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 종일 책상에 앉아 있는 나는
한순간 튕기듯 몸을 일으켜 밖으로 날 내보낸다.
계속 같은 자세를 고수했던
내 신체는 활기와 열기와 생동감이 힘을 잃을 것 같으니 얼른 밖으로 내보내달라 날 보채고
내 정신은 있는 걸 다 뽑아냈으니 관념의 쭉정이들을 얼른 털어달라 다그치고
내 감각은 이러다 메말라 버릴지도 모르니 풋풋한 향과 소리와 볼거리에 자신을 데려다 놓으라 서두른다.
짧지만 무척 분주하게 움직여야 할 시간이다.
심정에 쫒겨서다.
안감이 두툼한 트레이닝바지를 껴입고 넓고 긴 목도리는 두바퀴 돌려 목에서 턱까지 칭칭감고 아이들이 입다가 작아진, 하지만 내 덩치보다는 큰 패딩점퍼의 긴 지퍼를 아래에서 위까지 꼼꼼하게 채우고 그 위에 장갑을 끼고 귀까지 덮히는 모자에 발목까지 감싸는 부츠를 신는다.
도시에서는 제 아무리 겨울이라도 이렇게 나를 싸매지 않았다. 적당히 갖춰입고 나가도 바로바로 차에 오르고 건물에 들어가니까 언제든 가볍게 입고 벗을 수 있을 정도면 충분했다.
하지만 여기서는
불필요했던 많은 것들이 필요가 되었고
필요했던 많은 것들이 불필요가 되었다.
환경은 필요의 우선순위를 내 허락없이 바꿔버린다.
가슴에 품은 뜻이
필요했던 많은 것들을 놓아버릴 체념으로 이끌었다.
이 체념은 후회나 미련, 결핍이 아니라
새로운 걸음을 위한 희망이기에 또 다른 소유, 지금껏 가져보지 못한 힘으로 이어진다.
그렇게 두 눈만 덩그러니 노출하고선 신체와 정신과 감각에 떠밀려 날 바깥으로 내몰면
그 때부터는 마치 접시돌리기같다.
일단 돌아가면 어떤 힘을 가하지 않아도 저절로 접시가 도는 것처럼 이 시간은
내 몸이 요구하는 방향대로, 속도대로
나는 내 몸의 하녀가 되고
보이는 모든 것은 내가 털어낼 관념과 내가 뿜어낼 활기와 내가 요구하는 감각의 시중을 받들며
저절로 몸이 길위를 흐른다.
아직 돌아갈 때가 아니라 판단한 하얀눈은
들판의 주인이었던 곡물줄기에게 성글지만 군데군데 숨쉴 자리를 양보하고
양보의 미덕을 눈치챈 배고픈 까마귀떼는 축축한 곡물줄기 언저리에서 미처 사람이 거두지 못한 쭉정이라도 먹어치우겠다 땅에 부리를 박아대고
한시적으로만 시간이 허락된 고드름은 자기만큼 시한부 운명을 부여받은 굴뚝연기와 마주한 채
유피테르가 겨울을 몇 번 더 내줄지(주1) 이번 겨울이 끝일지...
그저 묻지 말고,
이번 생의 끝까지 있는 힘 다 쏟고
나는 땅으로, 너는 하늘로 그렇게 묻지 말고 가자 한다.
이미 눈이 떠난 메마른 땅은
눈밑에 깔려버린 친구들을 하염없이 기다리기 지루한지,
친구가 없어 외로운지,
한 때 자기품에서 키워냈지만 이제 보내야할 운명들을 서둘러 보내려는지,
끝까지 자기가 있을 곳은 여기라며 나뭇가지에 매달려보지만
생명의 끝은 땅으로 돌아가는 것임을 뒤늦게 깨달은...
미련과 연민이 깊어 제때 자리를 뜨지 못해
느즈막하게 땅위에 살포시 내려앉은 낙엽들을 품으로 끌어안는다.
이렇게 오랫동안 앉아있다가 밖으로 튕겨나간 내 정신과 감각에게는
깊이 오래, 어렵게 탐구하기보다 즉각적으로 필요한, 요구한 것들을 채워대는 안이함이,
그저 자극에만 반응하며 사색으로 흘려보내도 괜찮은 안정감이 오히려 적격이다.
산보의 시간은 이 정도의 밀도로도 충분하다.
