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목골.
내가 사는 골짜기 이름.
나는 오목골의 가장 윗쪽에 산다.
길에서 우리집을 올라가려면 꽤 가파른 비탈을 올라야 한다. 자전거가 교통수단인 나는 비탈앞에서 내려 엉덩이를 뒤로 쭉 빼고 팔을 앞으로 쭉 뻗고 상체를 자전거에 살포시 기대어 천천히 비탈을 오른다
짧다고 가파른 길이 힘들지 않은 것은 아니다.
하지만 가파르다고 힘든 것만도 아니다.
내가 지은 이 짧지만 가파른 비탈의 이름이다. 비탈이 시작되는 곳은 3마리의, 아직도 아가티를 벗지 못한. 너무 귀여운 고양이들의 영역이다. 꼭 3마리가 같이 다니는데 녀석들도 나를 아는지, 내가 자전거를 타고 등장하면 어디선가 쪼로록~~~ 나와서 힐끔거리며 나를 본다. 그래서 3마리의 고양이고개. 삼냥재라 이름지었다.
설재.
처음에는 이 비탈을 오를 때마다 내 혀가 헥헥거려서 설(舌)재.
밀리재.
자전거를 타고 올라가려는데 뒤로 밀린다고 밀리재.
그렇게 처음엔 이름지었다가 지금은 삼냥재.
삼냥재로 정해서 그리 부른다.
희한하다. 이름이란 규정이다. 어떻게 규정하고 그것을 대하는지에 따라 내 모든 감각은 '규정된 그것'에 따르고 있었다. 설재였을 때는 비탈을 마주할 때부터 버거웠다. 그런데 삼량재로 이름을 바꾸니 비탈을 마주할 때부터 설레인다. '치즈야~~' 하면서.
3녀석 중에는 항상 치즈(노란아이)가 가장 용감하다. 늘 선두에 있고 고등어(고등어무늬아이)녀석 2마리는 치즈 뒤를 졸졸 따른다. 어디에나 앞장서는 녀석이 있고 뒤따르는 녀석이 있고 혼자 노는 녀석이 있고 같이 놀자는 녀석이 있다. 중요한 것은 늘 3녀석이 함께 다닌다는 것이다. 누가 앞에 서고 누가 뒤따르느냐보다 '항상 함께'여야 온전체가 된다는 것을 이 어린 냥이들도 아나보다. 생명의 본능이란.....
사람이든 사물이든 사태든 모든 것은 '이름'을 갖기 전, 그 이름으로 불리우기 전의 본질이 있다.
그 현상과 형상을 대하면서 내 정신이 무언가로 규정짓고,
규정이 명명이 되어
명명된 그 자체로서 그 대상은 내게 각인된다.
모든 것은 그렇게 '이름'을 부여받는다.
본질은... 이름속에 숨어 신비로운 힘을 내게 준다.
신비로움이 사라지는 순간, 모든 것은 힘을 잃어 힘겨워진다.
사물 속에서 사물이 품은 본질을 찾고 그것이 내게 주는 느낌을 품고 느낌에 활자를 입혀
'이름가진' 그것은 내게 그 '이름만큼'의 가치로 다가온다.
심지주/강물원.
2014년. 나 스스로 개명한 이름이다.
심지를 지니고 물처럼 흐름대로 산다는 의미를 나에게 부여하면서 나는 나를 바라보고 나의 삶의 어떤 판단이 필요할 때마다 내 이름 석자를 기준삼는다. 나로서 나의 삶위에 존재하는 것. 중심에 반듯하게 서서 세상의 흐름에 순응하는 것... 내가 부여한 나, 나의 인생의 가치는... 그렇게 세상에 나로써 잘 쓰이는 것이다.
나를 나보다 더 잘 아는 나의 지인께서 지어주신 필명이다.
지담(智談) : 지혜이야기. 경영학에서도 국내최초로 지혜를 연구하고 내가 하는 모든 활동에는 지혜가 중심이 되어야 한다는 의미와
지담(至橝) : 처마에 이르다. 눈과 비를 막고 햇빛이 들어오는 양을 조절하며 하늘을 향한 처마처럼 나의 뜻이 그 길을 향하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규정되어 명명되었다는 것은 그만한 삶의 가치로 그와 같은 방향을 향하도록 삶을 이끌 힘이 주어졌음을 의미한다. 가파른 비탈이 힘이 들긴 하지만 본질을 담은 이름을 부여함으로써 결코 힘들지 않은, 어쩌면 신체의 힘보다 가치의 힘이 더 우세하다는 것을 매 순간 느끼게 해주는 합리를 너머 공리의, 공리를 너머 신비의 힘을 지니는 것처럼.
명명된다는 것, '이름'을 갖는다는 것은 그런 것이다.
그렇게 두집을 지나면 우리집이 보인다.
처음 9/20일에 이사왔을 땐 우리집이 안보였다.
