부피를 키워나가는 것에 대해 이해했다면 조금 더 보태보자. 서로 인과되어 연쇄적이며 자신의 몸집을 키우지만 아주 드물게, 그러나 누구에게라도 삶에서 몇 번은 뜻하지 않은 성공이 제 발로 찾아온단다. '행운'이라는그것이지. '기회'라고도, '운'이라고도 불리는 그 것. 이렇게 이름붙여진 것들은 누구에게든 인생에 몇번은 찾아와. 드문드문 오겠지만 반드시 와. 이것은 무슨 초능력으로 감지하는 것이 아니야. 공부를 잘한다고 알 수 있는 것도 아니지. 바로 너의 삶의 자세에 달려 있단다.
작지만 이루려는(성공해 내려는) 의지,
그 의지가 갖는 의미,
의미에 담은 의도,
의도에 담긴 선한 기운,
그 기운의 강도,
그 강도를 유지하고 지속시키는 인내,
인내를 익숙하게 유지시켜줄 매일매일의 작은 행동들,
그리고 그 행동에 담긴 마음.
그 마음에게 명령하는 정신(mind)과 정신의 힘(mental).
이 연역된 연결고리를 총체적으로 '자세(attitude)'라고 하지.
다시 말하지만, '운', '기회'는 자세에 대한 우수한 성적으로 받은 부상(副賞)이야. 선물이지. 선물이라 네가 결정할 수 없고 운과 기회가 너를 찾아가. 선물의 종류나 크기, 시기 모두 네 계획이나 판단밖에서 일어나. 그래서 '뜻하지 않은 성공'이 널 찾아가는 거라구!
선물을 원한다면 너는 매순간 자세만 다듬으면 돼.
그러면 '운'과 '기회'가 자석처럼 네게 달라붙지.
양이 쌓이면 질적인 화학변화가 일어나지. 양이 쌓이면 질적인 승화가 일어난다는 것을 너는 이미 알고 있을거야. 물은 99.9도까지 끓어도 액체지만 마지막 100도가 되는 순간, 열의 양이 쌓여 수증기인 기체로 차원을 달리하지. 우리는 이를 임계점, 터닝포인트라고 말하기도 하는데 네가 성공하고자 하는 그 모든 것에도 반드시 어디까지는 양을 쌓는 것이 성공의 기본원리야.
작은 성공의 양이 계속 쌓이면 그것은 자체적으로,
그러니까 성공 스스로! 다른 차원으로 상승하려는 움직임을 가지거든.
그래서 네 능력과 네 한계를 뛰어 넘은 다른 차원의 능력인 '운'을 불러오지.
'기적과도 같은!, 신비로운!' 현상이 네 인생에 계속 개입하지!!!
게다가
더 큰 기회까지 업고 온단다!
그러니 너는 제 발로 널 찾아가고 있는 '기회'나 '운'을 미리 바라지 말고
네 발로 할 수 있는 작은 성공을 위한 행동의 양을 쌓는 것에만 집중하렴.
그것이 운이 널 더 빨리 찾을 수 있도록 널 보여주는 능력이거든.
너의 자세는 운과 너를 잇는 교신채널이야.
그래서 성공은 아무나 할 수 있지만 누구나 가질 수 없어.
왤까?
99까지 쌓는 것을 하지 않거든.
양은 채우지 않고 바라기만 하거나 기회나 운에 의지부터 하려 하거든.
성공이라는 단어를 무시하거나 혹은 겁부터 먹는 사람들도 많고 말야.
이제, '큰 성공은 작은 행동이 모인 결과'라는 명제에 논리를 갖게 되었지?
'너의 자세가 성공을 위한 자석'이라는 명제 또한 이해로서 확신하지?
논리는 이치에 따른 것이라 이성적 인간이라 불리는 우리에게 논리는 확신을 주지.
아주 작은 네 행동 하나하나에서 성공하려는 습관을 길러봐. 아침에 제시간에 일어나는 것부터 성공, 이부자리 정리도 성공, 양치질, 세수도 성공, 작은 업무에서도 성공, 웃기 싫은 사람 앞에서 한번 웃어주는 것도 성공, 매 순간 그냥 스치듯 지나가는 모든 것에서 성공을 경험해보렴. 매순간 치열하게 열정적으로 깊이 고민하고 사는 게 삶을 진하게 사는 것이 아닐 수 있어. 이 작은 사소한 행동들에서 기분좋게 성공해내는 것이 어쩌면 더 네 삶을 곧게 걸을 수 있도록 도울거야.
