괜찮아, 짖지 않아도 돼.
소형견은 잘 짖는다는 말이 있습니다. 겁이 많기 때문이겠지요. 길을 가다 저를 보고 깡깡 짖어대는 강아지를 보자니, 제 마음이 왜 이토록 힘든지 알 것도 같습니다. 그 강아지들처럼 제 마음도 겁을 먹은 것입니다. 제가 강아지를 겁먹게 한 것처럼, 세상이 저를 겁 먹게 한 것이겠지요.
저는 강아지에게 겁을 주지 않았지만 강아지는 저에게 겁을 먹었습니다. 딱 그 꼴이 제 마음과 세상의 관계인 것 같습니다. '저 사람이 나를 때릴지도 몰라'라는 강아지에게 떠오른 마음처럼, 제 마음에는 다음과 같은 것들이 떠오릅니다. '엄청난 불운이 나에게 닥쳐올지도 몰라.', '이 병은 낫지 않을거야.', '미래의 나는 고통받을거야.', '...'
겁먹은 강아지에게 주인은 일깨워줍니다. '괜찮아. 별 일 아니야. 괜찮으니 짖지 않아도 돼.' 하지만 이런 말을 우리 마음에게 해줄 수 있는 '주인'은 따로 없습니다. 어려운 일이지만, 우리의 마음이 겁을 먹고 짖고 있지만 그 마음을 우리가 직접 달래주어야 합니다. 그러려면 우리는 마음으로부터 멀어져, 달래주는 마음을 일으켜야 합니다. 그것은 매우 어려운 과정입니다. 특히 저와 같은 아픔을 같이하는 이들에게는 더욱 어렵게 다가올 수 있습니다.
마음으로부터 한 걸음 떨어진다는 것부터가 난제입니다. 우리는 생각과 마음으로 스스로가 구성되어있다고 믿고 살고 있습니다. 하지만 생각과 마음으로부터 떨어지는 것이 가능할까요? 우선, 생각과 마음을 찢어놓을 수는 있습니다. 그리고 그 중 하나와 자신을 동일시 할 수도 있습니다. 그 때 우리는 '이성적'이 되거나 '감정적'이 되겠지요.
생각을 마음의 도피처로 삼을 수 있다면 정말 좋겠지만, 그것은 대부분의 경우에 실패합니다. 제가 말하고자 하는 '마음으로부터 한 걸음 떨어진다'는 것은 그런 것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마음이 겁을 먹고 짖을 때, 부정적이거나 비관적인 생각들이 소용돌이치기 때문입니다. 이때문에 생각을 마음의 도피처로 삼을 수조차 없습니다.
우리는 생각과 마음이라는 우리 머릿속의 작용을 우리의 애완견처럼 돌볼 줄 알아야 합니다. 이것을 위해 누군가는 명상을, 누군가는 기도를, 누군가는 운동을 합니다. 머릿속의 작용으로 너무 고통스러운 경우, 상담치료를 받기도 하고, 약물치료를 받기도 합니다. 확실한 것은 그런 것들이 제대로 작동하는 데에 성공한다면, 우리는 우리의 생각과 마음으로부터 떨어집니다. 마치 우리가 우리의 마음을 바라보는 기분을 느낄 수 있습니다.
우리가 우리의 마음으로부터 한 걸음 떨어져 그것을 바라보는 기분을 느낀다면, 그 다음 해야할 숙제는 바로 그 마음을 달래주는 일입니다. '괜찮아, 짖지 않아도 돼.'라고 말해주는 것입니다. 마음이 겁을 먹을 수 있는 이유는 수만가지 있습니다. 그리고 그 이유들은 각각 나름대로 합리적입니다. 마음의 입장에서는 말이지요.
하지만 현실을 살아가며 그런 모든 것들에 겁을 먹고 살아갈 수는 없습니다. 길을 걷는 모든 사람들에게 짖어대는 강아지처럼 살아갈 수는 없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너무도 고통스러울 것입니다. 그 강아지는 더이상 산책을 하기 싫어질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마음에게 말해주어야 합니다. '괜찮아, 짖지 않아도 돼.' 누군가는 이를 스스로를 기만하는 거짓말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습니다. 하지만 이 말은 거짓말이 아닙니다. 세상에 일어나서는 안될 일이 어디 있을까요. 내가 길을 가다가 벼락을 맞는다면, 그것은 있어서는 안될 일인가요? 누군가에게는 일어나는 일이 나에게만큼은 일어나지 않아야 한다는 생각과 마음이 스스로 겁을 먹게되는 중요한 이유입니다. 그런 모든 일들이 일어날 수 있지만, 그래도 괜찮다고, 짖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과 마음을 달래주어야 합니다.
있어서는 안될 일은 없습니다. 누군가에게 일어날 수 있다면 나에게도 일어날 수 있는 일입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길을 가던 남성이 갑자기 달려드는 것이 아니라면, 그저 강아지를 쳐다보고 있을 뿐이라면, '괜찮아, 짖지 않아도 돼.'라고 말해주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강아지는 사람에 익숙해집니다. 그렇게 마음은 세상에 익숙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