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콜루콕과 송쿨, 같은 듯 다른 풍경

여행 중 떠나는 또 다른 여행

by 미나리즘


1. 콜루콕 (Kol-Ukok, Көл-Укок)


DJI_0056.JPG 사람의 발길이 닿지 않는 곳, 콜루콕


코치코르에 도착할 때까지만 해도 우리의 목적지는 오직 송쿨호수였다. 해발 3,000미터의 고산 초원 위 유르트에 머물며 쏟아지는 별을 볼 수 있다는 것만으로, 여행의 피날레를 장식하기에 충분했다. 그 단순한 바람 하나로 이곳까지 왔고, 다른 계획은 필요치 않았다. 그런데, 여행사 주인과의 짧은 대화가 우리의 여정을 완전히 바꿔놓았다. 원래 1박 2일로 예정했던 일정이 어느새 3박 4일로 늘어난 것이다.


[크기변환]0P4A2397.JPG 송쿨에 비하면 콜루콕은 정말 작은 호수다. 그래서 유르트도 몇 개 없다.


"이곳 코치코르에서 갈 수 있는 여행지 중 '콜루콕'이라는 곳이 있어요.
송쿨만큼 유명하진 않지만 정말 아름다운 호수죠."


유명하지 않다니, 그 한마디가 마음을 흔들었다. 검색창에 ‘콜루콕’를 입력하자 낯선 풍경이 펼쳐졌다. 에메랄드빛 호수, 설산에 둘러싸인 초원, 그리고 손에 꼽을 만큼 몇 개 없는 유르트. 화면 속 고요함이, 우리가 그동안 찾아 헤매던 평온과 닮아 있었다. 무심코 스크롤을 내리다 보니 이런 문장이 눈에 들어왔다. “송쿨호수는 누구나 가지만, 콜루콕은 진짜 여행자들이 가는 곳이다.” 그 한 줄이 이상하게 오래 남았다. 남들 다 가는 유명한 관광지가 아닌, 낯설고 조용한 곳. 내 마음이 바로 그런 곳을 원하고 있었던 듯 했다.


IMG_5799.JPEG 시시때때로 바뀌는 콜루콕의 물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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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MG_5850.JPEG 광활한 대자연 속에 작은 점 같은 존재임을 느낄 수 있었던 시간


콜루콕은 코치코르에서 차로 한 시간 남짓 떨어진 곳이지만 대중교통이 없다. 4X4 SUV 차량이나 마을 택시, 혹은 투어를 이용해야만 닿을 수 있는 곳이었다. 우리는 3박 4일 동안 함께 움직일 드라이버 동행 투어를 신청했다. 차량과 숙박, 식사까지 포함된 패키지였고, 일정은 콜루콕에서 1박, 송쿨호수에서 2박을 하는 구성이었다. 다음 날 아침 여덟 시에 출발하기로...


이튿날 아침, 우리가 묵던 호스텔 앞에 SUV 한 대가 멈춰 섰다. 운전기사는 스무 살이 갓 넘었을까 싶은 앳된 얼굴의 청년이었다. 영어는 거의 하지 못했지만 서글서글한 눈매에 맑은 에메랄드빛 눈동자를 지니고 있었다. 이름은 알리. 말보다 웃음으로 마음을 전하는 사람이었다. 그는 트렁크를 열어 짐을 싣고, 짧게 “레디?(물론 키르기스탄어로)”라고 묻더니 차를 출발시켰다.


4WD SUV를 타고 울퉁불퉁한 산길을 끊임없이 달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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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박 4일 동안 콜루콕과 송쿨을 함께할 드라이버 동행 투어를 신청했다.


코치코르를 벗어나 콜루콕으로 향하는 길은 어느샌가 흙길로 바뀌었다. 산자락을 따라 굽이치는 길 위로 양떼가 천천히 걸었고, 하늘은 점점 흐려지더니 급기야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그 와중에도 아이는 덜컹거리는 차 안에서 눈을 붙여 잠이 들었고, 남편은 연신 창문 너머로 카메라를 들이댔다. 그리고 그럴 때마다 알리는 아무 말 없이 속도를 늦췄다. 언어는 통하지 않아도 그의 행동에는 섬세한 배려가 묻어 있었다. 그런 순간이 낯선 길 위에서 이상하리만큼 따뜻하게 느껴졌다.


