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마트를 거의 가지 않았다.
정작 사야 할 물건은 몇 개 되지도 않는데 카트끌고 그 넓은 곳을 헤집고 다니는 시간이 싫기도 하고.. 잘 모르겠다. 그냥 재래시장의 그 느낌이 좋아서 일부러 지하철타고 재래시장을 찾는 편이다.
이런 나라서 여기 시골에 와서 젤 좋은 것은 5일장 구경가는 것이다. 아니, 이제 구경이 아니라 장보러 가는 것이다.
9월 20일에 이사와서는 당장 먹을 게 없어서 장터를 휩쓸다시피 했고 거의 이틀이 멀다하고 손님들이 오시는 바람에 5, 10일에 열리는 장터를 가는 것은 필수였고, 무엇보다 이 동네엔 마트나 가게가 없기 때문이다.
집에서 걸어 10분 거리에 작은 마트가 있긴 한데 쌀, 음료수, 술, 과자, 아이스크림 정도? 그 외에는 거의 없다. 게다가 12-1시는 점심시간이라 문닫고 저녁 6시에 문닫고 주말엔 열지 않는다. 처음엔 '마트가?' '왜?' 했는데 이제 서서히 그 이유가 감지된다. 이 마을 대부분이 텃밭을 일구거나 농사지어 자급자족하니 야채나 과일은 팔리지 않을 것이고 저녁 6시면 칠흙같은 어둠인데 굳이 장보러 나올 사람이 없을 것이라는 추측이다.
시골장은 너무 신난다.
재밌다.
서울서 가까워서인지 장날은 서울에서도 많은 사람들이 온다.
일단 준비해야 할 것은 현.금.이다!!!
조금 크게 장사를 하는 분이 아니면 대부분 카드결제가 안되기때문에 계좌이체를 해야 하고 또 할머니들의 경우엔 계좌도 없어 현금으로밖에 살 수 없다. 나처럼 현금을 잘 들고 다니지 않는 사람은 참으로 곤란한데 간절하면 통한다고 했던가. 단골생선가게에서 생선 1만원어치 사고 3만원 계좌이체해드리고 2만원만 현금으로 달라고 해봤다. '할머니들은 계좌가 없더라구요...' 했더니 웃으시면서 바로 주셨다. 이런 소소한 정도 너무 좋다.
생선가게는 아버지와 딸의 궁합이 부럽다!
'아버지! 여기 삼치요!' 하면 아버지는 '8천원! 우리 딸이 새벽에 이거 싱싱한걸루다가 잘 챙겨온겨!'하면서 딸의 노고부터 칭찬하신다. 그러면 딸도 한몫 거들어 '아버지가 손이 크셔요! 큰걸루 드리잖아요!' 이 부녀의 사랑스런 케미에 나는 이 넓은 장터에서 생선은 꼭 여기서 산다. 그 많은 손님 중에서 그들이 날 기억할 리 없겠지만 난 대뜸 아는 체부터 한다. '아부지! 많이 파셨어요? 오늘은 굴 사러 왔는데!'하면 장단 맞춰주시듯 '내가 다 챙겨놨지유! 우리 딸이 새벽에~~' 딸의 웃음도, 아버지의 활기도 늘 신이난다!!
아버지와 딸...
가족은 동업 안하는 거라는데...
아버지와 딸사이는 그냥 서먹한 게 정상 아닌가?
나의 관념이 와르르 무너지는 곳.
나의 부러움을 후루룩 불러오는 곳.
나의 미안함까지 줄줄이 호출당해 맘이 싸하게 아파지는 곳.....
땅콩아저씨는 늘 갈 때마다 입술이 댓발 나와계신다.
젊은 친구들이 마음에 안 드는 것이다. 이 날도 어김없이 손님인 나에게 '그렇지 않아요? 어른을 공경해야지!!'하면서 훈수가 늘어지신다. 이 집의 쥔장인 땅콩사장님은 이모부, 옆에서 돕는 이쁘고 젊은 친구는 조카다. '너~ 어른들한테 그렇게 말하면 안돼! 내가 네 아버지였으면 너 가만 안뒀어! 이모부라서 참는겨!'하시길래 그들의 관계를 알았지만
사실 난 조카편! 이 분주하고 번잡한 장터에서 어찌 일일이 다 고개숙여 인사하겠는가! 물론 인사하는 것이 당연하지만 놓칠 수도 있지, 또 사람에 치이다보면 안할 수도 있고 짜증날 수도 있고 괜히 대낮 막걸리 한잔 걸친 할아버지들의 농담에 화가 날 수도 있지. 에구... 난 그 젊고 이쁜 조카가 이모부곁을 떠나서 자기 꿈을 펼치면 좋을텐데.. 하며 괜히 남의 인생을 내 맘대로 저울질해버렸다. 오지랖이 아니라 자만이다. 에궁...그러지 말아야 하는데... 견과류에 별 관심없는 나는 마당에 새들을 꼬시기 위해 해바라기씨만 잔뜩 샀다.
눈이 유난히 큰 버섯아저씨는 장터갈 때마다 내게 무한재미를 준다.
