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카즈카 캐년, 동화 속으로 들어가기 위한 험난한 여정
동화 속으로 들어가기 위한
그 험난한 여정
토소르에서 지낸 3박 4일 중 둘째 날, 우리는 계획대로 스카즈카 캐년(Skazka Canyon)에 다녀오기로 했다. 지도상으론 차로 10분 남짓한 거리였지만, 키르기스스탄에서의 ‘10분’은 한국과는 전혀 다른 의미였다. 도로는 온통 비포장이었고, 숙소 주변엔 차가 아예 없었다. 작은 마을 토소르에는 택시가 없었기 때문에, 택시를 부르면 옆 마을에서 넘어 와야만 했다. 그만큼, 요금은 상상 이상이었고.
스카즈카 캐년까지 어떻게 가야 할지 고민하던 찰나, 어제 호숫가에서 만난 한국인 여성 두 분이 오늘 카라콜로 가는데, 본인들의 택시 기사에게 부탁해 우리를 캐년 입구까지 태워다주겠다고 했다. 다행히 기사님은 흔쾌히 허락했고, (당연히 추가 요금을 요구할 줄 알았는데) 20여 분쯤 돌아가는 길임에도 덤 요금을 받지 않았다. 길 위의 친절은 늘 이렇게 불쑥 찾아왔다. 우리는 그 마음이 고마워 작은 정성을 전했다.
그 길은 문명의 손길이 전혀 닿은 흔적이 없는 흙바닥이었다. 길이 맞는지조차 불안할 만큼 아무 표시도 없었지만, 차 안에는 이미 이 길을 다녀온 여행자들이 있었고, 기사도 익숙한 듯 차를 몰았다. 차가 달릴 때마다 붉은 먼지가 파도처럼 일었고, 창문을 열면 사막의 냄새가 스며들었다. 뜨거운 흙, 바람, 그리고 낯선 풍경의 냄새였다.
“스카즈카는 러시아어로 ‘페어리테일’, 동화라는 뜻이래.”
“엄마! 여긴 진짜 책 속보다 멋진 동화야.”
캐년 입구에 들어서자 붉고 주황빛의 흙산들이 부드럽게 굽이쳤다. 겹겹이 쌓인 흙의 결이 시간의 흔적처럼 이어지고, 햇빛은 그 위를 날카롭게 베고 지나갔다. 멀리서 보면 유연한 능선이지만, 가까이 다가가면 바람과 비가 새긴 상처가 그대로 남아 있었다. 발밑의 흙은 오래 굳은 진흙이었다. 능선을 따라 한 걸음 한 걸음 걸어보니 지나온 시간 위를 건너는 듯한 느낌이었다.
해가 높을 때는 캐년 전체가 숨 막히게 달아올랐가 오후가 되어 햇살이 기울기 시작했고, 붉디 붉은 바위의 색이 천천히 식어갔다. 붉은빛이 점점 눅눅해지고, 그림자가 길어지며 능선 사이로 스며들었다. 뜨거움이 물러나자 비로소 바위의 결이 눈에 들어왔다. 이곳의 시간은 누구의 손에도 닿지 않은 채, 그저 바람과 햇빛에 의해 천천히 만들어지고 있었다.
이제 돌아갈 길이 걱정이었다. 차가 있을 리 없다는 걸 알면서도 우리는 그냥 걸었다. 언젠가 지나가는 차가 있겠지, 그때 손을 들어보자고. 해는 이미 산 너머로 기울고, 캐년 입구의 공기는 빠르게 식어갔다. 스무 대쯤의 차가 우리를 지나쳤다. 대부분 여행사 차량이라 빈자리가 없었고, 운전사들은 어깨를 으쓱하며 미안하다는 눈빛을 남기고 흙먼지를 일으키며 사라졌다.
그러다 마침내 한 대의 차가 멈췄다. 창문이 열리며 “토소르?” 하는 짧은 말이 들렸다. 그 한 마디가 그렇게 반가울 수가 없었다. 우리 열 살 딸은 그렇게, 생에 두 번째 히치하이킹에 성공을 했다.
그렇게, 스무 대 쯤의 차를 그냥 보내고 마침네 히치하이킹에 성공해 토소르로 돌아왔다. 주린 배를 채우기 위해 첫날 배낭이 너무 무거워 들어갔던 카페 겸 레스토랑으로 향했다. 작은 마을의 저녁은 빠르게 어두워졌고, 식당 안은 사람들로 붐볐다. 우리가 시킨 음식이 잔뜩 나왔는데, 모두 합쳐도 만 원 남짓이었다. 그 사이 바람이 심상치않게 거세졌다.
그러다 갑자기 눈앞에 깜깜해졌다. 순식간에 온 마을이 정전이었다. 우리는 이제 막 나온 음식들을 비닐봉지에 주워담은 채 스마트폰 불빛을 켜고 서둘러 숙소로 향했다. 빗방울이 점점 굵어졌고, 바람이 옷깃을 파고들었기 때문이다. 두려울 법도 한데 아이는 손전등 놀이를 하듯 불빛으로 길에 그림자를 만들었다. 그림자는 흔들리며 춤을 췄고, 어둠에 익숙해진 우리는 어느새 노래를 흥얼거리며 걸었다.
차가운 밤공기 속, 우리 셋의 그림자만이 길게 늘어졌다. 그날 밤, 불빛 하나 없는 숙소에서 아이의 숨소리를 들으며 생각했다. 여행은 완벽한 계획의 연속이 아니라, 예상치 못한 일의 연속이라는 걸. 길이 끊겨도, 전기가 나가도, 아이의 웃음은 꺼지지 않았다. 그저 우리를 믿고 따라왔다. 그리고 아이의 그 철썩같은 (부모에 대한) 믿음이, 이 낯선 땅에서 우리의 불빛이 되어준다.
연재 안내
란 패밀리의 기록을 기다려주시는 분이 있다는 것. 그 마음에 힘을 얻어 기쁘게 연재를 합니다. 매주 화·목·토 - 일주일에 세 번, 중앙아시아 가족 여행기를 전해드릴 거예요. 사진은 최대한 현장 느낌이 잘 나는 것으로 골라봅니다.
글을 읽는 분들께 작은 온기를 더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중앙아시아 여행이나 아이와 함께하는 배낭여행에 대해 궁금한 점이 있으시면 언제든 댓글 남겨주세요. 연재에 큰 힘이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