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들은 인생을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마침내 깨달은 사람들같다. 50년 이상을 모르고 지낸 사람들인데 마치 아주 오래전부터 서로의 삶을 들여다보고 서로의 삶의 갈증을 어루만져주고 서로의 삶의 길을 응원해 주었던 사람들같다. 서로 다른 곳에서 왔지만 물길이 서로 헤어졌다 만나는 것처럼 우리가 여기서 다시 만난 것 같다.
이렇게 나는 여기서 많은 사람들을 만나고 그들과 이야기를 주고 받으며 나도 몰랐던 나를 발견하고 나를 찬찬히 드러내고 있다.
마을전체 주민이 속초로 놀러간다며 45인승버스 2대가 대절되어 마을회관앞 주차장에 서 있다. 사람에 대해 낯가림이 심한 나는 이들과 함께 하지 않았지만 할머니 할아버지들 맛난 거 사드시라고 약간의 성의를 표한 후 나는 그렇게 너무나 조...용... 한 마을에 혼자 남았다. 감사히 날씨까지 좋았다.
이사오기 전, 나는 자발적 고립을 선언하고 그간 주기적으로 나가던 모임도, 늘 해오던 일도, 간헐적으로 만났던 지인들과의 만남도 모두 단절했다. 이는 그들이 싫거나 귀찮거나 내게 해가 되서가 아니라, 나돌아다니던 나를 하나에 집중시키고자, 감정을 회피하는 데에 익숙한 내 정신이, 아무때나 치고 들어오는 내 감정이 익숙한대로 기능할까봐서 스스로 내린 특약처방이었다.
그렇게 나는 서서히 외부로부터 혼자를 선택했고
새벽독서를 시작으로 하루의 전부를 '나에게 집중하며 나를 키우는' 데에 시간을 보낸 것이다.
그렇게 벌써 6여년...
어떤 흐름에 의해 이끌리다시피 터를 옮긴 나에게 변화가 찾아오는 것을 느낀다. 여기 와서는 하루가 멀다 하고 나를 찾는 사람들이 많다. 약속을 해서도, 어떤 이해관계에 의해서도, 그저 예의를 차리기 위해서도 아닌, 자연스러운 만남이 하루 이틀이 멀다하고 이어지니 나조차 나의 생활이 아이러니할 정도다. 도시보다 시골이 오히려 '공동체의 삶'이라더니 이런 건가 싶기도 하고 또 '새로운 인연'의 등장에 내가 예전과 같이 대하지 않는 나도 발견하고...
더 혼자이려 택한 삶인데 이래서 되겠나 싶은 생각은 아주 찰나였고
외부로부터 사람이 오고 내면으로는 오히려 독립이 단단해지는,
정말 내가 바라던 내 모습이 되어가는 듯하여 다행이고 기쁘기도 하다.
지나가다 들렀다며 머쓱해 하시는 마을어르신에겐 따뜻한 차 한잔을 권하고
여기에 이런 집이 있었는지 몰랐다며 일부러 찾아주신 내 또래와는 삶의 대화를 나누고
작가님이랑 대화하고 싶어서 왔다는 독자와는 그의 삶의 여정을 들어주고
그냥 생각나서 차를 돌려 왔다는 분께는 해먹에 누워 편안히 계시도록 자리를 비껴주고
생각할 게 많아서 머리 좀 식히러 왔다는 분과는 그냥 고기나 구워먹으며 잡담을 주고받고
이유없이 그냥 놀러 왔다는 분께는 톱 쥐어주며 일이나 하다 가라며 혼자만의 시간을 만들어주고
남자건 여자건 나이가 많건 적건 상관없다. 혼자든 함께든 이 역시 상관없다. 그렇게 그들이 이 곳으로, 내게로 찾는 이유도, 과정도 모르지만 난 진정으로 그들을 대하고 그들은 그렇게 편하게 이 곳에서 몇시간, 또는 며칠을 머물다 간다.
예전처럼 누가 내게 오는 것이 부담이거나 싫거나 어렵지 않다.