시골생활에서 산보를 빼면 삭막이 쌓인다.
시골에서의 충분 = X+산보.
시골생활에서 산보는 충족이유율에 의한 필요충분조건인 것이다.
남들 눈에 지겹고 어려울 것이라고만 보이는
강제된 자발적 칩거가
내게는 가장 편하고 쉬운 삶이라는 것을 느낀다.
나의 신비스러운 상상이...
나와 자연, 아무런 경계가 없는 이 공간 어딘가에서 자신을 들켜버린 채...
깊이가 아니라 그저 그렇게 눈길 한번 준 것에 즉각적으로 응답을 보내오는...
혹여 그 응답을 내가 잘못 해석한들 무한정의 해석이 존재하는 자연이기에 어떤 것도 오답일리 없고 어떤 것도 해답에서 벗어나지 않는 안정감...
스스로 할당한 노동과 다투지 않고 맘대로 파업과 태업을 일삼아도 삶에 지장을 주지 않는...
게으르고 또 게을러야 오히려 더 타당이 되는...
나만의 산보 시간.
나는 이 시골에서의 생활이 참으로 좋다.
어떤 때엔 이 평안함이 의심스러워 '내가 진짜 이 곳에 사는 게 맞나?'싶을 정도다.
이 곳외엔 굳이 더 평안한 낙원을 바랄 필요가 없는, 바라면 과욕에 대한 벌금을 물어야 할 것 같다.
이같은 평온을 내가 누려도 될까? 과욕이 아닐까? 살짝 우려도 됐지만
하늘의 호의를 무시하는 것자체도 시건방진 처사인 듯해 감사히 받기로 한다.
와인과 브랜디의 맛 때문에 물에 대한 사랑을 잃게 된다면 그 사람은 얼마나 불행한가?(주2)
많이, 크게, 자주 원했던 소유로부터 해방된 자유.
하루에 산보를 들이는 것만으로,
산보가 내게 주는 즉흥적인 감각만으로
내 일상, 하루, 삶의 알곡들이... 충분히 쌓여가고 있음을 느낀다.
이렇게 흐르는 시간이,
이렇게 쌓이는 정신이,
이렇게 열리는 감각이,
이렇게 담기는 감정이...
내 삶을, 내 인생을, 내 글을... 하나의 길로 인도할 것을 믿는다.
그러니,
내가 내게 할당한 구속과
구속이 내게 선물한 자유와
자유가 내게 허락한 한계를 나는 마음껏 넘나들어보리라.
오랜만에, 오래전에, 오랫동안 내 눈물을 진하게 뽑아냈던 가사,
god의 '길'을 들어야겠다.
그렇게...
뜻이 길을 내어준다는 믿음으로 다시 눈물을 흘려야겠다.
조용한 새벽... 눈을 감고... 모든 감각을 닫은 채
가사만을 가슴으로 담아봐야겠다...
https://youtu.be/PWmfn3agzrU?si=3gTpKO90SPJ_Iv-B
내가 가는 이 길이 어디로 데려가는지 알 수 없지만 난 걸어가고 있네.
나는 왜 이 길에 서 있는지, 이게 정말 나의 길인지, 이 길의 끝에서 내 꿈은 이뤄질까.
자신있게 나의 길이라 말하고 싶고 그렇게 믿고 돌아보지도, 후회하지도 않으며 걷고 싶지만
난 아직 자신이 없네.
나는 왜 이 길에 서 있나
이 길의 끝에서 내 꿈은 이뤄질까
그 꿈을 이루면 난 웃을 수 있을까...(주3)
뜻이 있는,
뜻을 믿는,
뜻을 지닌,
뜻에 자신을 맡겨볼 작가와 독자들은 오십시오.
어여 오십시오.
책과 글이 좋아, 책과 글과 함께 살고픈 이들
어여 오십시오.
=> https://guhnyulwon.com/invite-20250118
==> https://brunch.co.kr/@fd2810bf17474ff/1273
주1> 유피테르 : 로마 신화의 최고신(最高神). '주피터'는 영어 발음으로 인용한 문장은 호라티우스 '카르페디엠'의 '묻지 마라 아는 것이'의 일부이다.
주2> 헨리데이빗소로우, 소로우의 일기, 도솔
주3> god의 '길' 가사를 필자가 변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