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나는 벌써 1달째 매일매일
브런치에 발행했던 초고들을 '글'답게 고쳐가는 훈련중이다.
말 그대로 '훈련'이다.
사유가 언어로 건너가는 다리 위에서 난 발을 헛디딜까 덜덜 떨고 있다.
내 체험에서 길어올린 사유가 문장이 될 자격이 있을까 하며
부들거리고 있는 것도 같다.
학문의 세계에서
설명과 논리로 살아왔던 사람이
침묵과 여백으로 흔적을 남기는
글을 쓴다....?
그러니,
성에 차지 않아 자꾸만 보태고 또 보탰던 글들이
이제는 보인다.
그래서 내겐,
긴 글에서 군더더기를 제거하며 길이를 줄이고
그 과정에서 뽑아지는 명제나 규정으로 논리를 지어
짧게 다시 써낸다.
일단 글을 만들고
에세이냐 시냐에 따라
감정이나 감각적인 단어로 교체하고
개념은 그 아래로 숨긴다.
힘들고 지친다.
하지만 알아가는 쾌감이 더 크다.
매일 하루 10시간 이상.
난 나를 책상 앞에 붙들어맨다.
이 시간은
내 글의 현위치,
내 사유가 흐르는 지점,
그리고 나와 독자 사이에 내 글이 어떤 매개역할을 하는지를
조금씩 눈치채게 한다.
글에는 개념이 있어야 한다.
메세지 말이다.
내 글에도 있다.
학자로 논문을 주로 썼으니
감정으로 개념이 드러나게 하기 보다
개념을 규정하고 설명하고 이해시키려는 글이 많다.
하지만,
에세이나 시에 있어선 치명적이다.
학문에선 미덕이지만
에세이나 시에선 과잉이다.
학문이 에세이, 수필, 산문, 산문시, 그리고 시가 되려면
개념을 세우지 않고
존재가 흔들린 흔적부터 먼저 드러내는 방식이어야
문학이라 이름할 수 있다.
설명을 할까, 독자를 믿을까에서
순간 멈춰야 하는 자리여야 한다.
의도는 설명없이도 드러나야 하고
의미 역시 논리에 눌리지 않게 독자에게 전해져야 한다.
하지만,
나는 언어의 위험이 여전히 두렵고
독자에 대한 존중감은 아주 두터워서
어떻게든 설명해서 내 글에 대해서는 어떤 독자라도 오독하지 않길 바라는 맘이
많이 앞서 있었음을 발견했다.
사실 철학이나 문학이냐의 경계도 모르고
쟝르의 형식도 분간 못하는 글쓰기 독학생인
나에게서,
이러한 미묘한 차이를 알아내는 것은
모래사장의 모래를 손바닥으로 매만지며 그 감각들 속에서
진짜 잡아내야 할 한알의 모래를 찾는 것이나 다름없다.
논리적으로
이해할 수 있도록 설명하는 글쓰기가 내겐 가장 쉽다.
하지만
시나 에세이, 수필이 지금 내가 쓰는 글이기에
설명과 논리가 전경이 되기보다
체험과 흔적이 그들 위에서 놀게 해야 한다.
독자를 믿지 못하는 내가 오히려 미덥지 못하다.
독자는 결코 가볍지 않다.
수백, 수펀편의 글들을 읽은 독자들은
오히려 얄팍한, 계산된 글에서 눈을 감을 것이다.
흔들리고 질투하고 낮아지고 부끄러워 하는 나의 글에서
어쩌면 더 진한 진심을 느낄 수 있을텐데
나의 두려움의 근원은 어쩌면
글을 배운 적이 없다, 국문과출신도 아니다, 감성적인 글을 써본 적이 없다.
라는 스스로 내세운 한계때문이지 않을까.
글을 잘 쓰려면
글과 독자를 믿는 법부터 다져야겠다.
설명 대신 장면을 택하는 용기여야
논리 대신 흔적을 써내려갈 수 있으니까.
내 사유가 흔들린 흔적에서
독자가 스스로 개념과 의미를 찾아내게 써야 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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