0P4A2520_1.jpg 바람이 불지 않은 때, 완벽한 반영이 아름다운 콜루콕


길이 끝나는 곳에서 차가 멈췄다. 하늘과 땅이 맞닿은 자리, 그곳에 콜루콕이 있었다. 낮에는 햇살이 따뜻했고, 바람도 그리 차지 않았다. 하지만 해가 서쪽 능선 너머로 천천히 내려앉자 공기는 순식간에 달라졌다. 바람이 얼굴을 스치자마자 차가운 기운이 피부 속으로 스며들었고, 공기는 믿기 어려울 만큼 투명해졌다. 호수는 산맥의 품 안에 고요히 누워 있었고, 그 물빛은 시간에 따라 옥빛에서 은빛으로, 또 다시 검은빛으로 변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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콜루콕의 유르트와 푸세식 화장실. 전기도 물도 없다.


콜루콕의 유르트 캠프는 소박했다. 화장실은 푸세식이었고, 전기도 온수도 없었다. 해가 완전히 지자마자 세상은 단숨에 어두워졌다. 유르트 안에는 난로가 하나 있었는데, 주인이 말린 소똥—'kizyak(кизяк)'이라 부르는 유목민의 전통 연료—을 넣어 불을 피워주었다. 불꽃이 타오르는 때는 그 온기가 천막 안을 뜨겁게 데웠지만, 새벽이 되어 불이 서서히 잦아들자 차갑고 고요한 공기가 빠르게 스며들었다. 천막을 가득채운 찬 공기에 우리는 이불 속에서 서로의 체온을 느끼며 몸을 웅크렸다. 숨을 들이쉴 때마다 찬 공기가 폐를 스쳤고, 그 깨질듯한 차가움은 묘하게 살아 있음을 느끼게 해주었다.


콜루콕의 밤은 유난히 길었다. 난로의 불이 꺼지고, 숨결이 하얗게 피어오르던 새벽, 나는 이불을 고쳐 덮으며 생각했다. 우리가 함께 있다는 것, 그것만으로 충분했다. 문명에서 멀리 떨어질수록 마음은 오히려 가까워졌다. 모든 것이 멈춘 듯한 정적 속에서, 우리의 온기만이 세상의 흔적처럼 남아 있었다.




2. 송쿨 (Song-Köl, Соң-Кө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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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P4A3400.JPG 송쿨의 낮과 밤


키르기스스탄의 중심부, 해발 약 3,016미터의 고원 한가운데 자리한 ‘송-쿨(Song-Köl, Соң-Көл)’은 ‘세상과 단절된 호수’라 불릴 만큼 고요하고 순수한 곳이다. 길고 험한 산길을 넘지 않으면 닿을 수 없는 그곳에선 도시의 소음이나 문명의 흔적이 거의 느껴지지 않는다. 대신 끝없는 초원과 설산, 그리고 하늘이 거울처럼 비치는 호수가 있을 뿐.


[크기변환]DJI_0089_1.jpg 송쿨로 가는 길, 없는 길을 만들어 달리는 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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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 3박 4일 동안 운전을 해준 키르기스스탄의 청년 / (우) 키르기스스탄 송쿨의 아이들


‘송쿨(Song-Köl)’이라는 이름은 키르기스어로 ‘마지막 호수’를 뜻한다. ‘Соң(Soñ)’은 ‘끝’ 혹은 ‘마지막’을, ‘Көл(Köl)’은 ‘호수’를 의미한다. 이름처럼, 송쿨은 마치 세상의 끝자락에 닿은 듯한 고요함을 품고 있다. 실제로 지도 위에서 송쿨은 도로가 끝나는 지점, 인간의 손길이 거의 닿지 않는 자리쯤에 놓여 있다. 유목민들이 여름 유목의 마지막 시기를 보내는 고원이라 ‘마지막 호수’라는 이름이 붙었다는 설도 있다.


