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 글은 1달만에 도시생활을 접고 양평으로 이주한 저의 리얼일상을 이사준비부터 듬성듬성 적어내려 가는 연재브런치북입니다. 헌집과 헌나를 변신시키는 과정을 담아냅니다.
요즘 내가 매일 아침에 의식적으로 하는 일은 '우리집과 옆산 사이 길 낙엽비질'이다. 꽤 긴 이 길에 요즘 낙엽이 매일 수북히 쌓인다. 보기엔 좋다. 생각도 많아지고. 걷기에 바스락소리도 좋고.
그런데 여긴 우리집 현관으로 걸어오는 길가이기도 하고... 계기와 이유는 잘 모르겠지만 그냥 새벽독서와 독서토론이 끝나면 난 바로 뛰쳐나가 이 긴 길가의 낙엽을 쓴다.
아직 싸리빗자루질이 서툴러 어깨며 손목에 힘이 들어가는지 좀 뻐근하지만 낙엽이 벗겨지며 길의 맨살을 보는 재미도 쏠쏠하고 비질하는 내내 아침의 찬공기가 내 들숨날숨으로 드나드는 '상쾌'도 느끼고 뭣보다 이 시간만큼 침묵하며 그저 비질을 통해 땅과 내가 만나는 것 같아 내면의 대화도 많아져 '중력의 악령이 날 땅속으로 끄집어 당기는 것을 막아주길' 빌기도 한다.
저 아래 언덕을 올라 아래부터 우리집까지는 딱 3집. 내 나름대로 젤 아랫집은 101호, 그 다음은 201호, 우리집은 301호라 부른다. 젤 위가 우리집이라 우리집을 지나면 산이다. 산을 오르려는 사람, 또 '지나가다'라고 말은 하지만 여기를 지나면 아무것도 없기에 일부러 날 만나러 와 이 얘기 저 얘기 차 한잔 마시는 사람... 그냥 집구경하러 왔다고 오른손 살짝 올려 인사해주는 사람...
참 ... 이 길은... '아름다운 사람'이 지나다니는 길이다.
아니, 이 길을 지나면 누구나 '아름다운 사람'이 되는 길이다.
아니, 내가 더 아름다운 사람이 되면 이 길을 지나는 누구나 아름다운 사람으로 변신시킬 길이다...
그래서 이 길의 기운이 그대로 드러나게 이른 아침 비질을 하는 나는 어떤 의식을 치르는 느낌인 것이다.
도시에서의 길은 그냥 여기서 저기로의 이동을 위한 것일뿐 딱히 별 생각이 없었는데 여기 이 길가는 인간세상에게서 오염과 사악, 해악을 모두 거두어 대자연과 인간을 연결짓는, 그렇게 누구나 지나가도 아름다워지는 마술을 부릴 것 같아서 난 이른아침 비질하는 침묵의 시간을 독서와 사랑하는 이들과의 토론을 마친 후 바로 이어지는 나만의 의식으로 체화하려 한다.
이 길에... 이름을 지어주고 싶은데..... (아직은...)
며칠 전. 하루종일 비가 온 다음 날. 낙엽이 비랑 만나면 땅에 너무 찰싹 달라붙어서 떨어지지 않으려 하기에 비질이 약간 힘들었던 그 날, 땀을 뻘뻘 흘리며 비질을 막 끝내는데 저~어기 아래에서 소리가 들린다.
"뭐해? 어제 안 보여서 난 간 줄 알았네!"
"비가 와서 하루종일 집안에만 있었죠."
이 곳은 주말에만 사람이 오든지, 아니면 와서 살다가 어느 순간 사라지곤 해서 나도 며칠 살다가 간줄 아셨단다. 날 부르신 할머니는 늘 고개를 떠신다. 101호아저씨의 정보망에 의하면 치매가 살짝 오셨는데 일하는 치매로 와서 하루종일 일만 하신단다. 그러고 보니 할머니는 내가 나갈 때마다 일을 하고 계셨다. 뭐라도 하고 계셨다.
