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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담 Feb 23. 2024

자연이 날 위해 이리 애쓰는데
내가 비우지 못한다면

그리스로 향하는 지중해 검은 바다 위에서.

지금껏 나는 철저하게 혼자가 되려 고립과 고독, 내면의 자유에 대해 갈구하며 나를 시험하며 나를 진화시키며 그러다가 좌절하기도, 고양되기도 했다. ‘자발적 고립’을 택한 후 주변을 의식적으로 차단하고 ‘신성한 무관심’으로 '의도적 단절'이 주는 자유의 품에서 내면을 쌓아오고 있다. 


그리고 지금....

그것이 차오름을 느끼고 있다. 


이번 여행 역시 그러한 목적으로 (계획한 것은 아니었지만) 오롯이 나와 만나는 시간을 너무나 찐하게 경험하고 있고 이 느낌을 그대로 글로 쏟아내고 있다. 정말이지, 아무 것도 계획하거나 판단하거나 미리 추측, 유추하지도 않고 매일매일 주어진 그대로를 느끼고 싶어 기존에 내 안의 것을 비우고 모든 감각으로 들어오는 것들을 환영하며 그렇게 채워지는 것들이 손끝으로 흘러나오길 바라고 있다. 


내 머릿속은 온통 ‘내가 되고자 하는 삶’, ‘나를 증명해내는 삶’을 제대로 걸어가보고 싶은 마음뿐이다.     

시야는 온통 검은 바다가 전부...

내가 가고자 하는 길도 미지의 세계, 컴컴하다.

어디에 디딤돌이 있는지, 어디에 걸림돌이 있는지 나는 알지 못하고 알 수도 없다.

그저, 나답게, 내가 해야할 숙명과도 같은 사명을 따라 한걸음씩 걸을 뿐이다.


그런데.. 

검은 바다.... 

저... 어기서 뭔가 반짝한다.

검은 세상 속, 

내 눈앞에 등장한 배 한 척...

미지의 세계...

암흑과도 같은 삶의 길...

그 속에 반짝...

동반자는 반드시 존재한다. 


새벽부터 비가 주룩주룩 먹구름이 가득하다. 어제도 그랬는데 크루즈 밖으로 나가 돌아다닐 때는 더울 정도로 날씨가 화창했다. 천운이란다. 이 계절에 이런 화창한 날씨를 매일 연속으로 만나는 것은 천운이란다. 천운이고 불운이고 나는 모든 자연이 날 위해 열심히 자기 할 일을 다 하는 중이니 어찌됐든 다 좋다.


오늘도 기가 막히다. 쏟아지는 비는 이내 그치고 먹구름 사이로 햇살이(사진을 못 찍었다)....내내 쨍쨍이다. 여름옷을 가져오지 않아 잠옷대신 입으려 가져온 검정티를 입고 모자눌러쓰고 나갔다. 그리스를, 집앞 마실가듯 다녀왔다. 

나는 더웠지만 시원했고 마실차림이었지만 화려했다.     

사람들은 대개 먹을 것, 살 것, 볼 것들에 온통 관심을 갖는다. 이는 어느 나라든 마찬가지인가보다. 여기도 온통 먹거리, 살거리, 볼거리뿐이다. 


나의 관심사는 느끼고 삼키고 쏟아내는 것이다. 

지금 새로운 공간이 나를 돕고 있다.      


그리스 소도시의 시내, 한 레스토랑에서 점심을 먹는데, 당연히 여기도 느리겠지 싶어 음식이 나올 때까지 읽을 요량으로 릴케를 펼쳤다.     

 

한순간의 스케치를 위해서도, 대조적인 바탕이 힘겹게 마련되어지는 것은 우리가 그것을 보게 하려 함이라; 하긴 세상은 우리에게 매우 뚜렷하게 요구한다. 우리는 자신의 감정의 윤곽을 파악하지 못하고, 단지 외부로부터 그것을 형성하는 것을 본다. 

누가 마음의 커튼 앞에 앉아, 마음을 조인 적이 없겠는가

(중략)
나는 여전히 머무를 것이다. 

