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도 태양은 하늘에 구멍을 냈다.
온통 구름으로 덮여 낮인데도 어두컴컴...
눈은 꽝꽝 얼뻔했는데
태양이 얼마나 찔러대고 얼마나 찢어댔는지, 하늘에 구멍이 났다.
그 사이로 강렬하게 자신을 내리꽂는 태양....
이 강렬한 의지에
땅위의 눈, 눈위의 햇살...
눈은 곧 사라질 자신의 운명을 예감하며 모든 힘을 다해 반짝이고
땅은 곧 드러낼 자신의 채비를 서두르며 눈이 맘껏 자기를 다 뽐낼때까지 기다리고
나는 정신없이 꼬리치는 강아지마냥 여기서 찰칵 저기서 찰칵 너무 반가워 헤헤호호거리고.
태양과 땅의 연합...
가장 먼 거리지만
가장 빠른 결속으로 세상의 모든 생명을 자극한다.
그 생명가운데 하나가 나다.
그래서 나도 태양이 땅과 연합할 때 얼른 이들과 손을 잡는다.
나도 끼워달라고.
시골에 온지 3개월하고 5일이 지났다.
크리스마스분위기는 전혀 없다.
매일이 고요하고 평온하고 조용하고...
똑같다...
나의 크리스마스도 매년 똑같이 고요하고 평온하고 조용하다...
새벽독서를 시작하고부터 내 가슴에 고요히..유유히..서서히 다가온 것이 '태양'이었다.
그래서 나의 오래된 새벽습관가운데 하나가 '태양마중'이다.
매일 내게 오는 태양을 그냥 받기만 하니 미안해서 마중이라도 나가자 싶어 '태양마중'이라는 나만의 의식을 치른다. 그리고 여기 시골에 와서는 '태양배웅'이라는 매일매일의 파티도 혼자 즐긴다. 하루의 즙까지 모두 뽑아쓴 날은 하늘이 붉게 물드는 이 배웅의 시간이 날 책상에서 벌떡 일으켜세우는 신호이기도 하다.
잘했다, 수고했다, 오늘도 이만큼 널 사랑했다고 말하며 태양은 그렇게 '내일 또 만나자'고.
잘했다, 수고했다, 오늘은 더 고맙고 더 사랑했다고 말하며 나는 그렇게 '내일 또 마중나갈께'한다.
자신의 존재위에 올곧게 선 태양은 어떤 조건, 어떤 시간이라도 자신을 드러낸다.
제 아무리 시커먼 먹구름일지라도 어림없다.
태양은 구름을 찢어, 벌려 자기를 내비친다.
눈이 온 날은 더하다.
자신이 조금이라도 역할에 소홀해 온땅이 얼어붙으면 큰일이라도 날 것처럼
태양은 구름을 헤집고 작은 틈새라도 만들어 어떻게든 땅으로 자신을 내리꽂는다.
나는... 태양의 이런 놀이를 나와의 숨박꼭질처럼 여긴다.
날 찾으려 그렇게 애닳아하는 듯해서 우습지만 나무뒤에 숨는 날도 있다.
어쩔 수 없는 신의 장난에 가슴아픈 이별을 앞둔 연인처럼 태양줄기는 땅길과 손끝이라도 닿아야 하나보다.
그렇게
작은 한줄기 빛으로라도 자신의 존재가 거기에 있음을 땅에, 내게 알려야 하나보다.
오로지 홀로...
자기 역할에 한치의 빈틈도 허용치 않는다.
세상을 향한 맹목적인 충성과 순종...
그러니 나도 고독 속에서...
내 역할에 한치의 빈틈도 허용치 말라고, 세상을 향해 순종하라고...
자기 존재 위에 자기를 세워두고
자기 존재 위해 자기를 드러내며
자기 존재 아래 자기를 들어내는
그렇게 '홀로' 철저하게 자기존재가 되고야 마는...
과시가 아니다.
충실이며 책임이며 순종이다.
오로지 자신으로 채워진 자기로서
오로지 자신만이 해야하는 자기역할에
오로지 자기답게 자기존재를 드러내는 것...
그렇게...
'아니오'라 답하지 못하고 '예'라고만 답해야 하는 자기존재로서의 숙명...
다같은 곡식이지만
어떤 것은 쭉정이가,
어떤 것은 알곡이 된다.
두 벌이 같은 곳에서 같은 먹이를 먹어도
이 벌은 침을 만들고, 저 벌은 꿀을 만든다.
두 사슴이 같은 풀과 물을 먹어도
이 사슴은 배설물을, 저 사슴은 순수한 사향을 만든다.
두 갈대가 같은 물을 먹어도
이 갈대는 텅 비어 있고, 저 갈대는 설탕으로 가득 찬다(주).
같은 환경, 같은 모양새라도 어떤 것은 이렇게, 어떤 것은 저렇게 자기존재를 만들어간다. 구별조차 힘든 미세함이 위대한 차이를 만드는 것은 영혼의 섬세함, 의식의 질이 달라서다. 천가지, 만가지 이유와 항변이 존재한들 현실에 지나치게 깨어있는 것이 의식을 잠재우는 우둔한 짓임을 아는 자가 깨어있는 자다.
어떤 경우라도 자기를, 자기의 위대한 힘을, 자기 스스로에 대한 확신을 1순위에 둔다면
그것이 자기 존재 위에 자신을 세워낸 증거이리라.
하지만
현실에 너무 눈이 밝아 포착된 무언가에 자기를, 자기의 위대한 힘을, 자기에 대한 확신을 2순위로 미룬다면
그것은 온전히 자기로서 자신을 세우지 못했음에 대한 증거이리라.
그러니...
눈감고 귀닫고 입막고...
그렇게...
하얀 눈이 온 세상을 얼어붙게 하더라도...
먹구름이 자기 앞을 막아도...
반짝이는 것들이 자취를 감출때까지의 인고의 시간이 길어도...
그저 가는 한줄기빛으로라도 세상이 내게 묻고 그저 '예'하며 따를 수밖에 없는 그것을 1순위에 두는 것.
시골에선 늘 보아왔던 것에서 특별함이 보인다.
시골에선 늘 바래왔던 것이 느닷없이 눈앞에 나타난다.
시골에선 늘 당연하던 것이 더없이 소중해진다.
시골에선 늘 특별했던 것이 아무 소용도 없어진다.
시골에선 늘 대화하던 사람말고 자연과 친교를 나누는 대화가 가능하다.
시골에선 한결같은 고요 속에...
어렴풋하지만...
나만의 존재를 느낄 수, 지킬 수, 쌓을 수, 키울 수 있을 것도 같다...
지금 크리스마스 새벽 4시 36분.
나는 오늘도 어김없이 이 자리에 앉아 있다.
태양은 오늘도 어김없이 채비를 하고 있겠지
잠시 후 내가 마중나갈 것을 알기에 결코 날 혼자 기다리게 하지 않겠지.
나도 채비를 서두르는 이 시간을 알기에 결코 늑장부리지 않는다.
잠시 후 우리는 인사하겠지
주> 루미시집, 루미, 시공사
2년여전 처음 연재를 시작한 [엄마의 유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