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기론(利己論) - Ch1. 나는 나를 해체하기로 했다
나는 죽을 때까지 어떤 공간에 머문다. 집에서 지하철로, 또 학교나 집안에서도, 간혹 여행할 때도, 나는 공간을 찾아 늘 이동한다. 작은 방안에서도 침대위에 나를 뉘였다가 책상 앞에 앉혔다가 씽크대앞에 세웠다가 테라스로 불러냈다가 여하튼 계속 어떤 공간으로 날 움직여댄다.
이렇게 나의 신체를 여기저기로 이동시키는 주체가 뭘까? 바로 정신이다. 정신이 방황하면 신체를 새로운 공간으로 자꾸만 이동시킨다. 새벽에 책읽을 때도 정신이 자꾸만 어딘가로 탈출하려들면 커피타러, 테라스나가려, 괜시리 화장실 한 번 더... 또 어떤 날엔 정신따라 미술관으로, 공원으로, 때론 시끄러운 음악 속, 자연 속, 여기저기로 나를 밀어 넣는다.
이로써 나는
신체의 이동 빈도에 따라 정신상태를 가늠할 수 있고
신체는 정신의 명령에 거의 방어없이 따른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정신이 신체를 이동시켜 뭘 얻고자 하는 것일까?
핸드폰에 저장된 사진 속에는 양평근처 강가에서 활짝 웃는 내가 있다. 그 때의 정신은 왜 신체를 그리로 이동시켰을까? 그리고 무엇이 나를 활짝 웃게 했을까? 바로 내가 느끼는 감각때문이겠지. 어떤 연유로 정신이 그 곳에 나를 데려다 놓았든 그 때의 나는 보여지는 흐르는 강물에, 들어오는 자연의 향에, 느껴지는 맑은 공기에 모든 감각을 맡기며 정신을 환기시켰을 것이다. 그 공간으로 인해 나는 활짝 웃은 것이니 정신이 신체를 이동시키는 이유는 환기를 원하기 때문인 것이다. 환기란 외부의 것을 진입시켜 내부의 일부를 빼내고 섞는 상태. 즉, 정신이 환기를 원할 때 나는 신체를 다른 공간으로 이동시킨다.
자, 이쯤에서 우리가 이해할 수 있는 것은 만약 우리가 주말마다, 또는 더 자주 여기저기로 나다니고 싶다면, 도저히 가만히 있지 못하겠다면, 나에게 고요란, 고립이란 감옥이라 여겨진다면! 그러한 정신은 혼탁하여 강렬한 환기를 원한다는 것이며 그것은 정신에서 빼내거나 투입시켜야 할 것이 많다는, 그러니까 한마디로 정신이 방황하고 있다는 증거라 해도 무방하다.
그러한데도 정신에 관심을 두지 않고 신체를 여기저기 옮기며 감정만 달랜다면 계속 정신은 신체를 더 바쁘게 이동시켜야 할 뿐이다. 이동은 잦은데 순간적인 감정만 달래지는, 하지만 자신의 뜻대로 신체를 지배하던 감정은 더 자신을 달래달라며 칭얼대는...공허함과 허무함.... 급기야, 혼자 있는 것을 견디지 못해 여기저기 기웃기웃 누구라도 불러내어 시간을 떼워야 하고 더 심각한 경우엔 자기 정신으로는 도저히 지탱할 수 없어 약물이나 기타 무언가에 의지해 정신을 잃게 만드는.....
반면, 굳이 신체에게 여기저기 다니라 명령하지 않는 정신의 소유자를 가끔 만난다. 물론 성향상 다니기를 싫어할 수도 있지만 굳이 환기시킬 것이 없거나 이미 환기되어 있는 정신으로 충분히 충만함을 느끼는 이들이다. 이런 정신은 스스로 정리하고 통제할 수 있는, 질서잡힌 정신이라고 할 수 있다. 정신이 방황하지 않고 자기 자리를 제대로 지키고 있으니 굳이 여기저기 신체를 옮겨가며 이런저런 감각들을 요구하지 않는 것이다. 강한 정신인지는 더 두고 볼 일이지만 질서있는 정신인 것만은 분명하다.
스스로 고립을 택하고 외롭기는커녕 자신만의 향유를 즐기고
외부가 아닌 내면에서 스스로를 채워내는 옹달샘에 의지하여
고립속의 고요를 친구삼아 진정 자신과 놀 줄 아는 사람인 것이다.
나의 움직임을 통해 내 정신상태를 들여다보는 것을 좀 더 해보자.
나의 신체가 공간을 이동하는 것이 정신과 연관된 것임을 알았으니 이제 정신에 대해서만 거론해 보겠다.
