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홀로유럽 - 폼페이에서
‘재앙’이란 단어는 왜 인간에게 붙어 있는걸까?
과연 인간이 어떤 기준을 초과했을 때 적용하는 단어일까?
자연은 왜 인간에게 절대 불가항력을 퍼붓는걸까?
무엇에 화가 나서 무엇을 잘못해서 무엇을 벌하려고,
그리고 그것으로 인해 무엇을 얻게 하려고...
말로만 듣던 폼페이에 갔다.
누군가의 주검이 아직도 내 발밑에 있는 듯하여 나는 걸음이 조심스러웠다.
79년 베스비오산은 아주 성이 많이 났었다. 분출한 화산의 높이가 성층권까지 닿았다 하니 (사실 감이 오진 않는다) 그 엄청난 높이까지 치솟은 화산이 온마을을 덮었고 많은 이들의 일상이 그 날로 마지막을 고하게 된 것이다. 그렇게 수많은 누구의 아버지, 어머니, 자식, 선생, 친구들이 땅속의 화석이 되었다.
자연이 주는 어떤 경고를 무시했을 때 인간은 큰 벌을 받는 걸까?
자연의 의도를 모르는 나는 그저 나의 인식이 가져오는대로 벌이라고 여겨지지만 화산으로 덮힌 대지의 무한한 철분은 용암덩어리 땅에 다시 생명을 불러 일으키고 싹을 틔어 사람들을 살게 하였고 지금 이렇게 이들의 재앙을, 주검을 보러 전세계에서 사람들이 몰려드는 것이다. 나폴리는 폼페이로 먹고 사는 고장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79년의 폼페이...
벌인가 상인가?
우리에게 끼치는 악과 선에 대하여,
이 세상에서 실제 일어났던 수많은 재앙과 불운한 사건사고들에 대하여,
그리고 이들의 원인과 결과에 대하여...
모든 것이 필연일지 모른다는,
가정을 사실로, 추측을 논리로, 유추를 타당으로 이해하고자 해서는 안된다.
인간의 작은 머리로는 도저히 알 수 없을뿐만 아니라 그저 의도없이 일어나는 일은 없다는 전제만이 진리인 것이다.
베스비오산이 폭발하여 용암과 화산재가 폼페이지역을 덮쳤고 이로 인해 온 지역이 화석이 되었고 모든 생명들이 그 안에 묻혔고 시간의 힘으로 다시 싹이 돋았고 역사적인 유물이 되었고 관광객이 찾게 되었고 그래서 나도 여기 있는 것이고.
그렇게 ‘예정된 조화’에 대한 '충족이유'를 서술하는 것만이 내 지성이 할 수 있는 전부다.
여기에 선이니 악이니, 상이니 벌이니를 작은 나의 머리로 재단하는 것은 나의 권한 밖의 일이다.
나는 그저 유추한 것을 사실로 인과를 만들어 충족할만한 이유를 나에게 제시할 뿐이다.
인간의 불행에 대해 볼테르는 예정된 조화(주1)라 했다. 이는 ‘충만한 진공’이나 ‘미세물질’과 마찬가지로 이 세상에서 가장 멋진 개념이기 때문에 모든 것이 최선을 향해 나아가고 있다고 여기라고 했다.
정말 멋진 말이다. 모든 미세한 것들-보이든 보이지 않든-은 예정된 조화를 추구하며 자체의 길을 향해 모든 것을 충만한 진공상태에 이르게 한다는 그의 사고가 나는 너무나 이해가 된다. 물론, 내 작디 작은 사고체계로 볼테르의 의도를 파악한다는 것은 무리겠지만 루크레티우스와 에피쿠로스가 말한, 이 세상은 진공으로 되어 있고 모든 것이 원자인 근원물질로 구성되어 있다는 개념, 쇼펜하우어가 말한 '충족이유율'과 함께 이해하면 될 듯하다.
모든 것에는 다 이유가 있어 그리 된 것이니 그 자체를 충족하는 이유만을 찾으라 한다.
모든 것이 예정된 조화를 위해 벌어지는 일들이라면
내가 지금 폼페이의 화산폭발이 상인지 벌인지에 나의 정신활동을 쏟을 것이 아니라
'충족이유'에 의해 지금 내가 여기에 온 이유가 반드시 있을테니 그것을 찾는 것이 더 바람직하겠다.