이미 너에게는 이부자리 정리나 양치질, 세수, 밥먹기와 같이 굳이 성공을 의식하지 않아도 성공하는 것들은 아주 많아. 지금 네가 서 있는 그 자리, 그 나이에 걸맞는 새로운 성공습관을 가지면 돼. 새로운 습관을 가지는 것도 이미 지난 성공들처럼 반복된 행위만 하면 돼. 인사, 식습관, 표정, 집념, 배움 등, 나이에 따라 지녀야 할 성공요소들 모두는 습관으로 만들어진 자세지. 그러니 오늘부터 하나하나 자신의 생활을 점검해보렴. 자신을 또 다른 눈으로 바라보면 아주 쉽게 알 수 있단다. 네가 원하는 너의 자세를 지금부터 매일 성공적으로 마무리해보렴. 또 말하지만, 성공, 별 거 아니지?
나아가
성공에 대한 매커니즘이 너무 분명하지 않니?
작은 실패는 작은 성공으로, 작은 성공은 조금 더 큰 성공으로, 그렇게 점점 성공이 네 몸에 체화되면서 도전은 별로 두려운 존재가 아니며 도전으로 체험한 실패의 경험이 차곡차곡 쌓아서 커다란 성공을 앞당기는, 이게 단순한 성공매커니즘이잖아.
이게 성공이 가는 길이야.
성공이란 길이 이런 길이라구.
넌 작은 행동의 성공을 습관화시키는 것만 하면 돼.
이 단순한 매커니즘에 모두가 고개를 끄덕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공을 늘 어려워하는 이들은 왠지 아니? 성공의 길 곳곳에 놓인 돌맹이들이야. 어떤 감정은 디딤돌이, 또 어떤 감정은 걸림돌이 되기도 하지. 이 구분을 못하고서 매번 돌맹이에 치여서 넘어지는 사람들이 있어. 성공이 감정에 방해받는 것이지. 좋다면 흥분이 지나치고, 두려우면 좌절에 빠지고, 충분히 일어날 수 있는데도 지팡이 달라고 소리치고, 약이 필요없는데도 괜시리 절름거리고, 날개짓 몇번만 하면 되는데 바닥에 엎어져 파닥이는...인간내면에 무조건 자리를 틀고 있는 이 수많은 감정들에게 매번 당하는 것이지.
어떤 감정이든 네게서 모습을 드러내려는 그 녀석들을 통제하고 조절하지 못하면 너의 에너지는 성공의 길을 걷는데 쓰이지 않고 매번 돌맹이청소하는데에, 그러니까 감정을 억제, 통제하는 데에 온 에너지를 다 소진되기 때문에 성공은 이제 남의 얘기처럼 들리지. 그렇게 돌맹이청소하다가 주저앉거나 되돌아가는 거야.
언제 어떤 감정이 네게 모습을 드러내더라도 그것을 통제할 수 있는 힘이 이미 네게는 있어.
그 힘의 원천이 자세야.
이미 네게 있는 그 커다란 힘의 지배주체가 자세란 말이지.
성공은 자체동력으로 결과를 향해가고 있을테니
너는 매커니즘의 어디에 네가 서 있는지 이성이 자리를 잘 지키게 하고
감정이 놀자할 때 감정과 놀지말지, 얼마나 놀아줄지 결정해야 해.
명심하렴.
성공의 천적은 감각에 반응하는 감정이야.
감정이 너의 주인인지 네가 감정의 주인인지 명확하지 않니?
마지막으로 당부하고 싶은 것은,
성공 후 너의 자세란다.
성공은 끝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야.
더 큰 성공으로 이어지는 과정이지.
성공은 끝이 없어.
소크라테스나 에피쿠로스와 같은 훌륭한 철학자들의 유언이나 아우렐리우스와 같은 성현들의 당부, 인생의 고백록을 쓴 성아우구스티누스, 톨스토이, 루소와 같이 위대한 성현들도 자기 생에 다하지 못한 것을 기록으로 후손들에게 남겼어. 후손들이 해주길 바라는거지. 인간은 죽어서도 이루고 싶은 욕구가 존재하는 것이 인간의 본성이야.
