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비슈케크의 낭만적인 밤
알마티에서 출발해 촐폰아타를 지나, 카라콜과 알틴아라샨, 지르갈란을 거쳐 토소르에 닿았다. 그곳에서 우리는 잠시 멈췄다. 며칠 동안 이어진 낯선 길 위의 피로를 내려놓고, 호수의 고요 속에서 쉼을 배웠다. 하지만 길은 다시 우리를 불러 세웠다. 씻지도 못한 채 3박 4일 동안 콜루콕과 송쿨호수의 유르트에서 머물며 문명과 완전히 단절된 시간을 보냈다. 별빛이 천장을 대신했고, 새벽의 소 울음이 알람이 되어주던 시간들. 세상과 떨어져 지내는 며칠은 불편했지만, 그만큼 깊고 진한 평화를 남겼다. 그리고 마침내 문명의 빛에 닿았다. 키르기스스탄의 마지막 여행지, 비슈케크였다.
여행자들 사이에서는 ‘볼 것 없는 도시’, ‘재미없는 곳’으로 불리곤 했다. 하지만 여행이란 참 묘하다. 아무 기대 없이 찾아간 곳에서, 오히려 가장 진한 순간이 피어나곤 하니까.
우여곡절 끝에 도착한 숙소는 현대식 아파트(에어비앤비)였다. 도착하자마자 우리는 가장 먼저 욕실로 향했다. 뜨거운 물이 펑펑 쏟아지는 샤워기 아래 세상의 피로가 한순간에 씻겨 내려갔다. 그 단순한 사실 하나가 우리를 천국으로 데려다주었다. 송쿨의 차가운 밤공기 속에서 찬물로 손을 씻던 나날 뒤에 마주한 온수는 단지 씻음이 아니라, ‘살아있음’을 느끼게 하는 따뜻한 증거였다.
여행이란, 어쩌면 이런 순간을 만나기 위한 여정일지도 모른다. 일상에서 너무도 당연했던 것들이 낯선 곳에선 감사의 이유가 되고, 사소한 것 하나가 행복의 무게를 바꿔놓는다. 나는 아이가 그것을 느꼈으면 했다. 편안함의 반대편에, 우리가 잊고 있던 감사가 숨어 있음을...
지도를 펼쳐놓고 주변을 검색하다가 눈에 띈 곳이 있었다. ‘하이 알티튜드 익스트림 파크(High Altitude Extreme Park Arkan Tokoy)’. 이름부터 모험의 냄새가 났다. 나무 사이에 줄을 걸고 몸을 맡긴 채 건너는 어드벤처 코스, 아이와 함께하기에 제격이었다.
빽빽한 숲 사이로 이어진 그물과 밧줄의 모습에 마음이 먼저 설렜다. 평소 이런 액티비티에 익숙하다고 자부하던 나조차 손에 땀이 날 만큼 긴장되는 순간이 이어졌다. 바람이 나무 사이를 스치고, 나는 밧줄에 몸을 맡겼다. 두려움과 설렘이 뒤섞인 순간, 아이의 웃음소리가 숲의 공기를 가볍게 흔들었다. 그 소리는 두려움을 밀어내는 마법 같았다. 무엇보다 놀라웠던 건, 이 짜릿한 체험의 가격이 1인당 6,500원이라는 점. 커피 한 잔 값에 불과했다. 화려하지 않아도, 값비싸지 않아도, 자연스러운 즐거움이 존재하는 나라. 키르기스스탄은 언제나 그런 방식으로 우리를 놀라게 했다.
트리 액티비티를 마친 후, 우리는 어슬렁어슬렁 시내를 걸었다. 특별히 목적지가 있었던 건 아니었다. 여행의 마지막 도시였기에 그저 도시의 공기와 사람들의 표정을 느끼고 싶었다. 그러다 불현듯 눈앞에 넓은 광장이 펼쳐졌다. 바로 비슈케크의 중심, 알라투 광장(Ala-Too Square) 이었다. 광장 중앙의 분수대에서 물줄기가 리듬을 타며 솟구쳤고, 그 위로 조명이 색을 바꿔가며 밤하늘을 물들였다. 음악이 흘러나오고, 바람이 물방울을 실어와 얼굴에 닿았다.
아이는 그 광경을 보자마자 소리쳤다. “엄마! 나 저기 들어가도 돼?” 사실 말이 끝나기도 전에 이미 분수 쪽으로 달려가 있었지만... 분수 앞에는 온통 웃음과 함성으로 가득했다. 아이들은 물을 맞으며 소리쳤고, 연인들은 손을 맞잡고 사진을 찍었다. 벤치에는 아이스크림을 먹는 사람들이 앉아 있었고, 누군가는 음악에 맞춰 춤을 췄다. 비슈케크의 여름밤 광장은 그렇게 살아 있었다.
낮 동안 뜨거운 햇살에 달궈졌던 도시는, 밤이 되자 서늘한 물빛으로 식어갔다. 광장 위로 쏟아지는 빛과 분수의 물줄기가 어우러져, 마치 세상이 잠시 숨을 고르는 듯했다. 수천 개의 물방울이 하늘로 솟아올랐다가 이내 부서지고, 그 위로 다시 빛이 흩어졌다. 그 장면이 꼭 이번 여행 같았다. 길 위에서 수많은 순간이 반짝였다가 사라지고, 그 자리에 작은 빛처럼 기억이 남았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고 나서야 깨닫는다. 흩어져버렸지만 결국 마음속에 가장 깊게 남는다는 것을.
숙소로 돌아오는 길, 나는 아이의 손을 꼭 잡았다. 젖은 손끝에서 뜨거운 체온이 느껴졌다. 밤공기는 부드러웠고, 두 뺨엔 여름 바람이 스쳤다. 아이의 작은 손을 잡고 생각했다. 여행은 결국 ‘어디로 가는가’보다 ‘어떤 마음으로 걷는가’의 이야기라는 걸. 낯선 풍경 앞에 설 때마다 깨닫는다. 익숙함 속에서 얼마나 많은 감정을 잊고 살아왔는지, 그리고 아무리 작고 하찮은 순간일지라도 그 마음은 언제든 깨어날 수 있다는 것을.
화려하지 않지만, 진심이 담긴 마지막 장면. 분수의 물줄기처럼 솟았다가 흩어지는 시간 속에서 나는 문득 깨달았다. 우리가 가는 곳마다, 이야기가 자란다는 것을.
여행은 결국 ‘어디로 가는가’보다
‘어떤 마음으로 걷는가’의 이야기라는 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