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멈춤이 여행이 되는 순간

이식쿨 호수의 남쪽 휴양지, 토소르

by 미나리즘


열 살 아이와 함께하는
키르기스스탄 배낭여행이 어느새
중반을 넘어섰다.


개구쟁이 열 살 딸과 배낭여행 중입니다.


카라콜에서 부지런히 볼거리를 즐기고, 트레킹으로 이틀을 꽉 채웠다. 그 후 우리는 남쪽의 작은 마을, 토소르로 향했다. 이식쿨 호수의 남쪽 해안에 자리한 조용한 마을이다. 유명한 관광지인 스카즈카 캐년만 하루 다녀오고, 나머지는 푹 쉬기로 했다. 장기 여행 중 쉬는 단 며칠이, 얼마나 달콤한지 여행 좀 해 본 사람은 알 것이다.


이식쿨 호수의 남쪽 휴양지, 토소르

카라콜에서 토소르로 향하는 마슈르카(미니버스)를 가까스로 잡아탔다. 좌석은 이미 만석이었고, 우리는 사람들 틈에 비스듬히 선 채 두 시간 가까이 흔들리며 달렸다. 좁은 통로를 비집고 들어온 햇살 속에 먼지가 반짝였고, 공기는 점점 뜨거워졌다. 한 시간 반쯤 지났을 때, 깨진 차창 너머로 도로를 따라 이식쿨 호수가 길게 펼쳐졌다. 그리고 얼마 후, 우리는 흙길 한 켠에 덩그러니 떨궈졌다.


이곳이 토소르의 버스 정류장이다.


숙소들이 모여 있는 부근까지는 걸어서 20분 거리. 하지만 그 길은 실제 거리보다 훨씬 더 멀게 느껴졌다. 배낭의 무게는 천근만근이었고, 말라붙은 흙길은 울퉁불퉁해 캐리어의 바퀴가 자꾸만 걸렸다. 한 걸음, 또 한 걸음. 등에 맺힌 땀이 식기도 전에 다시 흘렀다. 그대로 주저앉고 싶을 즈음, 허름한 간판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카페라 하기엔 어설프고, 레스토랑이라 부르기엔 너무도 소박한, 그 사이쯤의 공간이었다. 우리는 일단 그곳으로 들어가 자리를 잡았다.


알고보니 토소르의 '핫플' 레스토랑 (토소르에 레스토랑이 두어 개 밖에 없다.)


안은 생각보다 넓었다. 오후의 빛이 잎사귀 틈으로 스며들며 낡은 탁자 위에 부드럽게 내려앉았다. 땀이 식을 때 즈음 식탁 위로 주문한 ‘아쉬란푸(Ashlan-Fu)’가 올라왔다. 혹자는 아쉬란푸를 '김치말이 국수'에 비유하지만, 필자가 느끼기엔 그보다 냉면에 가까웠다. 투명한 면발이 시원한 국물에 떠 있고, 새콤한 향이 코끝을 간질였다. 톡 쏘는 맛과 부드러운 면발이 의외로 잘 어울리는 키르기스스탄의 전통 음식이다.


처음엔 그저 지친 몸을 달래기 위해 들른 곳이었는데, 나중에 보니 토소르 사람들은 다들 이곳으로 모여드는 듯했다. 언제나 손님이 끊이지 않았고, 식당 안에서 작은 마을의 하루가 바삐 흘렀다.


필자의 입맛에 잘 맞았던 토소르의 아쉬란 푸와 과일 주스


오늘도 작전 회의다!

식사를 마치고, 오늘도 작전 회의를 열었다. 오늘도 숙소 예약을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남편과 아이가 숙소를 찾으러 가고, 나는 짐을 지키며 자리에 남았다. 예전엔 부부 둘이서만 하던 일이었는데, 이제는 아이가 함께 있다. 여행의 주체가 둘에서 셋이 된 지금, 우리는 다시 예전처럼 배낭여행자의 리듬으로 움직였다. 그리고 그 사이에서 아이는 이미 어른 못지않게 역할을 나누고 있었다. 아빠와 함께 숙소를 찾아 나서는 그 작은 뒷모습이 어쩐지 든든했다.


