휴일임에도 불구하고 6시면 자연스럽게 눈이 떠진다. 더 잘까 잠깐 고민을 했지만 배가 고파 일어나기로 했다. 고양이 세수를 하고 냉장고 문을 열었다. 저번 주에 갖다주신 엄마의 반찬이 보였다. 냉동고에는 사골국과 냉동밥이 1인분씩 소분되어 있었다. 엄마의 꼼꼼함과 세심함이 느껴졌다. 끓인 사골국과 해동된 밥, 밑반찬을 식탁에 올려놓았다. 오늘은 엄마한테 전화를 해야겠다는 다짐을 하며 오래간만에 여유롭게 아침을 먹었다. 여유로운 아침식사를 끝내고 설거지를 위해 자리에서 일어났다. 다른 건 몰라도 싱크대가 지저분한 것은 싫어해서 최대한 설거지는 바로 하는 편이다.
미뤄놓았던 집 청소와 빨래를 하기 위해 집안 창문을 모두 열었다. 내리쬐는 햇빛으로 눈이 부셨다. 세탁물을 세탁기에 넣어놓고, 청소기를 들었다. 청소기 손잡이에 힘을 주니 손목에 작은 통증이 느껴졌다. 아무래도 정형외과를 다녀와야겠다. 집 청소와 빨래를 끝내고 외출 준비를 했다. 오랜만에 입은 루스 핏 티셔츠와 슬랙스가 작게 느껴졌다. 인정하고 싶지 않았지만, 확실히 살이 찐 모양이다.
도착한 정형외과는 이미 많은 사람들이 대기 중이었다. 30분을 기다린 후에야 간단한 상담과 함께 물리치료를 받을 수 있었다. 물리치료를 받은 그 짧은 시간 동안 깊은 잠을 잔 듯 개운했다. 조금은 나아진 팔을 스트레칭하며 정형외과를 나왔다. 그리고 저번에 미처 사지 못한 아아를 사기 위해 집 앞 카페로 향했다. 점심시간 때라 생각 외로 사람이 너무 많았다. 목에 걸고 있는 사원증을 보니 근처 관공서 직원들인 모양이었다. 집에 갔다가 다시 올까 잠깐 고민을 했지만 오늘은 시간도 많으니 기다렸다 마시고 가야겠다고 결론을 내렸다. 사장님은 언제나 그렇듯 반가운 미소를 지으며 인사를 건네셨다.
-오~ 휴일이신가 봐요?
-네. 그래서 오늘은 마시고 가려고요.
-아아 드릴까요?
-네.
-잠시만 기다리세요.
아르바이트생이 음료를 준비하고 사장님이 주문을 받았다. 카페에 자주 오기도 하고 쇼케이스에 진열된 디저트를 구경하는 재미가 쏠쏠해서 손님이 없을 때는 사장님과 대화를 좀 나누는 편이다. 그래서 사장님은 내가 김성모 베이커리에서 근무하고 있다는 것도 알고 있다. 또한, 디저트와 관련해 사장님이 궁금한 점이 있을 경우에는 내게 묻기도 한다. 받아든 아아를 들고 2층으로 올라갔다. 2층은 공부하는 이들 몇몇이 있었다. 아아를 한 모금 마신 후 잊기 전에 엄마한테 전화를 걸었다. 공부하는 이들만 있어서 괜히 눈치가 보였다. 신호음이 두 번 울리기도 전에 핸드폰 너머로 엄마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들 잘 지냈어? 웬일이래.
-그냥, 엄마, 아빠 별일 없지?
-너네 아빠 요새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집 근처에 생긴 복지관 다니더니만 탁구도 하고 서예도 배우고 있어. 사람들도 많이 만나는 것 같고 얼굴이 폈어.
-아버지가 웬일이래.
-허구한 날 밖에 나가지도 않고 집에 있으면서 날 귀찮게 하더니 잘 됐지.
-엄마도 복지관 다녀. 취미활동으로 할만한 거 많을 거야. 아마도 노래교실, 에어로빅 같은 것도 있을걸.
-싫다. 난 시원한 카페에서 수다 떨고 공원 산책하고 그런 게 좋다. 그리고 나 다음 달에 동네 아줌마들하고 베트남 가기로 했어.
-엄마 부럽네. 나도 놀러 가고 싶다.
-너 밥은 잘 챙겨 먹는 거야? 저번에 가보니까 반찬 다 쉬었던데. 귀찮아도 밥 잘 챙겨 먹고 다녀. 빵조각으로 때우지 말도.
-걱정 마. 오늘 아침도 엄마 반찬으로 밥 먹었으니까.
-그래. 먹고 싶은 반찬 있으면 얘기해. 갖다 줄게.
-알았어. 내 걱정은 그만하고 엄마 건강이나 잘 챙겨.
-그래. 그럼 들어가.
-네. 아버지한테도 안부 전해줘요.
-그래.