언제나 볼 것이 있으니까(주)’     


도대체 릴케는 어떻게 이런 글을 쓸 수 있을까.... 심장이 쿵쾅쿵쾅 뛰어서 음식이 좀 더 천천히 나오길 바랬다. 어딜 가나 관광객 투성이라 이 고풍의 도시에서 찬찬히 나 자신과 만날 공간을 찾기는 어렵다.... 구석진 레스토랑의 한적한 이 곳이 딱이니 음식이 천천히.. 아주 천천히 나와주길 바랬다.     


릴케는 지금 내 심정을 어찌 이리 읽어냈을까. 그저 여행지에서 읽을 책 몇 권 들고 왔는데 어찌 이리 지금, 딱, 이 자리에 너무나 필요한 글귀가 내게로 온단 말인가? 먹구름이 가득한 채로 그리스에 날 옮겨놓더니 차비하고 나가자마자 구름 사이로 태양은 나를 맞이했다. 그리고는 복잡한 시내, 한적한 레스토랑에서 펼친 릴케는... 외부가 아닌, 나의 감정의 윤곽을 알아채라고, 누군들 다 마음을 조이고 있다고, 하지만 신은 한순간의 스케치라도 항상 이면을 힘겹게 마련해 둔다고....    

내게 소포클레스와 디오게네스를 찾아주신 할아버지상인

먹구름도, 태양도, 릴케도, 도시도, 모든 자연이 날 깨우치려 애쓰고 있다. 

스스럼없이 자신의 모든 것을 내주는 이 도시의 시간과 자연에 나는 감동받고 감사하여 감격의 꼭대기에 올라서 있다. 이리 자유를 주는데도 내가 비우지 못하고 소화하지 못하고 채우지 못하여 내놓지 못한다면 필히 내 골통이 부패 중인 것이다. 


그리스 전통음식인 스블라끼를 먹으며 릴케를 곱씹어 삼켰다. 릴케가 가슴에 파고 들어 스블라끼의 맛은 전혀 모르고 삼켜버렸다. 이 느낌 그대로 고풍스런 골목골목을 걸으며 나는 찾았다. 


계획한 것은 없지만 즉흥적으로 찾아보고 싶은 것이 생긴 것이다. 온통 기념품 가게뿐이라 기대하진 않았다. 첫 번째 가게에 없었고 두 번째 가게에도 없었다. 세 번째 가게에서 찾았다. 


소크라테스나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와 같은 철학자들의 모형은 한국에서도 쉽게 구할 수 있지만 내가 좋아하는 철학자나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인물들을 이 곳에서 찾은 것이다. 아니, 내가 찾은 것이 아니라 어설픈 영어로 이러이러한 것을 찾는다 했더니 인자한 그리스할아버지(?)가 창고를 뒤져서 찾아주셨다!!!!   

소포클래스와 디오게네스

'신의 패권은 항상 한쪽이 무겁게 마련(주2)'이라고, 그러니까 항상 한쪽이 무거워 세상에 먼저 드러나는 면이 있지만 먼저 드러날 뿐 그 배후에는 평정을 위한 다른 쪽이 반드시 숨어있다며 내 굳어버린 관념들을 깨부숴준 소포클래스와 죽은 뒤에 꼭 당신을 찾아 만나겠다고 나로 하여금 선언하게 만든 디오게네스를 찾았다. 이런 기가막힌... 

 

게다가 소포클래스와 릴케가 한 말이 같은 말이 아닌가! 

오늘 신이 내게 꼭 다짐하며 일깨우려는 것이 바로 이 것이었단 말인가!      


외부로부터의 현상말고 천천히나중에언젠가 이면이 나에게 드러날 것이니

그저 앞으로 나가라고...

마음졸이더라도 신이 나중에 한쪽 패를 보여주실테니 가던 길로 가라고...

그렇게 계속 멀리...깊이 보며 그 길 위에 머물러 보라고...     


