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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복하는데 3일, 피곤해지는데 세 시간

키르기스스탄의 휴식이 지나간 자리

by 미나리즘


키르기스스탄의 여행은 언제나 그렇듯,
계획이 아니라 순간의 판단으로 이어졌다.
타보면 길이 보였고,
움직이면 방법이 생겼다.



토소르에서의 온전한 쉼이 끝났다.

키르기스스탄이라는 나라에서 ‘안락함’을 느끼는 건 쉽지 않았지만, 토소르만큼은 달랐다. 해가 지면 호수 위로 별빛이 내려앉고, 그 빛이 잔잔히 흔들리며 공간을 채웠다. 호수에 비친 하늘은 날마다 다른 색으로 물들었고, 그 변화를 바라보는 일만으로도 하루가 채워졌다. 세상과 단절된 듯한 고요 속에서 마음은 충분히 가벼워졌다. 휴대폰을 내려놓아도, 시간을 잊어도 전혀 불안하지 않았다.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되는 하루하루가 흘렀다. 아무것도 하지 않았는데, 이상하게 모든 것이 충만해졌다.


여행자들 사이에 자리잡은 열 살의 여행자


다시 길 위로 나설 시간

다음 목적지는 코치코르(Кочкор/Kochkor). 문제는 가는 방법이었다. 대부분의 여행자는 수도인 비슈케크에서 향하기 때문에, 작디작은 마을인 토소르에서 출발하는 노선에 대한 정보는 인터넷 어디에도 없었다. 숙소 주인에게 물으니 “열 시쯤 마슈르카가 있을 거야”라며 직접 버스정류장까지 태워다 주었다. 정류장엔 우리처럼 커다란 배낭을 멘 여행자들이 열댓 명쯤 서 있었다. ‘이 정도면 확실한 정보겠지’ 싶었지만 한 시간이 지나도, 한 시간 반이 지나도 버스는 오지 않았다.


토소르, 허름한 버스정류소의 여행자들


아무리 기다려도 버스가 오지 않았다. 누군가는 히치하이킹을 시도했고, 누군가는 알 수 없는 언어로 어디론가 전화를 걸었다. 다양한 언어가 뒤섞인 정류장은 혼란스러웠다. 그러던 중 낡은 밴 한 대가 정류장 앞에 멈춰섰다. 알고 보니 두 팀이 돈을 합쳐 부른 쉐어 택시였다. 남편이 망설임 없이 그들 곁으로 다가가더니 손짓과 단어 몇 개로 빠르게 상황을 파악했다. 운전사와 여행자들 사이에서 능숙하게 대화를 이끌어가는 그는, 역시 베테랑 여행자다웠다. 목적지가 다르다는 걸 알아차리고도, 중간 도시까지만 함께 가자는 조건을 제시했고, 몇 마디의 협상 끝에 고개가 끄덕여졌다. 우리는 재빨리 남아 있던 세 자리로 몸을 밀어넣었다.


키르기스스탄 여행은 인터넷 정보가 아니라 길 위의 순간 판단이 여행을 좌우한다.



키르기스스탄의 여행은 언제나 그렇듯,
계획이 아니라 순간의 판단으로 이어졌다.
타보면 길이 보였고,
움직이면 방법이 생겼다.



차량이 출발하자마자 거친 흙길을 내달렸다. 바퀴가 땅을 세게 때릴 때마다 차체가 요동쳤고, 창문 틈새로는 바람과 흙먼지가 함께 스며들었다. 오늘도 차창 유리엔 금이 가 있었다. 안전벨트도 없는 차였지만 속도계는 시속 80km가 훌쩍 넘어 있었다. 처음이라면 아찔했을 장면이지만, 이제는 그조차 낯설지가 않았다. 며칠째 이어진 길 위의 생활 덕분에, 이제 웬만한 일은 놀랍지도 않았다.


열 살의 배낭여행자


쉬는 데는 사흘이 걸렸고, 다시 피곤해지는 데는 세 시간이면 충분했다. 몸은 피로했지만, 마음은 오히려 단단해져 있었다. 투박하지만 살아 있는 땅, 거칠지만 대자연을 느낄 수 있는 진짜 여행의 시간이었다. 창밖으로 붉은 산맥이 흐르고, 초원 위에는 말과 양떼가 점처럼 흩어졌다.


몇 시간을 달린 끝에 발릭치에 도착했다.

계획도, 정답도 없는 여정 속에서도 결국 또 다음 도시에 닿았다는 사실이 그저 뿌듯했다. 그곳에서 최종 목적지인 코치코르행 마슈르카에 몸을 실었다. 창밖으로 흙먼지가 금빛으로 일렁였다. 토소르의 평화로부터는 멀어졌지만, 새로운 모험이 우리 앞에 펼쳐져 있었다.



다음 목적지는 해발 3,000미터, 하늘과 가장 가까운 곳 — 송쿨호수다.


송쿨호수, 사진으로 미리보기


연재 안내
란 패밀리의 기록을 기다려주시는 분이 있다는 것. 그 마음에 힘을 얻어 기쁘게 연재를 합니다. 매주 화·목·토 - 일주일에 세 번, 중앙아시아 가족 여행기를 전해드릴 거예요. 사진은 최대한 현장 느낌이 잘 나는 것으로 골라봅니다.

글을 읽는 분들께 작은 온기를 더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중앙아시아 여행이나 아이와 함께하는 배낭여행에 대해 궁금한 점이 있으시면 언제든 댓글 남겨주세요. 연재에 큰 힘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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