자주 경험하겠지만 복잡한 지하철 안에서 우리는 무언가에 골똘히 빠져본 적이 있을 것이다. 시끄럽고 어수선해도 뭔가에 집중적으로 빠져드는 경우는 누구나 겪어 봤을테다. 반면, 조용한 방안에 잘 정돈된 책상 앞이지만 책과 눈 사이, 그렇게 짧은 거리에서도 이탈한 정신으로 인해 분명 눈 앞에 펼쳐진 환경은 책을 읽을 수밖에 없는 물리적 조건을 갖췄음에도 도통 책이 읽히지 않는, 이 또한 누구나 겪어봤을테다.
이 단순한 일상의 경험만으로도
정신은 외부 공간과 ‘나’를 단절시킬 충분한 힘을 지니고 있고,
또한 외부 공간과는 무관하게 ‘내가 나를’ 외면시킬 수도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정신은 이렇게 물리적인 환경과 그 상황에서 느낄 수밖에 없는 감각을 외면 내지 방치시키고
자기 갈 곳을 가버리는, 신체감각과 환경 모두를 맘대로 무시해버리는 자유로운 습성이 있다.
결국, 집중하지 못하는 것은 방황하는 정신이 가진 자체의 본성 때문인데 그 자유로운 녀석에게 나는 자주 진다. 하지만, 복잡한 지하철에서도 정신을 한 곳에 빠뜨릴 수 있는 것처럼(빠진 곳이 어디든 간에) 어떤 환경에서도 이탈한 정신을 다시 제자리로 데려올 수 있는 힘도 내 안에는 있다.
이러한 정신의 힘이 지난 글에서 언급한 의식적 사고의 힘이다.
다시 언급하지만,
'정신차려!'라는 말, '정신을 차리게 명령하는' 그것이 있으니까 그런 말을 하는 것이다.
그 주체가 '의식(consciousness)'이다.
이탈한 정신을 다시 제자리로 데려오라고 지시하는 주체가 의식인 것이다. '아. 정신이 또 엉뚱한 곳으로 갔군. 정신 데려와야겠다.'라고 의식하는 순간 우리는 우리 스스로에게 말한다. '정신 차려!'라고.
그런데 여기서 의식하지 않는 의식, '무의식'은 그냥 내가 평소에 하던 대로 나를 내버려둔다. 음악에 빠져 시간 가는 줄 모르거나 다리를 덜덜 떤다던가 손가락으로 볼펜을 빙빙 돌린다거나 자신도 모르게 툭 나오는 말들만 한다거나... 그냥 늘 하던 대로 '의식하지 않고' 그냥 하는 거, '무의식적으로 그랬어'라는 말 그대로. 하지만 의식은 늘 무의식과 싸우라고 정신에게 지시한다. '음악 그만 듣고 할 일 해야지!', ‘또 그렇게 말해버리면 어떡해?’하면서 말이다.
그런데 '음악 그만 듣고!'와 같이 의식에게 명령하라 지시하는 또 어떤 주체가 있지 않을까?
그게 무엇인지 '모른다'고 해서 '없다'는 결론을 내리기엔 뭔가 찜찜하니 찾아보자.
마치 잃어버린 물건을 대충 찾다가 '없어'하고 뒤돌아서는 느낌?
이건 참을 수 없다.
자, 의식에게 지시하는 그 무언가가 바로 잠재의식이다.
쉽게 말해서, 잠자고 있는 의식이다.
바보라서 의식이 넣어주는 대로 그대로 받아들인다.
이성이 열일하며 인식에서 멀어지고 의식 속에서 자주 활동하면 잠재의식은 ‘아, 우리 주인의 이성이 또 출동해야겠지?’라고 인식하고 계속 이성을 활발하게 움직이도록 지시한다. 반대로, 의식이 아무것도 하지 않고 정신이 맘대로 돌아다니게 냅두면 ‘아, 우리 주인은 정신을 맘대로 냅두는구나’라고 정신이 맘대로 돌아다니게 방치하고 잔다.
즉, 잠재의식은 습관보관창고다. 잠재의식에서 고착된 것은 무의식으로 내재되어 나의 에너지의 기저(基底)가 된다. 늘 부정적인 말만 내뱉는 사람은 상한 감정을 이성이 필터링하지 못한 상태에서 부정적인 표정과 행동을 드러내게 되고 그 행동에 제재를 가하지 않은 의식 탓에 ‘아, 우리 주인은 부정을 느끼면 못난 말을 하는’ 존재로 잠재의식이 인식하게 되며 그것이 반복되면 무의식에 내재되어 부정이 가득한 에너지로 세상을 살게 된다. 긍정적인 경우도 마찬가지다.