글을 쓰는 동안 정찬시간이 다 되었나보다. 턱시도와 드레스의 행렬이 오가기 시작한다. 오후 6시면 정찬이 열린다. 화려하게 차려입고 포크와 수저도 정해진 대로 사용해야 격이 갖춰지는 그런 자리에서 그들은 고양될지 모르지만 나는 나의 고양을 위해 정찬대신 11층 선상으로 오른다. 면티에 배낭맨 채 아직 내게서 떠나지 않은 남은 지중해의 태양을 보내기 위해. 바다를 보기 위해...     


컴컴한 새벽, 함께 나란히 검은 바다를 항해하던 배처럼...

나에게 동반자란.. 

나를 그대로 존중해주는 이들이길 바란다.

그렇게... 나는 나대로, 상대는 상대대로.. 

하지만 같은 방향으로, 보폭을 맞춰줄 줄 아는, 

벅차오르는 나만의 심정에 감정을 쏟아내더라도 함께 춤을 추고 

아무 계획없이 다니는 이런 나의 습성을 나의 인생이 점점 더 섬세해지는 중이라고 말해주는 이가 나의 동반자이길 바란다.

그렇게 결이 같은 이들이... 

인생의 항해를 함께 해주길 바란다.

(요 며칠 글을 쓰면서 계속 눈물이 난다.)    

  

뾰족거리는 나의 모습은 인생을 진지하게 담는 중에 삐져나온 삶의 진통임을 알아주고

벗어버리지 못하는 못난 나의 모습은 삶의 길을 애쓰며 다듬는 과정이라 바라봐주고

어쩌지 못해 끝까지 관심두지 못한 이에 대해서는 사랑이 없거나 포용하지 못해서가 아니라 와의 진정한 관계를 보호하기 위해서임을 읽어주고

까탈스럽게 고집하는 성정이 아집이 아니라 끝까지 지켜내야 할 고집이기에 함께 보호해주고,

내가 드러내는또는 나에게서 드러나는 것이 관심 밖의 것이겠지만

눈살을 찌뿌리지 않고 잘했다고,

나의 길에서 큰 것을 얻어가는 중이라고,

계속 쏟아내도 괜찮다고 내 속내를 봐준다면

나는 더 아이같은 나만의 순수함을 철없이 드러낼 것이다. 

이런 이들이.. 나의 동반자이길 바란다.

이것이 먹으면 오물이 되고 저것이 먹으면 신의 은혜가 된다.

이것이 먹으면 질투를 낳고 저것이 먹으면 신의 지혜를 낳는다

이 땅은 비옥하고, 저 땅은 황폐하다.

이 사람은 무결한 천사이고 저 사람은 들짐승과 악마이다.


영혼의 미각을 가진 이가 아니라면

어떻게 이 둘을 구분할 수 있겠는가?(주3).


나의 못남을 보더라도 내가 오물과 질투로 내 인생을 황폐화시키는 악마가 아닌 것을 알아주는,

내가 내지르는 날카로운 어떤 지점조차도 내 인생을 통해 내가 기력을 다해 다다라야 할 그 곳으로 가기 위한 몸부림임을 읽어내는, 영혼의 미각을 지닌 이가 나의 동반자이길 바란다.

만약 아니라면, 

그저 혼자인 것이 천만배 낫다. 


삶은 일상이 만드는 것이지만 일상은 함께 하는 이들과의 결에서 일정수준의 질을 가늠시킨다. 나의 인생이 다소 엉뚱하고 회전이 잦고 좁은 길을 간다 하더라도 나는 내 감량만큼의 몫을 다하는 섬세한 길을 만들고 싶다. 이런 인생을 그저 바라봐주고 인정해주고 자신 또한 그리 삶을 다듬어가는 이들이 나의 동반자가 되어주길 바란다. 


이를 위해 혹여나 

물질에 가려 정신을 읽지 못하고 

정신을 차리느라 마음을 놓치는 

어리석은 내가 되어서는 안될 것이다.      


주1> 릴케, 두이노의 비가, 염승섭역, 2022, 부북스

주2> 그리스철학자열전,  디오게네스 라에르티오스, 2016, 동서문화사

주3> 루미시집, 잘란 아드딘 무하마드 루미, 2019, 시공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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