10년이상 방치된 집이라 입주청소를 대대적으로 의뢰했는데 도착시간이 다 되어 "선생님, 여기 집이 없어요!"하면서 전화가 왔을 정도니까. 심지어 여기 이사와서 내가 살고 있는데도 '거기 집이 있었어?'라고 묻는 원주민들도 꽤 여럿이었으니까.
그렇게
밀림처럼 파묻힌 집에
나 역시 '파묻히러' 온 것이다.
이 곳이 어디쯤인지, 이 마을이 어떤 마을인지, 이 집에서 사는 여건은 어떠할지
전혀 고려하지 않고 느닷없이 이 곳에 터를 잡았다.
왜? 라고 묻는다면 음...
"그냥."(흐름대로)
그리고
"아주 명확했던 몇가지 판단".(심지, 중심)
거주지와 내 서재겸 연구실이 중정을 사이에 두고 분리되어 있고 내가 좋아하는 통, 창, 숲이 갖춰져 있고, 심지어 층고도 4m나 되도록 높은데다 목재가 아닌 콩크리트주택이며 양옆으로 집이 들어설 수 없고 집이 바라보는 방향은 아무 걸림이 없이 탁 트이고 오른쪽으로는 내(川)가, 뒤로는 산이, 그렇게 이 세상에 '고립'과 '고요'외에는 아무 것도 존재하지 않아 '파묻히기'에 딱 좋은 조건, 나머지는 살면서 내가 바꿀 수 있는 것들이었기 때문이다.
직접 바꿀 수 있는 것들은 죄다 바꾸었다. 본 브런치북은 낡은 집을 변화시키는 것과 함께 낡은 나의 변화를 담고 있다. 이 집의 변화과정은 본 글에 다 담겨 있으니 생략하겠지만 처음과 지금 - 물론 지금이 겨울이라 잠시 집의 변화는 봄으로 미루고 있지만 - 은 완벽하게 다르다.
처음 집으로 올라가는 길은 겨우 승용차 한대가 지나갈까 말까했고 하늘은 온통 우거진 나무로 뒤덮였었는데 지금은 5톤 트럭도 지나갈 정도로 넓어졌다. 공사를 한 것이 아니라 몇년간 쌓인 흙과 부식물들을 걷어내니 본연의 길이 드러났다. 게다가 얼마전 면사무소에서 위험목까지 제거해주어 하늘길도 열렸다.
무엇이든 거두면 드러난다....
가장 버라이어티한 변화는 마당이다.
보기에도 귀신나올 것 같은 집이 지금은
이 곳에서 나고 자란 분들도 '역시 집에는 주인이 따로 있다더니' 하며 혀를 내두를 정도로
넓고 해도 잘 드는, 매일 태양배웅까지 넉넉하게 맞을 수 있는,
아들이 드론을 맘껏 날려도 전혀 방해가 없는 하늘을 가진 터가 되었다.
브런치북에 여러번 쓰긴 했지만 매일 나무베고, 풀베고, 흙파고.
비약인지는 모르겠지만 매일매일이 우공이산(주1)의 마음이었다.
사실 두어달의 강도높은 노동에는 낡은 나를 변화시키고자 하는 의지도 한몫했다. 평생 육체노동이란 걸 모르고 산 나에게 '내 삶을 좀 더 진지하게 살아보고자... 본질에 딱 붙여서 삶을 살아보고자' 하는 시도의 시작이라 해도 무방하리라.
사람을 사서 돈주고 만든 것이 아니라 손수(물론 주변남자들을 좀 괴롭히긴 했지만) 이렇게 만들었다는 것을 내 역사에 남길 수 있게 되었다는 뿌듯함도 있다. 새벽독서와 글쓰는 시간외에는 모조리 낡은 집을 바꾸는 놀이에 흠뻑 빠졌었던, 그렇게 내 정신도 함께 변화가 시작된 지난 가을이었다.
나무를 베고 흙을 파내며 드러나는 돌들, 그리고 짜짜짠~~~~ 여기에 이런 보석이... 숨어있을 줄이야... 마당끝의 연못. 그리고 연못가의 거대한 반석. 겨울이라 연못에 물을 대지는 않았지만 가려진 곳이 하나씩 드러나면서, 마구 여기저기로 경계를 만들었던 돌들을 하나씩 치우고 옮겨서 다시 자리를 잡아가면서 나의 정신도, 나의 근육도, 나의 삶도... 하나의 거대한 그림으로 그려지기 시작했다...
나의 지난 가을, 9월 말부터 11월 초까지의 시간은...
흙으로 풀로, 나무로 뒤덮혔던 마당이 자체의 모습을 드러내듯
나 역시 인식으로, 관념으로, 아집으로 덮혔던 나. 라는 본질을 서서히 드러낸...
내 인생의 거대한 혁명... 내 이성의 역사, 내 삶의 역사에 당당히 기록될 수 있는 하루하루였던 것만은 틀림없다.
