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 며칠 날 휘감고 있는 감정은
위기감... 이다.
위기감. 그러니까 '위기'를 감지한 의식이란.
내가 지니고 있는 가치를 잃을 것 같다는 불안감에서 오는 것일텐데
내가 나에게 어떤 가치를 부여했지?
내게 이 가치를 실현할만한 질서에서 뭔가 엉켰나?
(아직 컴컴한 새벽, 창에 비친 불빛에 시선을 고정하고 한참을... 가만...히 나를 주시해봤다.)
나를 늘... 긴장하게 하는 위기감의 끝에는 6살이전, 어린 내가 있었다.
이유는 잘 모른다.
몇 살인지 기억나지 않지만 당시 용인에 사시는 외할머니댁에 맡겨져 어린시절을 보냈었다. 지금 기억나는 것은 논에 쌓아놓은 짚더미 위에서 원더우먼 소리치며 뛰어내린 기억, 덩치큰 개를 말처럼 타고다니며 '삼촌! 일어나!' 외삼촌 깨우던 기억. 버스에서 내려야 하는데 너무 졸려 자겠다고 떼쓰다 할머니한테 된통 혼났던 기억.
그러다가 6살에 '유치원에 가야 한다'는 엄마의 명령(?)으로 커다란 집 현관에서 신발도 벗지 않고 계속 할머니 치맛자락을 붙잡고 울었던 기억. 엄마는 당시 귀했던 '사이다'를 내게 병째로 주면서 '이제 여기서 유치원도 다니고 살아야 한다'고 날 달랬지만 막무가내로 할머니따라 가겠다고 통곡하며 고집피웠던 기억...
그렇게 몇개의 선명한 기억들이 있다.
난 별로 어린 시절의 기억이 없는 편인데 이 기억들은 왜 아직도 내게 짙게 남아 있는 것일까.
'나는 왜 위기감이 들지?'를 따라간 실끝에 등장한 이 선명함은 무엇을 연유한 것일까.
내 인생의 역사인데 나는 모르겠다.
그러니까 어떤 '이유'에 의해 연결되어는 있겠지만 그것의 사실여부를 난 알 수 없고
그러니 지금부터는 타당하게 유추하고 추론하는 수밖에.
아마도 난 그렇게 어린 시절 6,7살 2년간 유치원을 다니며 마음은 콩밭에 있는데 적응하느라 애먹었었나보다. 할머니랑 살았을 때는 내가 그 집에서 제일 우선이었는데 우리집에서는 내가 제일 나중이었다. 아빠가 젤 우선이었고 갓 태어난 아들녀석(우리집은 3남 1녀. 막내가 아들)이 그 다음, 그리고 첫째딸인 언니, 동생으로 아들을 봐서 덕분에 귀염독차지한 여동생. 그러니 첫째도 막내도 아무 것도 아닌 나는 우리집에서 꼴찌.
어린 이방인인 내가 우리 집(지금도 우리집이라는 표현보다는 그 집이라는 표현이 더 편하다.)에 적응하는 방법은 그냥 말 잘듣고 뭐든 양보하고 아무에게도 성가시게 굴지 않는 선에서 조용히 지내는 것이었을지 모른다. 물론, 이 모든 해석은 유추와 추론이다. 한번도 부모나 형제에게 그 시절의 나에 대해 물어본 적이 없으니까.
하지만, 지금까지도 '가족'이라는 단어가 내게 그다지 살갑거나 정이 잔뜩 묻어있지 않은 이유, 엄마에게 왈칵 달려가 안겼던 기억이 없는 이유, 어릴 적 기억이 별로 없는데도 유독 뚜렷한 기억 몇조각, 그리고 내 삶의 저변에서 늘 떠나지 않는
'인정받으려는', '무조건 참아야 하는' 침묵과 인내로 가장된 회피.
'나말고 너부터' 배려와 겸손 속에 감춰진 비아냥과 비굴.