그래서
어리석은 사람들은 '끝없이 욕구를 추구'하는 것을 '만족하지 못하는' 사람이라 흠잡기도 해.
그런 돌아볼 가치도 없는 말은 그냥 무시해 버려라.
'욕구'와 '만족'의 자체본성(단어자체가 지닌 본질적 성질)은 '무한성'이야.
무한한 것을 유한하게 해석하는 오류에 동조할 필요는 없단다.
욕구도 만족도 너는 무한하게 느낄 수 있어.
인간이 무언가를 욕구한다는 것은 이미 그 사람안에 욕구를 현실화시킬 능력의 싹이 돋고 있음을 의미해. 따라서, 욕구가 커지면 싹은 더 무럭무럭 자라고 만족도 더 커지지. 욕구와 만족. 이 둘은 비례해. 이렇게 무한성을 지닌 것을 사람이 의도적으로 멈출 수는 없어. 의도적으로 '이쯤에서 그만하자.'라고 단절하는 것 역시 '그만하고 싶은 욕구'를 만족시키기 위한 선택이니까. 욕구를 추구하는 자체가 네게 만족을 줄거야. 그러니 네가 추구하는 모든 시간이 네게 만족인 것이야. 너는 죽는 순간, 아니 그 너머까지 네 삶의 주인이어야 한단다.
주인답게 살고 네 후손들이 그것을 계승하게 하는 삶.
그러니 결코 어떤 순간에라도 성공이란 단어를 머리속에서 지우지 말고 자세를 흐트러뜨리지 마라.
성공은 너답게 온전히 네 삶을 살아내는 것이야.
그렇게 너다운 삶이 또 다른 누군가에게 보탬이 되게 하는 것이야.
그 보탬으로 그 누군가도 자신의 삶을 살게 되고 그 또한 네 인생을 성공으로 남기는 것이며
이로써 자연에게 무상으로 받은 모든 빚을 갚고 자연으로 돌아가는 것이야.
네가 네 인생을 너답게 살아내는 것은 너만이 할 수 있는 유일한 성공이며
이는 결국, 창조주가 너를 세상에 내보낼 때의 목적에 부합한 삶을 살았다고 증명하는 것이지.
그렇게 세상의 조화에 이로운 네가 되지.
네가 할 수 있는 가장 커다란 이타야.
네 인생을 너답게 살아내는 것이 궁극의 가장 위대한 이타란다.
사회의 경쟁 마당에 임하거들랑
인생의 진두에 나서라!
결코 남의 구사(驅使)를 달게 받는 가축이 되지 말라.
상대를 압도하는 용자가 되라!
(중략)
위대한 자의 생애를 돌아보고
인생을 숭고하게 가꾼 뒤
이 세상을 떠나는 날,
시간의 모래 위에 영원한 발자취를 남기고 가라[3].
여기까지 긴 글 읽으며 너는 커다란 궤변 하나를 발견했을거야.
그리고 이 궤변이 진리로서 깨달아졌을거야.
결국,
엄마는 엄마를, 너는 너를, 각자의 삶에서 성공을 끝없이 추구하며 매순간 성공하는 모습을 서로에게 보여주자꾸나. 엄마는 엄마의 하루를 성공으로, 너는 너의 하루를 성공으로 즉, 자신의 성공이 무한한 이타의 실천이니 우리 그렇게 하루하루 성공을 만들어 보자!
[1] 키에르케고르선집, 키에르케고르, 1994, 집문당
[2] 니체의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서 '백개의 눈을 지닌 거울처럼 사물들 앞에 드러누울 뿐 그 사물들에게서 아무 것도 원치 않을 때, 그런 것을 나는 온갖 사물에 있어서 때묻지 않은 앎이라고 부른다'고 했다.
[3] 롱펠로우(Henry Wadsworth Longfellow, 1807~1882, 미국시인)의 시, '인생찬가' 가운데
[지담연재]
월 5:00a.m. [이기론 - 어떻게 살아야 할까.]
화 5:00a.m. [삶, 사유, 새벽, 그리고 독서]
수 5:00a.m. [나는 시골로 갑니다.]
목 5:00a.m. [Encore! '엄마의 유산']
금 5:00a.m. [삶, 사유, 새벽, 그리고 독서]
토 5:00a.m. [지담과 제노아가 함께 쓰는 '성공']
일 5:00a.m. [나는 시골로 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