끝까지 알 수 없는 물음과 인간으로서 알아낼 수 없는 이유에 내 정신이 일하게 할 필요는 없다.
사실 나는 이런 면에서 다소 이성적이고 냉정한 편이다. 몇몇이 대화하더라도 나와 전혀 무관한 현상, 그러니까 내가 어찌 해볼 도리가 없는 것에 대한 대화가 진행되면 나는 살짝 그 자리를 피한다. 소중한 대화가 허공으로 날아가버리는 것도 싫거니와 사실 인간사회를 지배하는 정치, 경제, 교육, 종교들에 대해 거론, 토론하길 즐기는 사람들에 비해 나는 그저 내가 할 수 있는 것들, 그래서 내가 영향을 미칠 수 있는 것들에 대한 대화를 원한다. 정치가 어떻고 경제가 어떻고... 비판같은 비난의 대화를 싫어하고 지나간 얘기를 하는 것도... 별로다.
나는 주어진 환경에서 내가 어떻게 나를 철학적인 사고로 이끌어 나의 행동을 올곧은 방향으로 이동시킬 수 있나에 관심을 쏟는 것이 더 효율적이라 여긴다. 특히 남들얘기 하는 것에도 동참하고 싶지 않다. 유명인이든 옆집사람이든 남얘기하는 자리는 어떤 핑계를 대서라도 어울리지 않으려 한다. 나는 그저 내 얼굴 반듯하게 들고다니게끔 나를 키우는 것도 벅찬 인간이라...
나는 여기 전망대에 올라 파괴된 재앙의 흔적을,
그리고 아직도 묻혀 있을지 모를 주검들 위에서 마치 내가 죽었다 살아난 것마냥
'살아있는, 살고 있는 나'라는,
너무나 당연히 알아야 할 것을 알게 되는,
바보같지만 현명한 질문을 나에게 던졌다.
아니,
질문이 나에게 왔다.
화산이 폭발하고 쓰나미가 닥치고 바이러스가 출몰하고 태양이 지나치게 강렬했으며 추위가 무서웠고 산이 무너지고 강이 범람하기도 했다. 건물이 무너지기도 땅이 아래로 꺼지기도 했다. 팔이나 다리가 없기도 눈이 안보이거나 귀가 안들리기도 하고 어떤 장기가 기능하지 못하는 경우도 다반사다.
부모를 일찍 여의기도, 자식을 잉태하지 못하기도, 가족의 불운으로 평생 짐을 떠안기도 한다. 누군가의 패권다툼으로 전쟁이나 정치나 종교에 희생되기도, 어느 날 안개처럼 봉변을 당하기도... 인간의 불행은 아무리 열거해도 끝이 없을 것이다. 다수를 모아놓고 자신의 불행이 최고라 여기는 이들 손들라 하면 모두가 두 손 번쩍 들고 각자의 불행을 토로할 것이다.
나는 나에게 물었다.
‘과연 나는 어떤 재앙을 겪었는가?’
아무리 내 손가락에 찔린 가시가 세상 그 무엇보다 아프다 해도 나처럼 운좋은 인생이 어디 또 있으랴...
파란만장한 역사들 속에서, 말도 안되는 사건사고들을 모두 비껴서 나는 여기 이렇게 멀쩡하게 살고 있다.
역사 속 무수했던 박해와 전쟁을 겪어보지도 않은 나다.
게다가 나의 삶을 더 잘 가꾸려는 진통밖에 모르는,
행운을 너머 천운을 타고난 존재가 아니던가!
이렇게 당연한 사실을 여기 주검들 위에서 알게 되다니...
나는
‘불행’이라는 단어를 너무 쉽게 내 삶의 얇은, 얕은 어떤 구석에 자리잡게 해놓고는
변명이나 포장이 필요할 때마다 그 언저리에서 살짝 비굴하게 굴었던 것이다.
나는 내 삶에 다소 비겁했고 냉정했고 소홀했다.
'재앙'이라는 단어가 어떤 기준에 의해 정의되는지 불명확하나 어쨌든 그 단어를 적용해도 무방할 어느 것하나 해당되지 않는데 왜 불행이라는 단어를 내 삶에 개입시켰을까. 나는 그래선 안된다. 물론 모든 형용사는 ‘비교’에 기준한다. 나보다 훨씬 나은 사람도 많고 훨씬 못한 사람들도 얼마나 많겠는가! 이런 전제와 기준은 필요없다. ‘비교’로 행, 불행을 따지려 들면 저기 높은 곳에 위치한 신과도 경쟁해야 할 것이다.