하지만 현지 사람들 중 일부는 송쿨을 ‘새들의 호수’라고 부른다. 여름이면 수많은 철새들이 이곳으로 날아와 둥지를 트는데, 그 장면은 하늘이 호수 위로 내려앉은 듯 장관이라 한다. 그래서 사람들은 이곳을 ‘노래하는 호수’, 혹은 ‘새의 호수’라고도 부른다. 언어학적으로는 ‘마지막 호수’가 정확한 뜻이지만, 나는 그 두 해석이 모두 이곳을 닮았다고 느꼈다. 세상의 끝 같고, 동시에 생명이 머무는 곳. 고요하지만 살아 있는 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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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P4A3241.JPG 송쿨호수의 유르트와 초원 위 말과 소


송쿨호수는 키르기스스탄에서 이식쿨호수 다음으로 두 번째로 큰 담수호다. 면적은 약 270제곱킬로미터에 이르며, 겨울이면 완전히 얼어붙고, 오직 6월부터 9월까지의 짧은 여름 동안만 푸른 얼굴을 드러낸다. 여름철이 되면 유목민들이 가축을 데리고 이곳으로 올라오고, 초원 곳곳에는 ‘유르트(Yurt)’라 불리는 하얀 천막이 세워진다. 말을 타고 초원을 가로지르는 사람들, 볼이 빨간 키르기스스탄 아이들의 웃음소리, 천천히 흘러가는 구름. 그 모든 것이 이곳의 일상이다. 낮에는 양떼가 들판을 덮고, 밤이 되면 수천 개의 별이 하늘과 호수 위에 동시에 떠오른다. 전기가 들어오지 않아 밤 10시가 되면 모든 유르트가 소등되지만, 오히려 그 덕에 별빛이 더욱 선명하게 쏟아진다.


송쿨호수의 매력은 ‘단순함’에 있다. 화려한 호텔도, 식당도, 편리한 시설도 없다. 대신 자연의 리듬에 따라 하루가 흘러간다. 아침이면 얇은 서리가 초원을 덮고, 점심이면 바람이 호수를 흔들며 반짝이는 물결을 만든다. 오후에는 구름이 빠르게 흘러가며 빛의 그림자를 남기고, 밤이면 별빛이 세상을 덮는다. 이곳에서는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시간이 흘러간다. 오히려 그 느림 속에서 삶의 본질이 또렷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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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읽거나 물수제비를 뜨고 놀거나


송쿨을 찾은 여행자들은 대부분 말없이 풍경을 바라본다. 카메라 셔터를 누르기보다, 자연이 건네는 정적을 온몸으로 느낀다. 바람의 속도, 물결의 리듬, 별빛의 움직임에 맞춰 호흡하다 보면 문득 깨닫게 된다. 세상은 여전히 크고, 인간은 그저 그 안을 잠시 지나가는 존재일 뿐이라는 사실을.


그래서 송쿨이라는 이름은 하나의 풍경이자 이야기처럼 들린다. 그 안에는 계절의 끝이 있고, 새들의 날갯짓이 있으며, 유목민의 짧은 여름이 있다. ‘송쿨’이라는 두 음절 속에는 단어 이상의 시간이 담겨 있다. 그 이름을 천천히 발음해보면 바람이 불고, 호수가 흔들리고, 그 위로 새 한 마리가 날아오르는 장면이 자연스레 떠오른다.


0P4A3131.JPG 시간이 멈춘 듯한 공간.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하루가 지나간다.


송쿨호수는 단순한 여행지가 아니었다. 그곳은 ‘시간이 멈춘 듯한 공간’, 그리고 인간이 자연 앞에서 얼마나 작고도 아름다운 존재인지를 깨닫게 하는 한 페이지였다. 송쿨의 매력은 눈앞이 아니라, 마음속에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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