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 글은 1달만에 도시생활을 접고 양평으로 이주한 저의 리얼일상을 이사준비부터 듬성듬성 적어내려 가는 연재브런치북입니다.
헌집과 헌나를 변신시키는 과정을 담아냅니다.
지난 주부터 갑자기 산이 물들기 시작했다. 올여름의 폭염이 길어 과일의 당도도 떨어졌다 하고 낙엽도 여전히 푸르러 이러다가 단풍없이 그냥 잎이 지면 어쩌나 했다는데 갑자기 '앗! 가을이지?'하며 깜빡했다는 듯 나무들은 서둘러, 이 가을이 가기 전에 할일을 마쳐야 한다는 초조함까지 내비치며 순식간에 일제히 옷을 갈아입기 시작했다.
울긋불긋... 은행나무의 노오란색은 그 어떤 수식어로도 만족할 수 없다는 듯 아름답다.
갑자기 초록이 다양한 색을 휘감은 여기 이 곳에 내가 산단 말인가?
입장료도 안 냈는데 여기서 맘껏 이들을 바라봐도 되는걸까?
여기서 이렇게 자전거타고 마구마구 돌아다녀도 되는걸까?
자연은 이 무한함을 단 하루, 며칠간만 허락한 풍경놀이가 아니라
오늘도 내일도 계절이 바뀌어도 계속 즐기도록 내게 진정 허락했단 말인가?
대자연의 허락없이 여기 눌러앉아버린 나를 이렇게 전신(全身)으로 포용하며 반겨주니, 엎드려 감사의 인사를 드려도 부족한 난 이 풍경이 내 거주지에, 내가 서 있는 모든 곳에 존재한다는 자체가 너무나 신기하다.
아직 시골생활 초자라서 이 벅찬 감동이 마구 밀려오는 것이겠지만 나는 지금의 느낌을 깊이 잘 챙겨 내년도, 내후년도, 또 그 다음 해에도 '당연히 올 것이 온' 것마냥 무덤덤해질 게 아니라 '벅찬 감동'이 기하급수로 증가하며 내 속에서 마구 덩치를 키워 덩달아 '감사'도 커지길 바란다.
그러려면 내 기억이 망각에게, 내 감각이 둔감에게 당분간 자리를 양보해야 할 것이다.
우> 흑염소와 염소주인아저씨와 노란단풍이 너무 멋스럽다.
요즘 내가 자주 듣는 말이 있다.
'시골에선 일이 없으면 외로워요'
외로움...
사실 이 단어는 오래전부터 내게 익숙한 친구같은 존재다.
난 새벽부터 오전까지 책상앞에서 떠나질 않는다.
이렇게 깊은 시골로 들어온 이유가 글을 쓰기 위해서였고
또 아주 오래된 습관 '위대한 정오'를 맞이하기 위해 새벽~아침을 그리 보내왔다.
글을 쓰려면 많이 읽어야 하기에 한참 책상에엉덩이를 붙이고 있어야 하고
자세히 깊게 보고 알기 위해 많이 걷고 한참 봐야 한다.
그렇게 글을 잘, 제대로, 나답게 쓰기 위한 오전구속,
이어지는 마당부터 저~~어기 동네 너머까지 마실다니는 오후자유는
내게 무한의 지식과 영감을 줄 것을 믿기 때문이다.
여기 시골에 와서 얻은 습관 가운데 하나가 집옆 길가와 마당을 비질하는 것, 하루종일 클래식을 집전체에 울리도록 틀어놓는 것인데 비가 오거나 너무 몸이 고되어 오후의 신체노동을 하지 못하거나 밖을 나가지 못할 때, 내 오래된 친구 외로움은 내 손을 잡는다. 심지어 쓸쓸하다도 보챈다. 이럴 때 클래식은 이 감정을 더 자극하는데 그렇다고 음악을 끄거나 다른 음악으로 대체하지는 않는다. 그저 외롭고 쓸쓸한 이 느낌 또한 고즈넉한 이 곳에 제법 어울리기 때문이다.
그런데 가만히 돌아보면,
오후 몇시간을 마당에서 노동에 할애할 때의 신체의 열기나
같은 시간, 집안에서 외로움에 절절매는 감정의 부유나 매한가지다.
이렇게 쏟든 저렇게 쓰든 내 몸이 발산하는 에너지는 같은 질료로부터 유출된 것이기에
견뎌야 할 근력도, 참아야 할 압력도, 내게 어울리게 변신시켜야 할 지력도 내게 같은 것을 요구하고 동질의 것을 키워준다.
시골생활의 낭만과 고요와 친구하려면
먼저 고독과 침묵에 익숙해져야 하리라.
고독과 침묵은 우울이나 공허와는 분명 다른 느낌이다.
고독과 침묵이 나의 내면을 살뜰하게 살피며 내면의 자아를 만나게 해주는 매개라면
우울이나 공허는 나의 내면을 아프게 할퀴며 내면의 자아를 외면하게 하는 매개이다.
감정이 부유하는 듯한 외로움은
고독으로 향할지 우울로 향할지 두 갈래 길앞에 날 세워두고 선택하라 한다.
당연히 클래식과 떨어지는 낙엽과 울긋불긋 날 황홀경에 빠뜨리는 저 산의 색들은
나의 외로움이 고독으로, 침묵으로, 그렇게 고요한 낭만의 세계로 내 감정과 정신을 안내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