"봉다리 들고 내려와 봐!"
10시반에 수업이 있어서 서둘러 내려갔다. 직접 들고오지 못하신 걸 보니 무거울 것 같아서 '봉다리.' 대신 바퀴달린 시장바구니를 들고 내려갔는데 세상에.. 고구마를... 내 손보다 2배나 큰... 고구마를 잔뜩 주셨다.
"이 귀한걸, 힘들게 농사지신 걸 저 주시면 어떡해요... 전 드릴 것도 없는데.." 했더니
"너무 이뻐서... 매일 부지런하게 길도 닦아주고 색시(할머니는 날 색시라고 부른다. ㅋㅋㅋ)가 와서 내가 여기 다니기가 좋아. 길도 넓어졌고... 자꾸 올라오고 싶어." 하신다.
"맛있게 먹겠습니다!! 아껴서 감사히 먹을께요!!!"
넙죽 받았다.
그 순간, 난 진짜 웃음을 봤다.
온 얼굴이 다 주름투성이인데... 그 속에서
보석같은, 아니 보석으로 비교도 안되는 진짜 웃음...
가식없고, 애써 주름만들거나 주름펴지 않은, 진짜 웃음.
마음 깊은 곳의 버블이 한꺼번에 터져나와 입을 활짝 열게 만든 진짜 웃음.
보는 이로 하여금 눈물까지 찔끔 나게 하는 강력하게 포근한 진짜 웃음.
아... 아름답다....
"할머니! 이제 할머니가 내 선생님해줘요. 나 여기서 할 줄 아는 거 하나도 없는데... 고추도, 상추도, 가지도, 호박도 심고 싶고 완두콩이랑 샐러리도 심고 싶은데 할머니가 가르쳐줘요" 응석떠는 내가 이뻤는지 "뭐.. 씨만 뿌리면 되는 걸... 나중에 내가 시키는대로만 해!"하신다.
내 하루는 새벽에 시작된다.
몇달 뒤면 6년이 되는 새벽독서.
3년이 되어가는 새벽 5~7시까지의 독서모임
그렇게
새벽부터 이어진 정신의 땀...
그리고 몸을 움직여 흘린 신체의 땀...
여기에 아름다운 사람으로 이어진 마음의 진한 액체...
난...
너무 많은 것을 누리고 있다.
날 힘들게 한 내 안밖의 문제, 걱정거리들....
그것들을 애써 해결하고 부딪혀 나가느라 정말 치열했던 그 시간들에 혹여 우주가 내 진심을 외면했거나 내가 받아야 할 보상을 빠뜨린 적이 있었나보다. '알맞은 시점'에서 우주는 반드시 그 빚을 갚는다더니 분명 내가 아무 저항없이 이 길로 발길을 옮긴 것에 우주는 통크게 내게 보상하는 듯하다. 지금이 '알맞은 시점'인가? 아니면 전조, 징조, 조짐?
안좋은 일이 생겨도, 원하는 결과가 나오지 않아도, 기다리는데 계속 지체되도, 하는 것보다 저 저평가되어도 그저 '뭐, 괜찮아. 복리로 어디선가 쌓이고 있겠지. 우주는, 대자연은, 섭리와 원리와 이치는 결코 계산이 서툴지 않으니까' 하고 마는 나지만 그래도 이렇게 아름다운 길에서 아름다운 사람의 아름다운 미소로 내 가슴에서 몽글거리며 아름다움이 연신 느껴지는 것은 필경 우주가 내게 갚아야 할, 날 외면했던 시간에 대한 보상인 것이다.
난.. 이렇게..
여기 시골에서 아름다움을 찾아가고, 키워가고, 만들어내고 있나보다....
자연과 사람과 더불어...
p.s. 받기만 하고 가만히 있는 성격이 아니라서 다음날 녹두전 2장을 할머니께 갖다 드렸더니 세상에.. 고구마를 또 더 많이 가져다 주셨다. ㅎㅎㅎ 하나를 받으면 둘을 나누는... 집안에 고구마가 가득가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