이렇게 손수...하나씩... 만들어간 노동의 시간은...
이 터가 내게 무엇을 알려주려 했는지 서서히 알아가게끔 날 이끌었다.
아무리 쌓였더라도,
아무리 덮였더라도,
아무리 엉켰더라도,
아무리 박혔더라도...
다 변화시킬 수 있다고.
그러니... 그저 매일매일...
해야할 것들을 하면 된다고...
매일 어깨며 팔이며 손가락이며 진짜 아팠지만(죽을만큼은 아니었다.) 난 지금껏 겪어보지 않았던 신체노동의 수준높은 강도를 대가로 치르면서 '사람들에게 가장 어려운 노동(주2)'이라는 정신노동을 보상으로 얻었다.
인생에서 위대한 일을 달성한 사람들은 남녀를 막론하고 모두 생각하고 상상하여 꿈을 실현할 능력을 가진 사람들(주2)이다.
내가 치른 신체노동에 비해 너무 큰 것을 얻었다. 어쩌면 낡은 집의 변화보다 내 낡은 정신이 더 빠르게 변화되었는지도 모르겠다.
맘껏 읽고 맘껏 쓰고 맘껏 사유하며 살자.
이 곳은 그런 곳이다.
그래서,
안방쪽으로 나있는 작은 테라스는 농구공만한 말벌집이 두개나 천정에 떡하니 매달려 있어서 (지금은 제거했지만) 봉정(蜂庭).
주방쪽으로 난 테라스는 밤나무가 테라스쪽으로 늘어져 있어서 율정(栗庭).
나만의 서재(연구실)과 거주지사이, 중정의 연못은 건지(建池, 세울못)
: 서재에서 읽고 배우며 지식을 습득하고
저 마당까지 걸.어.서. 도착한 곳의 연못은 율지(律池, 따질못)
: 따져라, 토론하라, 비판하여 이치를 깨달아 자기만의 사상으로 만들어라.
이 과정은 몸을 움직여 실천이 되어야만 가능한 곳이리라.
이름....을 갖는다는 것은
존재....에 실체를 입혔다는 것이다.
실체입은 존재는 이름을 갖기 전부터 지닌 자기가치를 현실에서 구현해야 할 의미를 요구받는다.
이름...을 부여한다는 것은
존재...의 본질을 들여다보는 시력을 가졌다는 것이다.
이름을 갖기 전의 존재, 그러니까, '이름없는 그것'으로서의 본질적 힘을 지켜낼 수 있도록 허용, 허락까지를 부여해야 한다.
꽃에서 장미, 철쭉, 무궁화, 국화, 수국, 히야신스...
산에서 백두산, 한라산, 태백산, 남산, 관악산, 구룡산...
강에서 한강, 낙동강, 금강, 섬진강, 영산강...
사람에서 홍길동, 강감찬, 을지문덕, 신사임당...
집에서 세울못, 따질못, 율정, 봉정...
덩어리에서 이름을 부여받는 것은
전체에서 독립된 하나가 되는 것이며
독립된 개체인데 전체가 되는 것이다.
나도 그렇고 이 터도 그렇다.
파묻혀 있던 터가 드러나며 나로부터 이름을 부여받았다.
파묻히러 온 나는 세상으로부터 어떤 이름을 부여받을까...
내가 부여한 이름이 주원.
날 나보다 더 잘 아는 이가 부여해준 이름은 지담.
그리고..
낡은 나를 변화시켜 매일이 새로운 내가 되면... 세상은 내게 어떤 이름을 부여할까...
18일, 브런치작가와 독자들의 모임에는 '위대한 시간'이라는 이름을 부여했다.
한사람한사람은 무한하게 광활한 우주를 품은 위대한 생명이다.
이러한 자신을 깨닫고 실천으로 끄집어내는 시간.
이 시간을 삼량이들처럼 함께 한다면
분명 우리의 시간도, 미래도, 위대해질 것이기에...
하나가 전체이며 전체가 하나가 될 것이기에...
주1> 우공이산 : 우공(愚公)이라는 노인이 높은 산때문에 왕래에 불편을 겪자 삽으로 산을 퍼서 옮기기로 했다. 1년 동안 묵묵히 산을 옮긴 우공의 노력과 믿음, 끊임없는 열정이 옥황상제를 감응시켜 도저히 불가능해 보였던 일을 성취시킨 것이다. 우공(愚公)의 유명한 말, "나는 늙었지만 나에게는 자식과 손자가 있고, 그들이 자자손손 대를 이어나갈 것이다. 하지만 산은 불어나지 않을 것이니, 대를 이어 일을 해나가다 보면 언젠가는 산이 깎여 평평하게 될 날이 오겠지."
주2> 마음먹은대로 된다, 찰스해낼, 뜻이 있는 사람들
[지담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