'무조건 잘해야 한다'는 도전과 승부욕으로 포장된 나 좀 봐달라는 갈구 등이 유추의 근거라면 근거이겠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 가족이 날 하찮게 여기거나 애정하지 않는 것도 아니고 부모의 사랑이 부족했던 것도 아닌데 왜 난 이 모양이지?라며 스스로를 자책하며 보냈던 청소년, 청년시절. 하지만, 그 땐 이 작은 기억이 대변하는 나의 기형적인 심적상태가 내게 타격을 주리라는 예상을 하지 못했었다. 그냥 사는 게 다 그렇지 뭐. 하며 살았으니까.
하지만, 자꾸만 감정적으로 한쪽으로 치우치는 날 바로 세우려는 시도가 결단이 된 2019년 2월 19일. 새벽독서를 시작하면서 나는 차차 알게 되었다. 내가 서 있는 자리와 날 지배하는 감정과 정신의 현주소에 대해서. 아무도 모르게 나 혼자만 된통 아파했던 시간들에서 벗어나고 싶어 정신과 감정이 수시로 일으키는 발작과 경련, 심지어 발악을 상대로 책속의 스승들을 부여잡고 여기까지 온 것이다.
나를 가치없게 느끼고 있음을 전제한다.
곧 이어 타자(他者)들을 나보다 가치있게 느끼는 것으로 진화하면서
나에게서는 나의 못남만을, 타자에게서는 그들의 잘남만을 바라보며
점점 나를 하찮게, 가치없게 취급하는 것을 (내 자신에게 무례할 정도로) 당연하게 여기는 지경까지 나를 끌고 왔던 것이다.
결국, 위기의식은 자기애를 바닥까지 끌어내려 기어이 땅속 어둠으로 나를 밀어넣으려는 감정의 발악이다.
물론, 위기의식은 용기와 도전의 동기를 제공하고 낡은 나를 버리고 새로운 나로 나아가게 하려는 정신의 항쟁인 것도 확실하다.
하지만, 위기의식은 내게 선택을 강요한다.
상대적 비교에 의해 늘 인정받고 싶고 잘해야만 하고 모든 것을 주어야만 하는 외부의 자극에 이끌리는 삶으로 날 이끌지
절대적 비교에 의해 나 스스로를 인정하고 잘못하더라도 괜찮다는, 주지 않았지만 받을 자격이 있다는 내면의 풍요로움으로 자신을 이끌지 선택해야 하는 것이다.
모든 것은 선택이다.
선택이란 '선택하지 않는 것'이 존재하기 때문에 선택인 것이다.
그러니, 이쪽을 잡으려면 저쪽을 놓아야 하고 놓은 저쪽은 과감하게 포기해야 '선택'이다.
그렇다면 위기의식에 긴장되고 조급해진 지금의 나는
추론으로 유추한 나의 기형적인 심리에 대해 기형을 안고 사는 선택인가? 기형을 바로잡는 선택인가?
한쪽을 바로잡으려면 관성처럼 날 끌고가던, 하지만 익숙했던 기형에게서 과감하게 등을 돌려야 한다.
그렇게 균형을 맞춰 전체성으로 나아가야 한다.
왜 이 새벽, 내게 찾아온 감정을 위기의식으로 규정했는지는 모르겠지만 느낌이 그렇다면 그런 것이다.
영혼의 자극은 현실의 정신이 제 아무리 쫒아가도 다 파악할 수 없는 게 당연하니까.
지금 내가 가는 길이 다소 막막하고 버겁고 어렵다는 감정이
긴장, 조급, 불안을 몰고 와
늘 그랬듯 잘해야 하고, 내가 어떤 일에서도 뒤쳐지면 안되고, 누구에게든 성가시면 안되는 그런 존재여야 하는데 그럴 수 있을까, 그러지 못하면 어쩌나, 그러니까 일어나지도 않은 사실을 과장되게 부풀리면서 내가 야속할 정도로 야박하게 그어놓은 '위기'라는 선앞까지 온 것이다. 아주 가혹하고 날카롭게 그어진 '위기'라는 선 앞에 허상이자 추상의 현실덩어리를 무겁게 들고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나와 정면으로 마주친 것이다.
