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기론(利己論) - Ch1.
나를 아는 것은 대단한 위력을 지닌다. 나를 알아야 내가 어떤 길을 가야할 지 알 수 있고 그 길 위에서 나를 제대로 활용할 수 있고 나의 삶을 만들어 나갈 수 있다. 나를 안다는 것은 나를 이해하는 것이며 이해차원이어야 나를 개념화하고 규정할 수 있으며 그 때에서야 비로서 나로서의 삶이 가능해진다.
나는 나답게 살고 싶었고 나로써 기능하고 싶었고 나자체로 충만함을 갖고 싶었다.
그래서 ‘나’를 알고 ‘나’를 찾고 ‘나’를 규정하는,
처절하지만 집요한 고통의 쾌락에 날 묶어두었던 것이다.
아니, 묶어둘 수 있었다.
간절하니까.
나는 너무나 내가 궁금했으니까.
이 구속은 자발적 강요였기에 그 어떤 형용사로도 대변될 수 없는
아름답고 찬란한 빛과 같은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고,
지금도 그렇다고 감히 말할 수 있겠다.
각자 너무 다른데 비슷한 삶을 사는 이들. 많은 이들과 의도적 단절을 선언하고 나는 속박을 위해 고립을 택했다. 그제서야 꿈틀대던 정신은 맘껏 시간에 책을 버무리며 자유를 만끽하기 시작하면서 정체된 듯하지만 그 속에서 나는 나의 화학변화를 준비할 수 있었다.
신체의 힘을 뺀 정신은 다채로운 놀이를 만들어냈고
하루종일 책읽고 글쓰고 밥하고 코칭하고 강의하는 단순의 극치인, 너무나 조용한 일상에서
나의 정신은 마음껏 사유의 길을 트고 넓히고 든든하게 만들어내기 위해 지나치게 분주하게 움직여댔다.
살아있음을 수시로 느끼며 조금이라도 더 이 시간을 즐기려
억지로 구겨넣어서라도 죄다 쓰겠다 작정한 듯
시간의 즙까지 짜내어 하루를 삶 속에 꾹꾹 눌러 담았다.
구속과 자유, 정체와 흐름이라는 모순의 극치가 주는 오묘한 하루의 연속이 이제 일상이 된 지금,
나는 내가 선택한, 사유의 삶, 자유의 삶, 정신과 정서가 충만한 삶의 길에 들어선 것을 느낀다.
인식이 차단되고 감각이 열리는,
보이는 것 너머에서 보이지 않는 신호를 감지하는,
초월이라는 단어의 의미가 이런 것이구나 어렴풋하게 경험하는 찰나를 즐기며
인생이란 이렇게 나를 내가 데리고 노는 것이었구나
자유란 이렇게 정신이 주는 쾌락이었구나
삶이란 사유의 길을 따를 때 제 길을 가는구나를 온감각으로 느끼며
나는 어제의 나와 휴전을 선언하고 이제 더 이상 나 자신과 싸우지 않기로 했다.
나를, 내 인생을, 내 삶을 데리고 놀아보는 경험은 처음 놀아보는 장난감에 정신팔리듯, 처음 입어본 실크의 촉감을 느끼듯, 처음 맡아본 향수의 향기를 음미하듯, 처음 바라보는 높고 파란 하늘에 넋을 잃듯 지나간 모든 허무를 보상이라도 하려는 듯 나를 흥분시켰다.
그래서일까.
나는 '버틴다'라는 단어를 사용하지 않게 되었다.
인생은 버티는 것이 아니라 데리고 노는 것이었다.
인생은 삶의 길을 당당하고 재미나게 걷는 것이었다.
인생은 전쟁이 아니라 축제의 장이었던 것이다.
역시 초월은 절제의 후미에 등장한다.
여유는 분주(奔走)와 단짝이며
자유는 구속 끝에 기가 막힌 맛으로 찾아오며
향유는 오감을 너머 육감, 칠감까지 열었을 때 그 진가(眞價)를 즐길 수 있는 것이다.
