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이 세상을 하얗게 덮었다.
하루종일 책상에 앉았다가 창밖을 보는데
땅위에 눈이, 눈위에 햇살이, 햇살위에 빛이... 반짝반짝... 너무 아름다웠다...
내가... 이렇게 호강을 누려도 될까...
이 벅찬 감동은 제 아무리 춥다지만 더 세세하게 땅을, 눈을, 햇살을 보게끔 날 밖으로 끌어내었다.
세상이 흐르지 않는 것 같았다.
바람도 없고 사람도 없고 아무 소리도 없다.
움직이는 건 나뿐이다...
소리나는 건 내가 눈밟는 소리뿐이다.
모든 것이 정지된 상태에서 햇살에 비친 눈만, 눈위에 뿌려진 햇살만 반짝반짝...
고요.......
그렇게 나는 차가운 공기 속...을...천.천.히... 걸었다.
그렇게... 나는 내 속으로 차.분.히...들어갔다...
좋아도 좋다고 말하지 못하고
싫어도 싫다고 말하지 못하고
주고 싶은데 주면 뭣하나 싶고
달라고 떼쓰고 싶은데 손내밀지 못하고
힘든데 힘들다고 울지 못하고
잘하는데 자랑하지 못하고
못하는데 해보겠다 말하고
하라고 무섭게 말하고 싶은데 한숨만 내뱉고
아니라고 소리치고 싶은데 괜찮다 고개끄덕이고
정신의 우유부단함인지 정신속 편견에 대한 저항인지
상대에 대한 배려인지 상대를 외면한 침묵인지
상황을 이기는 인내인지 상황에 눈감은 회피인지
잉여로운 감정의 허영인지 각박(刻薄)한 감정의 삭막(索莫)인지
행동의 적정한 신중(愼重)인지 행동하지 않으려는 외람(猥濫)인지
나는 도통 내가 구분이 안된다.
내 감정이 눈위를 걷는 내 발걸음같다.
오른쪽 발을 앞으로 놓자 왼발이 아차 싶어 얼른 오른발 앞으로 자기를 옮기듯
살짝 얼어붙은 구간에선 미끌어질까 한참 머물듯
쌓인 눈에 푹 파묻힌 발을 힘겹게 꺼내듯
미끄럽지 않은 곳을 찾아 앞이 아닌 옆으로 발길을 옮기듯..
내 감정도 여기저기... 자꾸만 살핀다.
침묵은 도저히 참지 못하고 내지르는 내면의 아우성이 너무 커 외부의 소음이 차단된 언어다. 인간의 청각으로는 결코 들을 수 없는 초주파의 언어... 아무도 들을 수 없지만 내 속에서 내게만 들리는...
그러니
침묵은 인내일지도, 항변일지도...
침묵은 부동자세를 고수하는 내면의 단단함일지도, 극한 요동으로 부서지는 내면의 부실일지도...
침묵은 외부와 차단된 모든 것에 대한 거절일지도, 내면의 무지막지한 아우성에 정성다한 응답일지도.
배려는 타인을 존중하는 마음을 기본으로 상대를 나보다 더 위에 존재케 하는 자제(自制)여야 한다. 하지만, 이같은 배려가 혹여 남의 칭찬과 관심을 갈망하는, 스스로는 칭찬받을 가치가 없다고 생각하는 허영(주1)일수도 있다. 말하고 싶은데 하지 못하는 것이 상대를 위한 것인지, 나를 위한 것인지 내 속은 알 것이다. 혹여 내게 타격을 줄지 모를 감정으로부터 나를 보호하고 거기에 상대에게 '참 괜찮은 사람'이 되려는 배려로 위장된 허영.
어떤 상황을 대할 때 지금까지 내가 지니고 있는 모든 편견들을 내려놓고 '지금, 여기, 그것'만 보아야 한다. 신중의 시작은 거기서부터여야 한다. 하지만 내려놓지 못한 편견이나 인식에서 시작된 신중이라면 결국, 제 멋대로 형성되어 있는 정신이라는 토양에서 이상한, 부실한, 보잘것없는 열매가 맺힐 수밖에 없다. 이러한 신중은 무지와 마찬가지다.
찬..찬..히.. 대자연속에서 유일하게 움직이는 나...는 내 속에 엉켜있는 모순들을 하나씩 끄집어낸다.
그러다가...
아....
결국, 순간순간 누군가, 어디서, 무엇을 대할 때 어떤 경계에서 꼼짝못한 채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단 하나의 이유를 알아낸다.
어떤 일을 하건, 누구를 만나건, 무엇에 대해 보고 이야기하든 '지금, 여기, 그것'에서 시작된 신중함으로 나를 지키며 상대와 관계를 맺어야 하는데 내 속에는 여전히 어떻게든 끼어들고야 마는 감정이 가미된 인식으로 시작되어 더 큰 무언가를 기대하거나 외면하거나... 또 어쩌면 내 자체에 '지금, 여기, 그것'에 대한 인지가 없거나 부족, 과잉, 각박, 삭막, 허영의 기로에서 되는대로 꺼내 사용하고 있는 것이다.
모순에 빠진 '지금, 여기, 나'에 대한 고찰이 '모든 사람은 거부할 수 없는 어떤 힘을 향해 나아가듯(주2) 나 역시 어떤 거부할 수 없는 힘으로 나아가는 과정에서의 점검이라 여기며 인간은 자신이 걸어가야 할 진정한 길을 지키기 위해 매우 신중(주2)해야 하니 나 역시 신중의 기준을 다시 검열하는 수순을 걷고 있다고 여겨도 되지 않을까?
우유부단함, 외면, 회피, 삭막, 외람...
괜찮다.
이것들은 편견을 깨려는 저항과 배려, 인내, 감정의 온기를 더 키우려는, 그렇게 내 존재위에 나를 올곧게 세우기 위한 신중함 속에 감춰진 그림자인 것이니...
괜찮은 것이다.
소음이 있기에 고요가 소중하고
눈이 덮였기에 햇살이 더 반짝이고
아무것도 움직이는 것이 없기에 나의 내면이 움직이듯
내가 발견한 내 안의 모순(矛盾)도 활자가 지닌 의미 그대로
결코 배척해서는 안되는,
양립할 수 밖에 없는,
결국 서로를 수용할 수밖에 없는...
그렇게 내게 함께 존재해야만 하는 소중한 가치들이며
그 가치를 어떻게 표현해야 할 지 아직 잘 모르는 나의 인간적인 미숙함일 뿐이다.....
그러니...
괜찮다...
주1> 도덕감정론, 애덤스미스, 비룡사
주2> 구도자에게 보낸 편지, 헨리데이빗소로우, 오래된 미래
2년여전 처음 연재를 시작한 [엄마의 유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