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성'의 이면
본 브런치북은 '나는 나의 장난감이며 나의 인생은 내 임상실험장'이라는 본질에 맞게 나 스스로 지금껏 내가 내려놓지도, 잘 다루지도, 그렇다고 제대로 써먹지도 못하는 나의 감정들을 파악, 분석, 분류, 연계, 추출, 혼합, 용해를 시도하는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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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의도에 다시 촛불이 켜졌다.
한사람 한사람, 개인의 힘은 미약할지 모르지만
다수의 인간이 단결하면 죽음도 불사하고 돌진의 힘도 커진다.
다시 모인 하나하나의 촛불은 우리 각자가 사회에 예속된 한 주체자로서
자신의 결정에 대한 반성에 스스로를 심판하고 있는 뜨거움인지도 모르겠다.
개인은 설사 그것이 무슨 일이든, 언제나 자기가 반성이라는 것때문에 예속하지 않을 수 없는 하나의 추상물에 속하고 있다는 것을 자각하지 않을 수 없다(주).
이렇게 모인 한사람한사람은 인류애나 애국심, 자선, 또 자기비밀과 같은 목적에 도달하기 위한 스스로의 어떤 반성때문에 모두 같은 곳으로 발걸음을 옮겼을 것이다. 동기와 의도에 차이는 있을지 몰라도 분명한 것은 각자의 자각에 의한 의지가 집결되었고 개인의 소망은 그저 소망일지 모르지만 다수의 소망은 민심이자 천심으로 창대해지고 있다는 것이다.
사람의 마음을 얻어 천지의 부름에 응하는 것이 정치일텐데 지각없는 판단과 발언, 이에 대한 알맹이없는 반성과 사과에 우롱당한 민심은 이 우메하기 그지없는 자에게 촛불을 통해 명확히 전하고자 하는 분명한 의지가 있는 것이다. 다수를 자발적으로 모이게 한 힘의 강도는 천심무서운 줄 모르고 내뱉은 판단과 발언, 반성없는 사과의 강도와 비례한다. 우매하다는 표현조차도 사치스러운 경지를 우리는 사실로서 직시하고 있다.
사람의 마음을 얻는 것은 지배욕이 아니라 섬김이어야 한다. 위가 아니라 아래여야 한다. 혹여 이를 모르는 누군가가 나타날까봐 이 진리를 극명하게 보여주는 영웅이 우리 앞에 나타났으니 이를 고맙다고 해야 할지... 이렇게까지 직접 보여주지 않아도 되는데 뭐하는 짓이냐고 혼구녕을 내야 할지...
영웅이 되기 위해 아주 값비싼 대가를 치르고 그 자리에 올랐다고 치자.
그리고는 영웅으로서의 자리에서 부여받은 모든 권력과 비리와 협작,
게다가 언제든 자신을 위해 목숨바칠 충견 몇마리까지 동원하여 보다 쉽게 그 자리를 지킬 수도 있다고 치자. 하지만 소수를 잠깐동안 농락하거나 부릴 수 있을지는 몰라도 다수는 어림없다.
이 조차도 모르는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고(至高, 더할 수 없이 높은)에 존재하는 가치까지 손에 넣을 수는 없다'는 사실을 망각한, '우매'조차 사치가 된 인간은 자기답게 반성하고 사과한다.
이 때의 반성은
매맞기 싫어서, 몇 대 덜 맞으려고, 조금 덜 아프게 맞으려는 수작을 너머
과도한 열망은 멸망만이 갈길이라는 사실을 증명한 행위이며,
스스로 자신의 멸망이라는 증표에 사인을 한 셈이다.
마음을 바꾸는 것은 광야에 길을 내는 것만큼 어려운 일이다.
마음을 바꾸지 않은 '반성'은 '반성적 사고'에 길들여지는 함정에 스스로를 빠뜨린다.
바뀐 것은 없는데 반성만 일삼는...
'반성'으로 자신의 과오나 오류에 정당한 대가를 치렀다는 착각의 함정.
