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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8. 큰손

by 선인장

생각 외로 카페의 큰 손은 초딩들이다.


1인 1잔, 디저트 필수 주문, 음료도 커피가 아닌 스무디, 버블티, 프라페 종류로 객단가도 높은 편이다. 음료를 같이 마시는 경우가 거의 없다. 다른 카페보다 일부 음료의 양이 많은 경우가 있어 두 명이 와서 한 명만 주문할 경우 음료를 나눠줄까 물은 적이 있는데, 너무 단호하게 거절해서 민망했던 기억이 있었다. 그 후로 더 이상 초딩들에게는 이 부분과 관련하여 묻지 않았다.


초등학교 하교 시간이 되면 초딩들이 삼삼오오 무리를 지어 카페로 들어선다. 초딩친구들은 각자의 주문을 끝내고 자리로 돌아간다. 때때로 카드의 잔액이 모자랄 경우에는 곧바로 엄마에게 전화를 걸어 카페에서의 상황을 설명한 후 충전을 요구한다. 그럴 때마다 내가 초딩들한테 돈을 뺐는 기분이 들어 민망함이 밀려오곤 한다. 그들의 대화는 대부분이 친구들의 뒷담화다. 화를 내다가 웃다가 카페 안은 순식간에 아이들의 목소리로 가득해진다. 나는 욕만 하지 않으면 시끄러워도 딱히 뭐라고 하지 않는다. 일부 성인들도 목소리가 큰데 아이들에게만 주의를 주는 내 모습이 어느 순간 모순적이라 느껴 그 이후에는 연령에 상관없이 모든 손님에게 형평성을 부여하고 있다. 다만 조용한 손님들이 눈치를 줄 경우에만 얘기를 할 뿐이다. 그럴 경우 순식간에 조용해지지만 바로 시끄러워져서 딱히 효과가 없다. 나 또한 천방지축이었던 시절이 있었기 때문인지 관대해진다.


일부 아이들은 당돌하면서도 말에 거침이 없다. 예의가 없다는 것이 아니고 본인 의견을 가감 없이 직선적으로 잘 표현한다는 의미이다. 개업 초기 에그샌드위치를 먹고 내 앞에서 갑자기 품평을 하는 초딩이 있었다. 초딩한테 지적을 당한다는 것이 당장은 표정관리가 되지 않았지만 그 친구의 조언으로 더 나은 결과를 얻을 수 있었다. 또한, 그 친구들의 입소문으로 인해 초딩손님들도 많이 늘었고, 그 친구들이 좋아했던 머랭 쿠키가 개업 초기 수익의 큰 부분을 차지했다. 이렇듯 개업 초기 초딩친구들의 도움을 많이 받았다.


어느 날인가! 그날도 단골초딩 서너 명이 카페 안으로 들어섰다. 그런데 그중 한 명이 카페에 들어오자마자 테이블에 엎드려 얼굴을 묻고 소리 내어 울기 시작했다. 카페 안의 손님들이 갑작스러운 상황에 잠시 당황하는듯했지만, 이내 다시 본인들의 대화에 집중했다. 같이 온 친구들이 우는 친구를 감싸 안자 울음소리는 더욱 커졌다. 나는 조용히 다가가 냅킨을 테이블 위에 놓은 후 카운터로 돌아왔다. 울음소리가 잦아들자 그중 한 친구가 음료를 주문하고 모자랐는지 냅킨을 더 가져갔다. 울먹거리는 목소리 사이로 조금씩 대화 내용이 들리기 시작했다. 친구와 남자친구의 배신 대략 이런 내용이었다. 같이 온 친구들은 본인의 일인 것처럼 격한 공감을 표시하며 친구를 위로했다. 중간중간 욕이 들렸지만, 오늘은 그냥 넘어가기로 했다.


아날로그에서 디지털 시대로 바뀌면서 우리가 원하든 원치 않든 많은 정보에 노출된다. 그래서 생각 외의 고민거리도 많아진다. 오롯이 본인에게 집중한 고민이 아닌 급속도로 변화하는 세상 속에서 피하기 힘든 타인과의 비교로 다양한 부분에서 많은 스트레스를 받게 된다. 뭐가 좋다고 단정 짓기는 힘들지만 단순한 나에게는 아날로그 시대가 맞는 것 같다.


쓸데없는 생각을 하고 있던 중 카톡 소리가 울렸다. 정미였다. 정미는 대학교 동창으로 현재 두 명의 자녀를 둔 유부녀다. 대학교 때는 하루가 멀다 하고 새벽까지 술집을 전전했었는데 지금은 그럴 체력도, 시간도 없다. 정미는 자녀들이 고등학생이 된 후 그나마 시간적 여유가 생겼다. 그 이후 가깝지 않은 거리임에도 몇 번 가게로 와서 짧은 대화와 함께 디저트를 사가곤 했다.


-간만이네. 잘 지냈는가

-나야. 뭐 그렇지. 언제 쉬어?

-왜?

-나 직장 그만뒀거든. 너 쉬는 날 만나서 밥이나 먹게.


정미는 실직도 취업도 쉬운 친구다. 이런 불경기에 참 대단하다.

탁상달력을 보니 때마침 다음 주 수요일이 휴일이다.


-다음 주 수요일이 쉬는 날이네. 괜찮아?

-응, 괜찮아

-장소는 네가 정해.

-그래. 알았어. 그때 보자

-그래. 쉬셩


결혼 전 정미가 떠올랐다. 결혼 직전 남편 얘기를 하며 울었던 적이 있었다. 대화의 내용이 상세하게 기억나지는 않지만, 청첩장이 인쇄된 상황에서 뜻밖의 컸던 남편 거짓말로 결혼을 해야 하는지 말아야 하는지 고민이 많았었던 것 같다. 그때의 나도 지금의 초딩 친구들처럼 우는 정미를 위로해 주었던 게 생각이 난다. 다만 장소의 차이가 있었다. 그때는 카페가 아닌 호프집이었다. 그때도 그렇고 지금도 딱히 변함없는 친구 남편이 맘에 들지 않아서 그 부분에 대해서는 웬만하면 거론하지 않으려 한다.


이렇듯 나이와 상관없이 이성에 대한 고민은 삶의 많은 부분을 차지한다. 나야, 미혼이기도 하고, 이성에 딱히 관심이 없어 그 결과 연애 경험도 적다. 그래서 이런 부분에 대한 고민은 많지 않았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갑자기 씁쓸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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