지금 내가 나에게,
‘불행’을 느끼면서 ‘불안’과 ‘불평’을 한다는 것은
내 삶에 몹쓸 혹을 하나 달고 사는 격이다.
중요한 사실은 이것뿐이다.
여행 내내 나는 누리는 자였고 지키려는, 만들려는, 키우려는 것에 대해
내 진정한 친구인 고독과 함께 대화를 나눴을 뿐 불행에서 날 건져내야 할 필요조차 없는 자이다.
내 눈에서 흐르는 눈물이라곤 감동과 감격으로 벅차오르는 가슴때문이지
어디가 아프거나 삶이 고장나서, 내가 어찌할 수 없는 벽 앞에 흘리는 눈물이라곤 없다.
나는 더 나아가고 싶고 더 진하게 나의 삶을 살고 싶은 욕구의 충동으로 나를 더 고립시킬 뿐이고
그 속에서 느껴지는 고통은 단지 나아가는 고통이지 불행과는 전혀 다른 위치의 것이다.
행운을 위한 고통과 불행을 헤쳐 나가기 위한 고통은 분명히 대립된 자리에 마주하고 있는,
감각은 같으나 방향이 다른 고통이다.
선택하는 고통과 선택되어진 고통,
정신의 힘을 믿고 의지하며 나아가는 고통과 정신의 무기력으로 방치된 고통,
이성으로 감지한 욕구를 이끌기 위한 고통과 타인의 이성에 지배당한 무방비상태의 고통,
진통의 강도와 통증의 주기가 같다 할지라도 나의 고통은 전자이니
이것은 행운을 거머쥔 자의 몫이지 불행한 인생의 주인이 아니라는 것이 확실하다.
나 역시 충족이유에 의해 이리 살게끔 이어진 인생이라 이리 사는 것이니 내 인생을 이러콩저러쿵 따져서는 안될 것이다. 나는 누구인가, 내가 왜 태어났으며 나는 무엇을 위해 존재하는가. 따위의 질문은 이제 할 필요가 없다. 이는 나를 빚은 높은 곳에 계시는 존재의 의도에 의한 것이지 내가 알 수 있는 범주가 아니다. 데카르트의 표현대로 ‘신의 의도를 알려는 주제넘는 짓(주2)’이다.
또한 폼페이에서 겪은 대재앙에 대해서도 왜 신은 이 지상에 끔찍한 악을 출몰시키는지 내가 알려 하지 않는다. ‘선이 있건 악이 있건 무슨 상관이냐?(중략) 지체 높은 분이 이집트의 배 한척을 보낼 때 배 안에 생쥐들이 편안한지 않은지를 염려하겠는가?(주1)
생쥐나 나나 염려받을 대상이라면 염려받을 것이고 그렇지 않다면 그 또한 그런 이유에 의해 그런 것인게지.
나는 ‘재앙’에 대해 거의 염두에 두고 살지 않았듯이 앞으로도 그러할 것이다. 내 이성이 뻗쳐야 할 가지는 오로지 지체높은 양반이 나를 여기에 있게 한 이유를 찾는 도가 지나친, 뭔가 고뇌하는 듯이 보이는, 그런 짓이 아니라 해야 할 일을 하고 그 일로 나의 가치를 증명하는 것만이 내가 할 일이다.
불행이 없었던. 앞으로도 그러할 것인 삶을 등에 지고 가면서
무겁니 어지럽니 어디까지 가야 하니, 왜 꼬이느니 하는 어리석은 질문보다
오늘 걸어야 할 걸음의 수,
어깨에 진 짐을 제대로 옮기고 있는지에 대한 책임,
이런 것에 내가 제대로 쓰이는 지에 대한 점검이
내 이성이 할 일이며
행동이 이성의 말에 머뭇거리거나 멈추지 않도록 만들어낸 결과가 나의 하루여야 한다.