긍정적인 사람 역시 부정을 느낀다. 하지만 부정적인 이와 다른 점은 의식이 출동하여 부정적인 감각과 감정을 긍정으로 해석하도록 의식이 첨가된 사고작용을 지시한 후 행동으로 드러낸다. 그리고 이 과정이 그대로 잠재의식으로 들어가 무의식에 고착되므로 늘 긍정의 에너지를 내뿜는다.
정리하면
인간의 내적 정체성부터 외적표현까지의 과정은 서로 긴밀히 연결되어 있다.
감각-감정-의식-정신-행동-잠재의식-무의식 순으로 계속 순환하며
‘나’라는 사람의 인격과 인성이 형성되고
이에 따라 삶의 결과가 만들어지는 것이다.
‘아이고 정신없어!’라는 말도 우리는 쉽게 내뱉는데 실제 정신자체가 없!는! 사람은 없으며 정신에 아무것도 없이 비어있는 사람도 없다. 모든 자연은 에너지의 파동으로 서로 교류하며 에너지는 진공상태를 허용하지 않기 때문에 정신에도 역시 빈공간은 없다. 무엇이 채워져도 채워져 있다. 정신없다고 느끼는 것은 그 공간이 비어있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알지 못하는 무언가로 채워지도록 방치했다는 증거다! 아무것도 채울 수 없고 채워지지 않는다면 우리는 그것을 ‘공간’이라고 부르지 않는다. 우주는 커다란 하나의 공간이며 무언가로 꽉 들어차 있다. 진공은 없다. 그러니 당연히 우주의 일부인 나, 나를 이루는 모든 공간 역시 꽉 차 있다. 모든 것에는 그에 합당한 무언가가 채워져 있다.
정신이라는 공간을 채우고 있는 것은 이성이다. 단, ‘비이성적’이라는 단어를 자주 사용하듯이 정신은 이성과 비이성으로 채워져 있다. 정신이 없는 것이 아니라 정신을 채운 2가지 가운데 비이성이 활발하게 활동하는 것이다. 내가 주체가 아닌 비이성적 사고가 이성적 사고를 제압하고 내가 아닌 이상한 정신으로 사는 것이다. 물론, 비이성적 사고는 이상한 사고뿐만 아니라 초월적 사고, 이성을 너머서는 고차원적 사고도 담당한다.
본 연재를 통해 언급했듯이 ‘생각’이란 녀석의 주체는 내가 아니다. 내가 주체인 정신에 외부로부터 불현 듯, 갑자기 진입하는 생각을 통제해야 한다. 다행히 나는 숱한 트레이닝을 거쳐 내 통제권 밖에 존재하는 ‘생각’으로 정신을 채우지 않는다. 정신에 의식이 개입하지 않으면 내 정신으로 사는 것이 아니니 나는 의식적으로 내 정신을 다룰 수 있는 것에 대해 인생을 유리하게 사는 참으로 필요한 기술을 지니고 있다고 여긴다.
인간은 앞서 언급한 범주(이성+비이성=정신)로서의 이성적인 사고가 기능할 때 ‘인간=이성적 동물’이라는 등식이 성립된다. 또한, 이성적으로 사고할 수 있어야 ‘나=인간’이라는 등식도 성립한다. 그러니 단순하다.
정신이 생각을 없애고
인식의 문을 닫고
의식 속에서 이성을 움직이게 한다면
‘나=인간=이성적 동물’이라고 규정해도 될 것이다.
물론 '이성'의 수준 정도나 밀도에 따라 '사고'의 수준은 다를 것이다. 일단 이성은 기존의 관성적으로 쌓인 생각 덩어리, 즉, 관념이 주를 이루는데 우리는 ‘의식적 각성’을 통해 이 관념을 계속적으로 깨고 부수고 다듬고 연결하고 섞고 내보내고 새롭게 진입시키는 정신활동을 통해 의식의 개혁, 진화, 승화를 이뤄가야 한다.
이 과정이 반복되어 어떠한 질적인 차원으로 진입했을 때
우리는 ‘통찰’이나 ‘창의’, ‘직관’과 같은 메타인지를 경험하게 되며
나는 이것을
‘자아의 의식혁명’이라 부른다.
이성적 인간, 성숙된 인간, 오픈마인드 인간, 자기발화형 인간, 다차원적 사고의 인간, 입체적 관점의 인간, 창의적 인간, 어떤 단어를 사용하든 같다.
이 모든 단어가 나에게 적합도를 높이게 하려면
'자아의 의식혁명'을 스스로 자신에게 적용, 순환시킬 줄 알아야 하겠다.
==> 다음 편, '선취행동의 화학변화'는 다음 주 월요일(12/11) 발행됩니다.
안녕하세요, 지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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