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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루는 이성'을 알려주시는 나의 스승님

by 지담


내겐 결코 거부도, 거역도 할 수 없는 위대한 스승이 계신다.

몽테뉴에게 플루타르코스와 세네카가,

루크레티우스에게 에피쿠로스가 그랬듯이

내게도 내 정신줄을 바짝 차리게 해줄 스승이 여럿 계신다.


몽테뉴는 조곤조곤, 하지만 중간중간 직설적으로 날 혼낸다.

'그처럼 많은 학교에 다니기 때문에

바보가 되는 지각있는 사람들'이라고

내가 미처 깨닫지 못한 나를 들여다보게 한다든가


'입은 옷과 잠자리, 먹는 것과 마실 것은 무엇이든지 보드랍고 맛좋은 것을 물리치고, 무슨 일이든지 당해내도록 길들여라. 예쁘장한 멋쟁이를 만들지 말고 발랄하고 억센 사람이 되어라'면서 내 정신의 중심을 다시 잡게 해준다거나.


몽테뉴가 유난히 탐독했던 세네카 또한 내겐 거부할 수 없는 말씀들을 쏟아낸다.


'공적이든 사적이든 모든 일은 영원한 질서가 이끌어'간다거나

'신은 자신이 가능한 한 고귀해지기를 바라는 자들을 배려해,

무언가 대담하고 용감하게 이룰 수 있는 소재를 준다네.

그러기 위해서는 역경이 필요'하다며 내게 삶을 해석할 수 있는 지혜를 알려준다.

너무 섬세한 강단이 거부할 틈조차 주지 않으니

절로 고개가 숙여지고 자연스레 내 마음은 그 가르침 속으로 들어간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는 너무너무 무서운 스승이시다.

내가 정신을 차리든 안 차리든, 알든 모르든, 일단 그의 앞에 서면

무조건 바지가랭이를 무릎까지 올려리게 된다.

그리고 감사히 종아리에 회초리를 맞는다.

가끔은 오늘 새벽처럼 꿀밤 한대 얻어맞기도 한다.


똑바로 뻗은 이성의 길을 따라가면서

성실하게, 품위있게,

신성한 정신을 언제라도 지켜낸다면

어떤 것도 기대하지 않고 두려워도 않으며 행복해진다면서

나의 이성이 똑바른 길을 가는지 거울앞에 서서 보고 오라고 알려주시는 듯했다.



모든 인간은, 그러니까 나 또한,

'초월적인 나''현실적인 나'

두 존재를 함께 품고 태어났다.


현실적인 나는

'이성'이라는 도구로 '판단'하고 '결정'하고 '행동'한다.

반면, 초월적인 나는

내 안에 심겨진 신탁(神託)을 따라 신성(神性)의 언어로 나를 일깨운다.


신의 부탁, 신탁.

신의 성질, 신성.


나는

신탁(神託)을 지키며

신성(神性)으로 결국,

신성(神聖)한 경험을 나의 삶으로 빚어내는 존재다.



자,

똑바로 뻗은 이성의 길을,

성실하게, 품위있게...


분명 우리는 모두 감각으로 자극받는다.

'아! 이렇게 해볼까?'라며.

분명 느낌은 될 것 같고, 이룰 것 같고, 닿을 것 같다.

그 때 이성은 충분히 감지, 판단했다.

'해보자'고.


하지만, 어떤 상황이 되면,

똑바로 뻗지 못한 이성은

자신도 모르게,

인식과 감정에게 지배당한다.


'과거에 이런 경험이 있는데 되겠어?'

'누가 그러던데 쉬운 게 아니래.'

'안 해봤는데 내가 할 수 있을까?'

'지금은 때가 아닌가?'


외부에서, 내면에서 들리는 온갖 소리들을 거부하지 못한 채 자신을 두려움에 빠뜨리고

불과 얼마 전 자신의 이성이 알려준 길 위에서 자꾸 다리를 전다.

기대도 내가 무너뜨리고

희망도 허상으로 전락시키고

이성의 충복인 의지도 내가 꺾어 버린다.


그리고 보이지 않고 만져지지도 않는 내면의 신성따위는 무시해 버린다.

세상에 존재하는 어떤 힘이라도 나를 막을 수 없는데

내 안에 있는 그 힘을 나부터 믿지 않는다.

그렇게 믿지 못하다가 스스로와 타협하고

자신에게 변명을 늘어놓고

타인에게 절름거리는 이성을 합리화하며

자기정당화에 열을 올린다.


아우렐리우스는 그렇게 내 이성이 똑바른 길을 걷지 못할 때마다 회초리로 날 훈계했다.

몽테뉴는 '몽둥이찜질을 해야 한다'고도 했다.


이성이 똑바로, 성실하게, 품위있게 가고

그 길에

신성의 도움을 받는 것은

현실의 나와 초월의 나를 동시에 움직이는 힘이다.

초월적인 내가 감각으로 전해준 자극을

'이렇게 하면 되겠다.'라며 나의 이성이 판단내리고 움직였다면

내가 내 이성을 파괴해서는 안된다.

그렇다면 두려움따위는 아무 것도 아니다.


결국, 얼마나 단순한가?

될 것 같고, 이룰 것 같은 느낌에

이성이 판단을 내려 행동으로 옮겼다면

거기에 신성의 힘까지 보태어 믿어야 한다.

그리고

사이사이 날 괴롭히는 외적, 내적 소리들을

이성이 물리치도록 힘을 길러

실제로 싸워 이겨야 한다.


그렇게 '이루는 이성'이어야 한다.

자기 자신의 판단을 파괴하는 이성이 아니라

감정을, 외부의 소리를 파괴하는 이성이어야 한다.


여전히 찐따같은 나 스스로를 바라볼 용기.

여전히 뜨거운 감자를 손에 쥐고 먹지도 놓지도 못하지만 과감하게 내던지는 패기.

여전히 미지에 대한 모호함에 겁이 나도 무시해버리는 의지.


나의 이성의 충복들,

용기, 패기, 의지.


이런 충복들을 충분히 훈련시켜 거느리는 나라면

내 안의 신성은 반드시 세상에 존재하는 어떤 힘일지라도

나를 가로막을 수 없는 힘을 내게서 깨어나게 할 것이다.


이성과 신성.

이 둘의 조합과 결합은

바로, 현실의 실체를 이끌어내는 강력한 내면의 무기다.

우리는 이러한

이성과 신성의 결합 정체를

'목표' 그리고 '결과'라고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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