뛰다가 날기도, 날다가 뛰기도, 즐기다가 걷기도, 뛰다가 즐기기도. 이래저래 하는 일마다 어떤 것은 걷는 중, 어떤 것은 뛰는 중, 어떤 것은 날개가 돋는 중, 어떤 것은 즐기는 중, 그리고 또 어떤 것은 이 모두를 초월해 나가는 중.....
나의 가치실현과 현실적 욕구 모두를 성취하는 것을 '성공'이라 하고
이 모든 과정을 '성장'이라 하며
이를 돕는 도구를 '코칭'이라, '강의'라 하며
이를 위한 연마를 '독서'라 '글쓰기'라
그리고 이렇게 이루는 과정에서 성취되는 성취욕과 성취물을 '부'라고 규정해보자
이 모든 과정은 '나'를 '나의 인생'을 '나의 삶'을 철저하게 해체한 후 하나의 맥을 잡고 그 맥을 단단히 고정시키고서 가지를 뻗게 하고 궤도를 그려 하나의 둥근 고리를 만드는 선순환으로의 내인생을 위한 조감도에 의해 시작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지금 나의 '일'을 중심으로 말하자면, 거대한 궤도 안에서
번역은 걷는 중
집필은 뛰는 중
연구도 뛰는 중
강의는 나는 중
코칭은 즐기는 중
브랜딩은 걷는 중
그리고 없다.
나는 자유로운 나만의 삶을 추구하며 '교육'이라는 사명을 지닌 채 내 삶을 갈아넣고 있는 중이다. 이 근간에는 독서와 글쓰기가 있다. 집필하고 논문쓰고 강의하고 코칭하는 이 모든 일련의 과정을 위해 나는 독서와 글쓰기를 양분으로 제공한다. 이 두가지가 하루라도 소원해지면 나무기둥도 줄기도 이파리도, 나아가 얻고자 하는 열매도 모두 부실해질 것을 아니까.
일은 일이 가는 방향이 있고 그 일에 적합한 길을 찾아 스스로의 동력으로 세상에 발현된다.
아이디어가 컨텐츠가, 무형의 것이 자기 자리를 찾아가도록 돕는 역할자일 뿐, 그래서 그 일에 적합한 내가 되도록 나의 육체와 내가 지닌 도구로서 나를 잘 쓰는 것이 내 의무다.
혹여 내가 의무를 소홀히 하거나 자세가 부실하여 일이 날 버리고 다른 누군가의 손을 잡길 원치 않는다. 나는 그저 일이 열매를 맺을 때까지 뿌리에 비옥한 대지가 되어 충분한 양분을 지속적으로 공급하고 기둥을 튼실하게 줄기와 이파리들이 비바람과 벌레와 친하게 지낼 수 있도록 '일'에게 어울리는 그런 동반자가 되어야 한다.
이런 이유로 '일'이란 것을 대하는 나의 심정과
'일'을 해나가는 나의 의지와 관점은 몇 개의 계단을 만들었다.
나의 업을 위해 지금 무엇을 해야 하는지, 그것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아는 것.
알면 아는 그것을 그냥 해보는 것, 하는 단계다.
하다 보면 하기 싫고 어렵고 그러다가 또 재밌기도 하고. 여하튼 '해내야 하는' 단계를 지나가야 한다.
이 과정이 죽을 맛이다. 해내야 그 일이 내 손에 착착 감기게 되고 그 때부터가 겨우 아마추어 딱지 떼고 시작하는 시점이다.
여기까지는 그저 양을 쌓는 수밖에 없다. 많이 하고 오래 하고 될 때까지 하고 즉시 하고 계속 계속 하는 것밖에 답이 없다. 남들이 하든 말든 나는 하고 또 하고 그렇게 몸으로 떼우는 '양'과 싸워야 하는 구간이다.
여기를 넘으면
오호..... 뭐가 이리 잘되지? 왜 나 잘하지? 오늘 왜 쉽지? 뭐, 이런 과정이 온다.
일을 재미나게 누리는 단계다. 게다가 조금 더 탄력이 붙으면 즐기는 단계가 된다.
열매가 보이기도, 열매가 맺히기도 하는 단계.
역시 신은 하는 놈에게는 뭐라도 보상하시는구나! 하며 그토록 원망하던 신에게 포옹하고 싶어지는 순간,
그러다 보면 옆에서 자기도 알려달라고, 또는 내가 볼 때 네게 필요하겠구나 싶어 내가 그간 쌓아온 것으로부터 받은 보상(노하우와 같은 비물질일수도 물질적일수도)을 나누기 시작한다.
