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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담 Mar 01. 2024

사과에서 향과 즙을
분리할 수 없듯이

나홀로 유럽 - 나폴리로 향하는 바다 위에서

어제도 저녁을 먹지 않고 일찍 잠들어 새벽 2시에 눈을 떴다. 벌떡 일어나 고양이세수 후 커피를 찾아 5층 카페로 내려왔지만 오늘은 대청소중이란다. 그래도 난 커피와 테이블이 필요하다 했더니 이미 친해진 종업원들이 날 위해 자리 하나를 마련해준다. 청소에 방해되지 않는 선에서 나는 작은 공간을 얻었지만 오히려 그들이 내게 방해될까 계속 날 살피며 자기 일에 열중한다.     

                

난 신나게 자기일을 하는 사람들을 보면 동질감을 느낀다. 자신의 일을 하는 것, 자신으로 사는 것, 일과 삶이 분리되지 않은, 일속에 삶이, 삶속에 일이... 어떤 일이든 '일'는 자신의 '삶의 양'과 교환되는 것이다. 그 거래를 통해 '나'라는 가치를 열매로 영글게 익히는 이들은 자체로 빛이 난다. 나와 친해진 흑인종업원은 연신 하얀이를 드러내며 나에게 계속 미소를 보낸다. 나도 계속 그녀를 보게 된다. 웃음은 사람을, 마음을 이끈다.

               

웃음, 배려, 역할, 말한마디, 참을성, 내가 별로 신경쓰지 않던, 이미 내 안에 있는 것들은 가끔 관계에 커다란 힘을 보탠다. 이들은 능력의 뒷켠에서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취급을 당하기도 한다. 능력이 출중한 이들과의 관계에선 냉정, 침착, 정확, 이성이 오히려 더 선두에 서 있긴 하지만 능력과는 무관하게 언제든 출동준비를 갖춘 채 대기중인, 게다가 엄청난 위력을 지닌 존재는 미소와 말 한마디, 배려의 몸짓과 같은 가슴에서 나오는 것들이다.      

기항지 도착 전 괴테와 함께

난 항상 머리보다 가슴을, 가슴보다 감각을 신뢰한다. 이런 내가 비이성적이고 비계획적이며 비논리적인 것은 아닐까 싶기도 하겠지만 계획을 초월한 예기치 않은 비합리, 합리와 논리를 초월한 공리, 공리를 초월한 신비가 지금 나를 여기에 있게 했음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나의 머리 속에 사는데 필요한 지식은 이미 채워져 있다. 그런데 골통소리 듣는 것은 아무래도 지식의 쓰임보다 초월된 무언가를 더 쫒고 있기 때문이리라. 물론 먹고 사는 문제의 일정부분을 지식이 담당하는 것은 바람직하다만 먹고 사는 문제만을 위해 삶이 존재하는 것은 좀.... 그래서, 나는 머리보다 가슴을, 가슴보다 감각을, 감각보다 행동을 더 믿는다. 내가 새벽마다, 때마다 여기 5층 카페에 와서 노트북을 켜지 않았다면 이들의 저 찬란한 미소를 선물받지 못했을 것이다.        


뿐만 아니라 이 모든 찬란한 가치들은 마치 두 개의 물방울이 하나로 뭉쳐 덩치를 키우고 기체로 승화되듯 자기들끼리 서로 뭉치고 섞여 응집한 후 다른 차원으로 승화된다. 

미소와 미소가 만나면 신기하게 가슴에선 온기가 솟고 

그 기운은 더 큰 손짓으로, 

더 큰 손아귀의 힘으로 상대를 잡아줄 수 있다. 

자음과 모음의 틈에 통통하고 살찐 기체들이 몽글몽글 달라붙어 혀끝으로 나오는 순간 

몽글이들이 상대의 가슴으로 스며드나보다. 


언어는 도구에 불과하다. 눈빛과 혀끝에서 맴도는 기체의 유동이 언어보다 더 신비스럽고 가치롭다. 그래서 영어를 잘하든 못하든 말주변이 있든 없든 상관없이 사람에게선 ‘따뜻한 기운’과 ‘탐스런 향기’가 묻어나는 것이다.                


꽃에서 향기를 뽑아낼 수 없듯이,

사과에서 즙과 향을 분리할 수 없듯이

누구에게나 자신만의 향기와 자신만의 맛을 지니고 있다.      

그러니 

'자신'으로 살아야 한다.  

'자신'의 향을 뿜으면 된다.    

'남들처럼'이 안전한 듯 하겠지만 '자신으로' 사는 것은 

안전을 너머 안정이고 충만한 삶의 영속을 가져다줄 것이다.        