'아~ 아저씨!! 또 술 취했어요? 장사 어떻게 하려구?' 이번에도 난 아저씨에게 핀잔부터 주지만 아저씨는 또 자기 허리춤에 두른 돈보따리를 내게 내보이며 '나 다 팔았슈!!! 봐유! 돈 이렇게 많이 벌었잖여!'한다. 정말 5만원, 1만원권이 수두룩이다! '내껀 남겨놓고 파셔야지~~~~~'하면 또 어디선가 버섯을 구해와 '1만원인데 3천원 떨이! 다 가져가!' 하신다. 덕분에 우리집 냉동실은 표고버섯으로 가득 찼다. 워낙 버섯을 좋아하기도 하지만 더 비싸지고 추워서 장보러 못 올 것 같아서 잔뜩 사다가 깨끗이 씻어 한번 먹을 양만큼씩 봉지에 담아 냉동실에 넣어두었다. 그득하다.. 든든하다.. 벌써 배부르다..
먹고 사는 일이 쉬운 듯하지만 우리네 인생이라는 게 어쩌면 먹고 살기 위해 치러내야 할 문제집은 아닐까.
먹고 살기 위해 도전하고 갈등하고 쟁취하고 후회하고
먹고 살기 위해 배우고 싸우고 넘어서고 넘어지고
먹고 살기 위해 기쁘고 슬프고 안타깝고 속상하고...
그렇게... 우리네 각자가 먹고 사는 것에서 희노애락 모두를 느끼고 고진감래를 배우는 것은 아닐까.
그러고 보면, 삶이 별건가...
그냥 '사는 것'이지.
'사는 것'때문에, '살기' 위해서 감정도 이성도 필요한 것이니까.
장터에서는 단순한 내가 더 단순해진다.
장터하면 뭐니뭐니해도 장터국밥이다.
정말 어마무시하게 큰 가마솥에서 부글부글 끓고 있는 국밥을 보면 그냥 지나칠 수가 없다. 내 식성이 워낙 할아버지식성이라 국밥이라면 사죽을 못 쓰기도 하지만 장터를 몇바퀴돌면 국밥 한그릇쯤은 뚝딱이다. 거기에 막걸리까지 한잔 곁들이는 재미와 맛은 미슐랭3스타 부럽지 않다!!!
이번엔 알록달록한 모자에 세련된 빨간 신발을 신고 갈색 썬글라스를 낀 지팡이든 할머니가 혼자 오셨다. 그리고 주문하신 순두부를 받아들고는 냅다 소리부터 지르신다. '왜 밥이 없어????'. 그러자 4~50대로 보이는 사장님은 '이쁘게 말해야 밥을 주지? 화내면 안줘!!!' 하면서 너무나 화통한 웃음으로 할머니의 화를 한순간에 누그러뜨린다. 아. 이 재주 부럽다. 상대의 화를 저렇게 화통하게 웃으면서 받아치다니. 제 아무리 데일카네기의 성공대화론을 수십번 읽어도 깨우칠 수 없는 삶의 묘미를 장터 상인은 아무렇지 않게 툭툭 사용한다.
공기밥을 정성껏 담아서 할머니께 가져간 아저씨는 '할머니! 올해 몇이셔? 어디서 오셨어? 할머니가 너무 고와서 공기밥 그냥 드리는겨! 원래 순두부에는 공기밥 안나와!' 하니 할머니는 언제 화를 냈냐는 듯 '내가 93살이야. 수원서 여기까지 혼자 왔어. 배고파!' 하신다. 수원에서 양평까지 이쁘게 차려 입으시고 출타하신 할머니. 93세에 저렇게 정정하시며 불호령까지 내리시는 모습에 앞으로도 내내 건강하시길 맘속으로 나도 모르게 빌고 있었다.
장터구경은 해도해도 끝이 없고 사도사도 더 사고 싶다.
난 차가 없으니 들고 갈 수 있을 정도에서 그쳐야 하는데 그게 쉽지 않다.
욕구가 욕심이 되는 것은 순간이다.
분명 머리는 안다.
더 사면 먹지도 못하고 들고 가면서 계속 후회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산다.
항상 감정은 정신을 이겨먹는다. 에구에구..
어떤 때엔 할머니 물건 싹 사드리고 싶어서 다 사고
어떤 때엔 다음 장에 이 물건이 없으면 어쩌나 싶어 다 사고
어떤 때엔 지금 이렇게 싱싱한 걸 언제 또 살 수 있을까 싶어 다 사고
그러다 보면 매고 지고 들고 버스정류장까지 겨우 가서 바닥에 털썩(할머니들이 다 털썩 주저앉아 있으니 여기서는 바닥에 주저앉아 버스기다리는 모습이 아무렇지도 않다.) 주저앉아 세월아네월아 버스기다리며 생각에 잠긴다.
시끌벅적 혼잡이 지나간 멍... 한 시간.
가질 것을 다 가지고
가야할 곳은 정해져 있고
올 시간이 한참 지나도록 안오는 버스를 기다리는 이 시간.
내 꿈도 그렇겠지.
난 자연이 준 모든 환경을 다 가졌고
가야할 곳도 이미 정해져 있고
올 시간이 한참 지나도록 난 묵묵히.. 그냥 여기 이렇게 주저앉아 글을 쓰고 있으면...
오겠지...
내가 원하는 그 꿈이...
내게 오겠지...
내 꿈이 내게 오는 길목 어딘가에
하염없이 버스를 기다리며 꿈에 잠긴 이 시간이 있는 것이겠지...
https://brunch.co.kr/@fd2810bf17474ff/76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