한 시간 후 쯤, 숙소를 찾으러 떠났던 두 사람이 반가운 얼굴로 돌아왔다. 그리고 그들이 전한 소식은 기대 이상이었다. 키르기스스탄 여행 3주 중 가장 마음에 드는 숙소를 찾은 것이다. 좋다는 건 단순히 시설을 뜻하는 것만은 아니었다. 지르갈란의 숙소가 B&B 주인의 온기로 기억된다면, 토소르의 숙소는 마음이 고요히 내려앉는 곳이었다. 공간이 주는 평화라는 게 있다면, 아마 그곳일 것이다.


토소르 제일의 숙소 '에이프레임'


토소르 제일의 숙소, 에이프레임

우리가 묵은 숙소의 이름은 ‘에이프레임’. 호숫가에서 가까운, 삼각지붕의 나무집이다. 문을 열면, 코앞(걸어서 3분)이 이식쿨이었다. 바다처럼 넓고, 바다보다 잔잔한 호수. 물은 유리처럼 투명했고, 바람은 비단처럼 부드러웠다. 햇살이 수면 위에 부서지며 반짝일 때면, 마치 시간이 천천히 흐르는 것 같았다. 호수의 물결은 잔잔히 숨 쉬고 있었고, 하늘은 끝없이 열려 있었다. 그 풍경 안에서는 아무 말도 필요 없었다.


당시 감기몸살 때문에, 이식쿨의 북쪽 도시인 촐폰아타에서 5일을 쉬어야했지만 다시 돌아간다면 그 시간을 토소르에 서 보내고 싶다. 촐폰아타가 이식쿨 북쪽의 북적이는 휴양지라면, 남쪽의 토소르는 매우 조용하고 한적한 안식처였다. 규모는 작았지만, 오히려 그 작음이 주는 여백이 마음을 놓이게 했다. 누군가 둘 중 하나를 추천해달라고 묻는다면, 나는 주저 없이 토소르라 답할 것이다.


토소르에서의 휴식


이식쿨 호숫가는 놀라울 만큼 한적했다. 호수 전체를 통틀어도 여행자는 우리를 포함해 단 세 팀뿐이었다. 우리 세 식구 외에, 여자 둘이 함께 온 팀과 남자 셋이 함께 온 팀. 그중 여자 팀은 우연찮게도 한국인이었고, 그들이 빌린 패들보트를 잠시 얻어 타게 되었는데...


물 위에 몸을 맡기자 바람이 등을 밀었다. 물결이 살짝 흔들릴 때마다 세상 전체가 출렁이는 듯했고, 머리 위로는 끝없이 푸른 하늘이 열려 있었다. 위와 아래, 모두가 같은 푸름으로 이어져 마치 하늘을 떠다니는 듯한 착각도 들었다. 그 순간만큼은 아무 걱정도, 목적도, 다음 일정도 없었다. 오직 지금, 이 고요함 속에 있었다.



여행을 오래 하다 보면
이 휴식의 시간이 얼마나 귀한지 알게 된다.


열심히 걷고, 보고, 느낀 끝에 찾아오는 쉼의 시간. 그 며칠이야말로 여행의 가장 순수한 보상이다. 우리는 패들보트를 빌려준 한국인 여행자를 숙소로 초대해 라면을 끓여 함께 나눠 먹었다. 호수 위로 어둠이 내려앉고, 수면은 별빛을 담기 시작했다. 그렇게 하루가 천천히 식어갔다.


열 살 꼬마 배낭 여행자
연재 안내
란 패밀리의 기록을 기다려주시는 분이 있다는 것. 그 마음에 힘을 얻어 기쁘게 연재를 합니다. 매주 화·목·토 - 일주일에 세 번, 중앙아시아 가족 여행기를 전해드릴 거예요. 사진은 최대한 현장 느낌이 잘 나는 것으로 골라봅니다.

글을 읽는 분들께 작은 온기를 더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중앙아시아 여행이나 아이와 함께하는 배낭여행에 대해 궁금한 점이 있으시면 언제든 댓글 남겨주세요. 연재에 큰 힘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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