그리고 그렇게 '반성하는 인간'은 '반성의 참의미'를 제대로 알려주기 위한 하나의 나쁜 사례로서 적합하게 쓰일 뿐이다.
우리가 어려서부터 '반성적 사고'를 교육의 중요한 덕목으로 삼는 데에는
'반성해야 할'일을 미리 알고 처신하길 바래서이고,
혹여 모르고 저지른 잘못에 대한 '반성'이후의 '자각'과 '변화'를 위함이지
'반성에 길들여져 반성을 행위의 마침표'로 삼는 행위를 가르치기 위해서는 아닐 것이다.
심지어, 지금처럼 높은 의식수준에서 자행한 '반성의 자각'으로 스스로 집결하는 '행위'를 이끈 동력제공자처럼 '반성이 오히려 죄값을 보태는 인간사례' 하나를 양산하기 위해서는 더더욱 아닐 것이다.
반성은 마음을 바꾼 행위를 전제해야지 반성자체가 행위의 결론이어서는 안된다.
반성은 과오를 계기로 사유의 다리가 되어야지 반성자체가 사유의 질료여서는 안된다.
반성은 내용자체의 변화를 요구하는 것이지 내용물은 그대로 둔채 눈속임용 포장으로 사용해서는 안된다.
반성은 시간과 함께 결과로서 진정성이 증명되는 것이지 더 기가막힌 의도를 품은 당장의 우회도로여서는 안된다.
반성은 화려한 제스츄어나 화술로 상대의 눈과 귀를 향하는 것이 아니라 언어의 실체에 담긴 '비언어'로 상대의 심장을 향해 전달된다.
게다가
'반성'은 '행위'의 변화를 동반하지 않으면
더 커다란 '반성할 꺼리'를 몰고 자기 인생에 다시 찾아온다.
가슴아픈 실화가 있다.
가까운 지인이 직접 나눈 대화이기에 내겐 커다란 울림이었다.
세월호 사건으로 딸을 잃은 아버지가 지인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내 딸을 죽인 것은 나였다. 삼풍백화점이 무너졌을 때 나와 내가 아는 어떤 누구도 피해를 입지 않았다. 나는 다행이라 여기면서 마음으로 아주 안타까워했다. 하지만 안타까워만 했다. 그리고 오늘 우리 딸이 죽었다."
깊은 의미를 담은 이 짧은 몇마디가
정치외교는 불안정하고
국교와 국가철학(國家哲學)이 무너져가는 것을 느끼고
시민의 불안과 황망이 최고치를 향하고 있는 지금...
나에게 던진 메세지는 크다.
'시대의 요구'에 조금 더 앞으로 고개를 내밀어야 하지 않을까....
'시대적 증표'로서 나는 지금 여기서 무엇이라도 해야 하지 않을까...
'시대의 과오'를 안고 살아가는 우리 기성세대처럼 지금 청년들의 가슴에 사상의 아픔, 불의의 역사를 남겨주어서는 안되지 않을까...
옳음을 식별해낼 시야와
옳음을 판단해낼 정신과
옳음으로 두 다리를 옮길 수 있는 신체를 위해 민감하게 깨어있어야 하지 않을까...
아마 나와 같은 기성세대들이 여럿 있지 않을까 싶은데..
지금 내가 뭘 할 수 있을까. 내가 한다고 뭐가 바뀔까... 하며 예고된 반성을 만나기 싫어 내 집을 떠나 허름한 숙소로 터를 옮긴 것처럼 자아를 떠나 방황하는 그런 심정을 가진 이들... 감히 나의 자아가 열망하는 그것대로 자신이 움직였을 때 남겨질 상처가 두려워 자아를 당분간 떠나있는 게 낫겠다고 판단한 이들... 어떤 변화라도 생기면 그 땐 가만히 있지 않겠다며 조야한 자신을 애써 달래는 이들...
지금 여기서...
나는 무엇을 어떻게 해야할 것인가...
주> 키에르케고르선집, 집문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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