통화를 끝낸 후 엄마 계좌로 여행경비 100만 원을 입금 후 짧은 메시지를 남겼다.
-엄마, 여행 잘 다녀와.
엄마로부터 곧바로 답변과 귀여운 이모티콘이 왔다
-고마워, 내 아들. 잘 쓸게.
귀여운 이모티콘을 보니 옅은 미소가 지어졌다. 순간 고등학교 동창 동욱이로부터 전화가 왔다.
생각 외로 수다쟁이가 된 듯 계속 통화를 이어갔다. 전화를 받자마자 동욱이가 다그쳤다.
-너, 이번 동창회에는 꼭 나와라
-동창회? 언제지?
-이것 봐라. 저번에 그렇게 얘기를 해줬는데, 이번 달 마지막 주 토요일 6시
-지금은 가능한데, 갑자기 야근이 생겨서 확실히 얘기하기가 힘들어.
-너희 빵집 빵은 네가 다 만드냐?
하루 이틀도 아니고 매번 똑같은 대답에 친구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원래 이렇게 화를 내는 놈이 아닌데, 괜히 미안해졌다.
-알았어. 나도 너 안 본 지 오래되긴 했다.
-이제 알았냐? 아무리 친해도 안 보면 멀어져. 단톡에 답도 좀 하고, 모임에도 가능하면 좀 나와.
나의 노력 없이도 항상 옆에 있어줄 것 같던 친구가 생각 외의 말을 하니 조금 놀랐다. 아무래도 이번 동창회는 꼭 나가야 할 것 같았다.
-알았어. 꼭 갈게.
-그래. 그럼 그때 보자.
통화를 끝내자 2층은 다시 고요해졌다. 적당히 시원한 실내공기와 아아를 마시다 보니 책이라도 갖고 올걸 하는 아쉬움이 있었다. 다음 기회로 미루고 핸드폰을 들었다. 스케줄표를 보니 디저트 베이커리 박람회, 디저트 사내 공모전, 베이킹 추천도서 등 대부분 일과 관련된 스케줄로 가득했다. 동창회만이 일과 무관했다. 서점에 가도 베이킹과 관련된 서적만 사갖고 오기 일쑤였다. 갑자기 저번에 기사에서 봤던 만화방이 생각났다. 요즘 만화방은 체인점화돼서 다양한 컨셉의 인테리어에 음료, 식사는 물론이고 만화책뿐만 아니라 영상 시청도 가능하다고 한다. 이번 기회에 나도 한번 가봐야겠다는 생각에 근처 만화방을 찾았다. 20분 거리 전철역 근처에 한 군데가 있었다. 리뷰, 평점을 보니 대부분 만족도가 높았다. 오늘은 만화방에서 웹툰도 보고 밥도 먹자는 생각에 남은 아아를 한 번에 마시고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빈 잔을 들고 1층으로 내려갔다. 사장님은 어디 가셨는지 아르바이트생만 있었다. 아르바이트생은 요즘 말로 냉미녀다. 나이는 20대 초반 같은데, 분위기가 다크 하다. 그래서 인사를 먼저 건넨들 내게 인사를 할 것 같지도 않아, 아무 말 없이 빈 잔만 반납하고 카페를 나왔다.
카페를 나와 20분 거리의 만화방으로 향했다. 만화방은 고층 빌딩 5층에 위치해 있었다. 1시간에 3500원, 3시간에 7000원이었다. 시간제를 끊고 안을 둘러보니 다양한 의자와 테이블이 있었고, 책들은 빈 공간 없이 실내를 가득 채웠다.
먼저 책을 고르기 시작했다. 이리저리 둘러보니 강풀 작가의 만화책이 보였다. 예전 강풀의 '당신의 모든 순간'이라는 웹툰을 보고 울컥했었던 기억이 있었다. 강풀은 좀비물, 스릴러물이라도 내용에 따뜻함이 묻어 나온다. 작가의 외모처럼 동글동글하다. 또한, 내용이 참신해서 보는 재미가 있다. 디즈니 플러스 드라마로 나온 [무빙]이 보였다. [무빙]때문에 디즈니 플러스 구독자가 늘었다는 말이 돌 정도였다. 나는 5권 완결 [무빙]을 들고 자리를 잡았다.
[무빙] 전권을 다 읽고 시계를 보니 때마침 들어온 지 3시간이 다 되어 가고 있었다. 아침만 먹어서 그런지 배도 슬슬 고파, 집에 가기 위해 읽은 책을 정리했다. 다음에 또 오고 싶을 정도로 만족스러운 경험이었다.
집에 돌아온 후 옷을 갈아입었다. 간단히 씻고 저녁을 차렸다. 하루의 두 번 집밥을 먹으니 스스로 대견하면서도 왠지 건강해지는 느낌이 들었다.
오늘 대단한 것을 한 건 아니지만 평소와 달리 오롯이 나를 위해 지낸 하루 같아서 기분이 좋았다.
멋진 하루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