나누면 기쁨이 배가 된다는 진리를 몸소 느끼며 내가 걸어왔던 과정을 걷는 이의 손을 잡아줄 넉넉함도 생긴다. 그렇게 양이 질로 승화된 단계. 단지 물리적인 노동의 시간, 몸으로 떼우는 시간, 이 모든 과정을 거쳐 정신이 호강하는, 그리고 나누는, 게다가 나의 정신이 일로 인해 참으로 많이 성숙했음까지 알게 되는, '보람'이라는 단어의 의미까지 가슴으로 느껴지는 단계에 이르면.
참으로 신기한 기적같은 일이 벌어진다.
섬광과도 같은 자극.
이 자극으로 지금까지 해왔던 모든 일련의 과정들이
하나로 압축되고 응축되더니, 그렇게 밀도와 부피를 키우다가 폭발하더니
빨주노초파남보가 '무지개'로, 도레미파솔라시도가 '노래'로, 가나다라마바사가 '문장'으로 '창조'의 옷을 입고 세상에 새롭게 농축된 무언가로 탄생하게 된다.
이는 능력이라기보다 초월된 영감(spirituality)에 의해 탄생하는 말 그대로, 새로운 창조물인 것이다.
우리는 이를 보편적으로 '아이디어'라고도 '컨텐츠'라고도 한다.
한 마디로
것이 '일'이 가는 매커니즘이고 그 매커니즘에 따라 '내'가 적응해야 하는 단계다.
이 과정으로 나는 질적으로 승화되고 혼자에서 함께 시너지를 내며 부실에서 풍요로 내 '일'에서 프로가 되는 것이다. 따라서, 내가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과정은 알면 하고, 하면 해내는, 이 3단계까지다. 여기서는 무조건 매일매일 반복하는 것밖에는 답이 없기에 어떤 일이든 처음 시작하면 3개월은 그.냥.한.다. 초심자의 행운이 담겨 있는 기간, 악마든 천사든 출두하기 위해 나를 시험에 들게 하는 기간, 일의 열매가 날 선택할까말까 간보는 기간, 어떤 일을 시작하든 나에게 삼세번, 초기삼개월 나는 이렇게 양을 쌓는데만 매진한다.
특히, 하는 단계에서 거의 대다수가 무너진다.
양극화되어 나타난다.
하고 하고 또 하고.
쉬워 보이지만 이 과정에서 감정이 개입되니
'낙담의 골짜기(주1)'의 구간이기도 하다.
내가 왜 이러고 있나? 해서 뭐하나? 나는 안되는 거 아닐까? 하며 과거의 관성처럼 들러붙은 습관이 날 잡아 당기기도 하고 인간이 천성적으로 지니고 있는 나태와 싸우는 구간이기도 하고 절망과 좌절, 말 그대로 낙담이 지배하는 구간.
여기서 사람은 2가지로 나뉜다.
해야 할 이유는 도전, 재도전, 시도라 하고
안해도 되는 이유는 변명, 자기합리화라 한다.
이 변명을 찾다 보니 흔히 말하는 '뒷담화'라는 양태가 생겨나는 것이다.
그렇게 누군가는 해내는 단계로
누군가는 하는 단계에서 다시 고무줄처럼 '아는' 것까지 '모르는' 것이 나았을 법한 과거로 후루룩 돌아가버리는 것이다.
그래서 '하는 놈은 못당한다'는 말이 나오는지도 모른다.
0.1%만이 남게 되는 '하는' 단계.
'일'이 창조되기까지 거대한 신의 거름망이 체가 되어 걸러내는 단계.
묵묵히, 꾸준히, 양을 쌓아 앞으로 가야 하는 단계에서 감정과 어설픈 지식이 내 발목을 잡는 단계.
에너지뱀파이어들이 양산되는 단계.
낙담의 골짜기를 오르는 단계.
할일이 없는 사람은 악마가 나서서 일을 찾아준다(주2)고 한다. 나보다 항상 부지런하고 결코 혼자 다니지 않는 이 녀석에게 나는 틈을 보이지 않기 위해서라도 나는 뛰는 놈위에 나는 놈위에 즐기는 놈위에 누리고 나누고 창조하는 놈이어야겠다. 악마가 물어다주는 일은 뻔할 것이다. 근사한 변명을 마치 제대로 된 합리로 착각시켜 과거의 나로 돌려보내는 그 짓일테다.
악마는 분명 하려는 날, 해내려는 날 방해하러 오겠지만 나는 천사들이 날 반겨줄 누리고 나누는 그 구간으로 서둘러, 빈틈없이 가련다. 어떤 일이든 말이다.
만약 신이 내게 천재(天才-하늘이 내려준 재주)의 비상함을 주셨다면,
그것은
주1> 아주 작은 습관의 힘, 제임스클리어, 2019, 비즈니스북스
주2> 월든, 헨리데이빗소로우, 2017, 열림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