여유 뒤에 자유가, 자유를 너머 향유의 쾌락을 맛본 경험은 지독한 고립과 철저한 구속이 주는 최고의 보물이리라. 마약보다 강력한 중독효과를 지닌 지적 향유의 향연은 이제 더 이상 내 의지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의지와 열정을 첨가하지 않더라도 눈만 뜨면 책상 앞에서 그 찰나를 간절히 기다리며 책과 글을 시간 속에 고리로 연결시키는 나는 평생 이 에파파니의 전율을 즐기며 살고 싶은 것이 꿈이 되었다.
사실 매일을 꿈같이 사는 나의 행색은 초라하기 그지없다.
겉의 초라함은 내적 충만으로 충분히 상쇄되고
바라는 것은 매일 이렇게 읽고 쓰고 코칭하며 사는 삶이요,
갖고 싶은 것은 이렇게 살 수 있는 시간과 경제적인 자유이며
가고 싶은 곳은 아무 데도 안가도 되는 나만의 공간이며
하고 싶은 것은 매일 이렇게 살고 싶은 것이다.
이 외에는 바라는 것이 없기에 행색의 초라함은 정신의 부로 충만됨을 알겠다. 쇼펜하우어(주)가 말한 ‘진정한 부’는 소유가 아닌 향유라는 사실을 실제 경험으로 인정하지 않을 수가 없다. 역시 충만함은 내면에서 오는 것이지 결코 외적인 소유에서 만족할 수 없는 것이다.
이러한 일상은 ‘나’라는 사람의 ‘정체성’을 다듬어가고 정체성은 나만의 ‘결’을 만들어 주리라. 그리고 같은 결을 지닌 이들이 나의 인생으로 걸어오겠지. 그렇게 삶이 풍성하게 살을 찌우겠지. 부여잡으려 애썼던 수많은 것들이 손바닥을 펴는 순간 모래알 빠져나가듯 스르르 빠져나가고 에너지는 진공상태를 원하지 않는 이치에 따라 비워진 나의 두 손은 ‘책’과 ‘글’로 채워지고 있으니 나의 삶이 이렇게 중년의 시점에서라도 정돈되어 가는 것에 대해 어찌 감사하지 않을 수가 있을까....
사람은 모두 자기 자신을 사용하여 삶을 만들어간다.
나를 얼마나 알고 있느냐의 정도에 따라 내 삶의 풍성도는 달라질 것이며
풍성해지면 질수록 삶의 결도 더 고와질 것이고
나아가 삶의 질도 상승될 것이다.
이런 이유로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나를 아는 것.
나를 해체해보니 ‘김주원’이 아니라 ‘인간’에 대한 이해가 더 우선되어야 했다. 인간이란 어떤 존재일까? 대개 ‘인간’은 ‘이성’적인 ‘동물’이라 개념화한다. 그렇다면, 인간은 무엇이며 이성은 무엇이며 동물은 무엇인지를 알아야 했기에 이 세 단어부터 먼저 규정해야 했다. 기본지식이 무시되면 지식은 양만 쌓이지 쌓는 방향이 제 맘대로일테니. 기본부터 정리시켜 보도록 하겠다.
‘1장 나를 해체해보니’ 편에서는 ‘나’의 경험을 통해 인간을 들여다보려 한다. ‘나’는 지구에 존재하는 유일한 1인이지만 내가 겪은(는) 경험은 누구나에게 해당되는 경험이기에 특별보다는 평범에 가깝고 따라서, 나라는 1인을 임상삼아 인간을 들여다보는 체험은 유일하지만 보편적이라고 볼 수 있기에 ‘나’, ‘나의 경험’은 소재일 뿐, 이 소재를 데리고 인간을 해체해보려는 시도라고 봐도 좋다.
다음편.
Ch. 1 나를 해체해보니 - 나는 무뇌아입니다.는 11/20(월)에 발행됩니다.
(주) 쇼펜하우어 인생론, 쇼펜하우어, 나래북.
독서와 글, 코칭을 아우르는 사유의 공간, 지담북살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