나폴리에도 걸인이 많다. 여기선 소매치기도 조심해야 한단다. 이러한 것에서도 나는 안정된 삶을 살고 있다. 내가 사는 동네엔 걸인도 없고 가방을 꼭 앞으로 매거나 작은 열쇠를 달고 걸을 필요도 없다. 카페에선 노트북을 놔두고 화장실을 다녀와도 될 정도로 편하다. 물을 사마실 필요도, 화장실이 급한데 동전을 찾아야 할 필요도 없다. 나는 이미 많은 것들을 소유했다.
하지만 지금 더 갖고 싶은 것이 없는 것은 분명 아니다.
분명 나는 무언가를 찾고 있고 무언가를 향하고 있다.
이는 물질이 아니라 정신의 빈곤을 메우기 위한 추구인 것이다.
유럽에 온지 벌써 며칠째인데 매일 밤새 비가 내리다가 오전이면 해가 쨍쨍했다. 지중해날씨가 이럴 수 없는데 천운을 만났다고 한다. 나는 민망하지만 내심 ‘나 때문’이라 여긴다. 5년여간 매일 새벽, 태양마중을 나가 대화를 나눴다. 무려 1800일이다. 드디어 태양이 날 알아본 것이고 이렇게 천운의 날씨로 얼굴을 비춰가며 나에게 신호하는 것이다. 오늘은 네가 거기서 날 마중하겠지 하며 이제 태양이 날 쫒아오는 것이다.
이 역시 충족이유로 그리 된 것이다. 날씨만 천운이 아니다. 여행오기 전 2일을 응급실에서 보냈지만 이렇게 생생하게 마구 돌아다니는 체력도 천운이고 내 삶 자체가 모든 재앙에서 비껴간 천운인 것이다.
나는 불행을 거론하거나 삶이 고달프다거나 시간이 한탄스럽다고 거론할 권리를 박탈해야만 할 인간이다. 이는 그저 귀찮은 것을 해야 하고 신경쓰기 싫은 것에 잠시 마음을 둬야 하고 하기 싫은 것으로 시간을 보내야 하는, 이리 되면 좋은데 저리 가는 것을 잠시 밀고 당기는, 산에 올랐는데 모기에게 물려 짜증나는 정도밖에 안되는 것이다. 산에 올랐는데 산이 무너지는 경우도 있는데 모기 몇 마리에 불평불만을 하는 꼴같잖은 내가 되면 안되겠다.
여기서 다양한 사람들을 마주치지만
일하지 않고 먹고 사는 이가 누가 있는가
꽃을 떨구지 않고 열매 맺는 나무가 어디 있는가
비가 오지 않는 하늘이 어디 있는가
파도없는 바다가 어디 있는가
파괴되지 않고 재건된 유적지가 어디 있는가
심지어 가다가 다리 아파 멈춰선 개미도 없고
파리 모기까지 모두 열일하며 자기 삶을 사는데
나는 무엇에 불평하며 무엇에 집착하고 무엇을 더 원한단 말인가
나의 천운이 나의 인식의 한계로, 시력의 흐림으로, 감각의 아둔함으로 느끼지 못한다면 나는 그냥 바보천치다. 골통이고 또라이다. 그냥 이렇게 살다 죽게 냅둬야 하는 인생인 것이다. 남들에게 피해만 안주면 다행인 그런 존재로서 살아야 하는 것이다.
머뭇거리거나 멈출 시간도 없다.
천운은 아무에게나 주어지지 않는다.
소소하든 거대하든 인간을 생쥐취급한 지체높은 분의 시야에선 모든 것이 개미와 다를 바가 없을테니 나에게 닥친 모든 것이 삶의 권리라 인지하라. 권리를 누리기 위해서 내가 보내야 할 하루에는 의무밖에 없다. 의무는 다소 불편할 뿐 불행이 아니다. 이 작은 불편이 쌓여 권리를 보상한다. 권리는 의무 이후에 존재하니 말이다. 의무는 책임을 전제하고 책임은 오늘 해야 할 행동이 수반되어야 한다.
내가 보내야 할 인생.
인생의 부피와 밀도를 책임질 하루.
하루를 보내야 할 주체인 나.
답이 명확하다.
나는,
나의 하루를,
이러한 하루가 쌓이면 나의 하루는
누릴 수 있는 권리로 충만할 것이니.
주1> 볼테르, 미크로메가스 캉디드 혹은 낙관주의, 2014, 문학동네
주2> 데카르트, 방법서설, 1997, 문예출판사
[지담북살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