나는 지나치게 이성적이었고 무표정한 사람이었음을 고백한다. 내 속내와 상관없이 지나간 많은 이들이 나에게 냉정하다고, 말붙이기가 어렵다고 토로들을 했었다. 나는 나대로 곤란했지만 상대도 그러했으리라. 내가 등장하면 왠지 장난치다가도 얼음이 되어 나에게 주목해야 할 듯한 그런 분위기를 가진 사람이 나였다. 지금도 그럴지 모른다. 나는 정확하고 치밀하고 '해야 할 것'을 우선하는 사람이었다. 나는 이런 내 모습도 사랑한다. 이성적이라 불리는 나의 모습은 일할 때 상당히 요긴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성적인 나와 마주하고 있는 또 다른 나도 있다. 나는 아주 솔직하고 진솔하며 누구에게든 먼저 인사하고 미안해하며 웃어줄 수 있는 나다. 주책맞은 아줌마농담도 스스럼없고 말을 못하면 표정으로라도 내 의사를 전할 수 있는 요량정도도 있다. 음악에 맞춰 목을 흔들며 주변 눈치없이 내 감정대로 나를 표현할 재주도 있다. 

나는 이성과 마주하고 있는 감각적인 나를 사실 더 많이 사랑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엇이 나의 이런 이면을 드러내지 못하게 막고 있었을까....         


사실 이성은 자기 역할이 필요한 곳에서만 열일하면 된다. 딱! 필요한 순간, 말하자면, ‘근거와 논리’를 유추할 순간이다. 이래서 이렇고 저래서 저렇게를 줄세워야 할 순간말이다. 이 외에 이성이 필요한 부분이 있을까. 관계에선 호흡과 기운(氣運)이 더 요구되고 결정앞에선 이성과 감정을 넘어선 감각이 더 힘이 있다. 직관이랄수도 있는 이 신비스런 능력을 나는 결코 외면하지 않는다.     

                

이성이 여기라고 제 아무리 나의 다리를 붙잡아도      

찰나에 발휘되는 직관의 힘으로 나는 나아간다.      

직관은 

나의 영혼이 

내 손을 잡고 이끄는 힘이다.      

나는 나의 인식이 관장하는 이성보다

영혼이 날 이끄는 신비스럽고 위대한 힘에 나를 더 맡긴다.  

티오르미나에서.

시칠리아의 타오르미나에서도 나는 아주 발빠르게 여기저기 돌아다녔다. 기념품샵에 둘러싸여 괴테(주)가 말한 천국을 느끼기는 조금 버거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괴테의 느낌을 나도 느껴보려 골목골목 구석구석을 돌아다녔다. 전체를 담을 수 있는 높은 곳이 없었지만 카메라가 하늘에서 땅위로 틸다운하듯 내 눈을 렌즈삼아 하늘로부터 정면까지 훑으며 기념품샵들을 모조리 제거해봤다. 천국을 가보진 않았지만 천국을 묘사하라면 이런 느낌인가보다. 지중해의 푸른바다, 고풍스런 건물들, 그리고 굽이굽이 세워진 요새들.....

                    

관광산업으로 생존을 이어가는 나라이니 할말은 없지만... 이 아름다운 곳에 너무 많은 이방인과 너무 많은 팔거리들이 즐비하다. 안타깝지만 이는 내 소관이 아니니 나는 여기서 최대한 구멍을 내며 들여다보기로 했다. 어디 한 군데라도 정착해 차 한잔 마시고 싶었지만 관광객의 비좁은 틈으로 나는 들어가고 싶지 않아 걷고 걷고 또 걷고, 그리다 바닥에 앉아 하늘보고 건물보고 바다보고.... 그렇게 뜨거운 지중해 태양아래 나는 오늘도 온전히 나를 열고 자연이 주는 모든 것을 맞이했다. 


하늘의 태양을 온전히 내 몸으로 받고 있을 때,

내 시야에 인공을 걷어내고 모든 자연을 담았을 때,

내 귀가 온통 까치들의 영역다툼의 소리로 가득찰 때,

내 발 밑에 수천마리의 개미가 일렬로 줄지어 길을 낼 때,

그렇게

내 주변이 모두 모자이크처리되고 온 우주에 나만 존재하는 느낌에 빠졌을 때,

나는 풍요롭고 충만함을 느낀다. 

이러한 충만은 세상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그야말로 모든 먼지 거둬내고 오로지 나 자신으로 우뚝 서 있는 느낌에 빠뜨린다.                  


여행의 중반이 훌쩍 지나고 지금 이 배는 엉덩이를 신나게 흔들며 나폴리로 향하고 있다. 4-5천명이나 탄다는 거대크루즈는 결코 흔들리지 않는다.며 자신있게 자기들의 논리를 내세웠지만 자연 앞에선 모든 논리가 무너지게 되어 있다. 