그저 나 먹는 식탁에 숟가락 하나 얹어 함께 밥먹는 것도 민망하지 않다.
염색하지 않은 흰머리에, 눈썹조차 그리지 않은 생얼에, 트레이닝복에 아이들 입다만 목 늘어진 티셔츠에, 장화신은 내 모습도 결례로 여겨지지 않는다.
칠흙같은 어둠이 깔리는 6시면 술이나 한잔 하고 자고 가라며, 그냥 꾸며지지 않은 방으로 안내해도 부끄럽지 않다.
새벽, 부시시한, 눈꼽낀 모습으로 얼굴을 마주쳐도 서둘러 단장하려는 조급함도 없다.
이런 내가 신기할 정도다.
그냥 내가 편한대로 대하고 그런 나를 오히려 더 편하게 대해주니 고맙다.
사람은 내가 대접받고 싶은대로 상대를 대하라더니 그 말이 옳다.
이 곳은...
어느 날 갑자기 나를 끄집어당겨 앉혀둔 이 터는...
이렇게 사람에 대한 원망과 이해관계에서의 아픔과 실망, 그렇게 사람을 신뢰하지 못했던 내게 '사람'을 다시, 제대로 알게 하려나보다...
'고귀한 친구를 내치는 것은 사람이 자기 것 중에서 가장 아끼는 생명을 내치는 것과 같다(주).'는데 지금껏 고귀한 줄도 모르고
내가 아프다고, 내가 속상하다고, 내가 싫다고, 내 구미에 맞지 않는다고,
내가, 내가, 내가 그렇다고...
네가 그래서였다고, 네가 그런 말을 해서였다고, 너의 행동이 왜 그랬었냐고, 네 판단때문에 내가 이렇게 됐다고,
네가, 네가, 네가 그래서였다고...
과연 나는 얼마나 많은 아까운 생명을 잃고 산 것일까.
이제는 그러지 말라고,
이제는 사람곁에 머물고 사람에게 곁을 내주라고,
그렇게 아끼는 생명을 지켜내라고 내게 일러주는 것일까.
그래선지 여기 시골에서는 수십, 십수년전에 나와 인연이 되었던 이들이, 정말 기억에서조차 잊어버렸던 인물들이 내 꿈에 자주 나타난다. 이런 일이 3번 연속으로 벌어져 며칠 전엔 새벽에 일어나자마자 글로 토로한 적도 있다.
이제 진정 내가 원하는 그것을 가질 수 있을까.
내가 좋아하는 1글자 3가지.
격.
곁.
결.
격을 지닌 이들과
곁을 서로 내어주며
결이 고운 삶으로 함께 나아가는 것...
에머슨과 소로우처럼, 소로우와 채닝처럼, 몽테뉴와 라보에티처럼, 버지니아울프와 케인즈, 러셀처럼.
그렇게 사유의 결이 방향을 함께 하는, 그래서 모든 것을 내어줘도 아깝지 않은, 그 생명을 곁에 둘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내게 그런 이들이 오겠지. 그렇게 나도, 너도, 그도, 그녀도 모두가 자기 인생에서 자기존재위에 서겠지.
예상했고 예상대로다.
여기 대자연은 지금의
내가 잃어가고 있는,
내게 잊혀지고 있는,
내게 소실되어 가는 많은 것들을 추출, 정제, 용해하며 새로이 배양하게 이끌어주는 듯하다.
이는 분명 공간이 커졌기 때문일테다.
정신의 공간이든 마음의 공간이든 꽉 채워진 공간에서 옴쌀달싹 못했던 나의 해석과 심정을
대자연이 조금씩 키워내고 있나보다. 그 키워진 공간속으로 새로운 자극이 들어오나보다.
이렇게 나는 점점 더 의미있는 의무를 띄게 되고
이렇게 나는 점점 더 줏대있는 나로 나를 세워
이렇게 나는 점점 더 쓸모있는 인간이 되어가나보다.
낡은 터에 내가 들어서며 새로운 터로 변화되듯
낡은 나에게 대자연이 흡입되며 새로운 나로 변화되나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