또 이럴 수도 있다.
타자들은 모두 잘하는데 나만 못하는 것 같은. 그러니까 내 시선이 외부로 잠깐 출타해서 반짝이는 구슬 몇 개를 보고서 상대적으로 뿌옇게 빛을 바랜 구슬로 나의 반짝임을 퇴색된 눈으로 본 것이다. 실제 타자의 구슬이 반짝이는지, 내 구슬이 반짝임을 잃었는지에 대해 아무 근거도 없으면서 눈이 그렇게 본 것이다. 타자의 것은 반짝이게, 내 것은 뿌옇게. 실제 구슬이 그런지 모르면서 내 눈이 그렇게 본 것이다. 퇴색된 것은 구슬이 아니라 내 눈이다.
한계앞에 날 세워둔 것일 지도 모른다.
한계앞에 서 있다는 것은
지금까지의 삶의 영역이 아닌 '무경험'의 영역에 진입했다는 것이며
끊어내고자 하는 것에 한 번 더 근절의 힘이 필요하다는 것이며
따라서,
이제 거의 다 왔음을 예고하는 것일 수도 있겠다.
이제 거의 다 왔다.
발목잡힌 채 질질 끌려오던 사실인지도 분명치 않은 현상의 찌꺼기들이,
정체라곤 하나도 없이 막무가내로 나를 해치려던 지난 감정의 부산물들이,
가혹하게 몰아붙이며 닥달하는 기능밖에 못하는 정신의 모난 파편들이
날 떠날 때가 온 것이다.
'위기의식' 덕분이다.
내게 '위기'를 느끼게 해준 영혼의 자극은 내게 신호한다.
물론 지금부터의 걸음걸음에도 위기는 존재하겠지만
그것은 과거로부터 온 멍에가 아닌 미래로부터 오는 징조임을,
물론 지금 걷는 길이 뿌연 안개이겠지만
그것은 무언가로부터 가로막힌 혼탁이 아니라 내 정신이 치열하게 달려와 닿은 '무경험'으로의 진입임을,
물론 지금 걸음이 힘겹고 괴롭겠지만
그것은 후원을 필요로 했던 나약함때문이 아니라 스스로가 길잡이를 자청한 선택임을,
물론 지금 힘겨움은 더디면서 길게 이어지겠지만
그것은 안전에 속아 숨거나 도망치는 주저함이 아니라 본성의 진동을 따르는 집중임을...
결국, 위기의식은
내 가치를 잃어가는 불안감이 아니라
더 고양된, 새로운 가치의 세상 입구에 서있다는 신호였다!
여기까지 추론을 이어가니
어른인 내가 어린아이적 나를 보는 현실은 같지만
어른인 내가 어린아이적 나를 보는 본질이 달라진다.
그 때의 나는 그것이 최선이었으니 기특하고 잘했다.
지금의 나는 지금의 최선을 선택하니 이 또한 기특하고 잘하고 있다.
그 때의 보호받고자, 사랑받고자, 안기고자 했던 나를
아주 많이 늦었지만 지금 꼭...
안아줘야만 하겠다...
미래의 나는 지금의 나를 자주 안아주는데
지금의 나는 과거의 나를 안아주지 못하고 계속 떠밀고만 있었다...
아주 많이 늦었지만....
지금이라도 꼭... 안아줘야만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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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의 유산은 계승이 목적입니다. 저와 함께 '엄마의 유산2'를 이어가실 엄마작가(초보자라도 상관없습니다.)들, '아빠의 유산'을 써주실 아빠작가님들을 기다립니다.[작가에게 제안하기]로 메일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