이론으로 무장한 논리는 과거 속에 존재하며 세상에 누군가 단 한사람이라도 경험했다면 새로운 증명으로 인해 논리는 다시 세워져야 한다. 논리가 아니라 진리를, 원칙이 아니라 원리를 따르는 것이 현명한 자의 인생이다. 진리를, 원리를, 섭리를 죽을 때까지 깨달을 수 있을까마는 살아있는 내내 진리를 추구하고 따르는 것은 해볼만한 도전이다. 우리 삶은 온통 모순투성이다. 아는데 모르고 모르는데 안다. 안하는데 하고 하는데 못하는...

여하튼 무언가를 찾는 인생의 항해중이라 이 과정자체가 나에겐 진하게 아름답다. 


삶이란, 나아가는, 향하는 것이다.

삶이란, 사람과 사유를 통해 살아있음을 느끼는 것이다.

삶이란, 결과를 외면하는 신성한 무관심속에서 ‘지금’의 즙이 만들어낸 길이다.

삶이란, 내가 짊어지고 운반해야 할, 나도 모르는 나만의 몫을 해내야 하는 여행이다.

삶이란, 무심코 짐을 풀었을 때 내가 짜낸 고름과 내가 밟아온 진흙들이 날카로운 무언가로 변해가는 마법같은 창조이다.

삶이란, 내 등에 짊어진, 그리도 무거운 짐이 결국 세상에 작은 빛으로 남겨질 찬란한 보석이었음을 알게 되는, 마지막페이지에 내 모든 짐이 보석으로 재창조되는 희망의 길이다.

삶이란, 마지막의 찬란함을 위해 ‘지금’을 타당하게 이해하는 지성과 나를 투자하는 행동과 ‘나와 삶’을 어떻게든 엮어 빛나는 창조물을 빚어내려는 영혼의 시도에 나를 맡기는 것이다.    

그렇게

'나'는 나를 선택해준 '나의 삶'에 감사하며

'나의 삶'은 '나'를 증명해주는 것이어야 하며 

'나'를 미래를 위한 배양자로서 알차게 뿌려진 씨앗이게 해야 한다.


크로아티아에서도, 그리스에서도, 시칠리아에서도,     

나는 보이는 성당마다 들어가 주모경을 외웠다.      

성수를 찍어 성호를 긋고 무릎꿇고 기도를 드렸다.   

                 

온전히 내가 지닌 모든 것을 제대로 쓰이게 하소서.

이리 나에게 집중하여 이루어가는 모든 것들을 당신 뜻대로 사용하소서.

찰나가 영겁이 되어가는 이 순간, 키우고 만들어가는 이 시간의 조각들이 당신이 이루고자 하는 모든 조화에 어울리게 하소서.

이로서 나는 당신이 빚어가는 세상에 오로지 나를 비움으로서 충만함을 느끼는 이 모순의 감각적 경험을 결코 잊지 않게 하소서.

나의 한글자, 한문장에 당신의 위대한 혼을 담아주시어 내가 아닌, 글이 힘을 얻게 해주소서.

나는 나만의 걱정과 시련의 무게가 있음을 인정하오니 그것들에 당신숨결 보태시어 찬란한 보석으로 거듭나게 해주소서.

               

지금 어디선가 사과를 따고 있는 한 노파의 숨결이, 나에게, 나의 자녀들에게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고 그 누가 감히 말할 수 있을까. 내가, 나의 자녀들이 자기를 이기기 위해 흘리는 땀 한방울이 세상 어느 곳에서 힘겨워하는 누군가의 영혼을 위한 댓가가 아니라고 누가 감히 장담할 수 있을까.  

              

세상은... 모든 것, 모든 이의 작은 몸짓, 땀 한방울, 찰나의 자극들이 모여 전체의 조화를 이루는 것이니 나는 나의 땀한방울, 글자 한자, 커피 한모금, 내딛는 한걸음마다에 위대한 가치가 담겨 있음을 가슴으로 깊이 느껴본다. 

우리 개개인이 ‘자신’의 위대함을, 소중함을 알고 

그것의 힘에 자신을 맡긴다면 

각자의 가슴에 심겨진 씨앗이 보다 튼실한 뿌리로 달콤한 열매맺을텐데... 

그렇게 우주의 작은 점으로라도 남을텐데....    

           

벌써 새벽 4시다.     

하지만 배가 나폴리항에 도착할 때까지 3시간은 족히 시간이 주어졌다.     

선상에 올라 지중해를 바라보며 사과나 하나 베어물어야겠다.      

이미 카페인은 충분하고 내 가슴도 충만하니...

온생을 통해 자신을 탄생시킨 사과의 향과 즙을 온몸으로 받아봐야겠다!


주> 괴테는 세상에 천국이 있다면 시칠리아와 같을 것이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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