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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타이준 Jan 08. 2024

로마제국 쇠망사 9: 데키우스 황제와 게르만족 전쟁

전사한 황제의 전설과 상반된 평가

9장의 주요 문장과 해설


Intelligence was soon transmitted to the emperor Decius, that Cniva, king of the Goths, had passed the Danube a second time, with more considerable forces; that his numerous detachments scattered devastation over the province of Maesia, whilst the main body of the army, consisting of seventy thousand Germans and Sarmatians, a force equal to the most daring achievements, required the presence of the Roman monarch, and the exertion of his military power.


데키우스 황제에게 전달된 정보에 따르면, 고트족의 왕 크니바가 더 많은 병력을 이끌고 다뉴브 강을 두 번째로 건넜으며, 그의 다수의 부대가 모이시아 지방을 대대적으로 파괴했다. 7만 명의 게르만족과 사르마티아인으로 구성된 주력군은 가장 가장 강력한 힘을 가지고 있어, 로마 황제의 현장 지휘와 군사력의 전개가 필요했다.


이 문장은 게르만족 고트족의 침공과 그들의 군사적 위협을 강조한다. 크니바 왕의 병력 증강과 마이시아 지방에 대한 공격은 로마 황제 데키우스에게 대대적인 군사적 대응을 강요했다.


The conflict was terrible; it was the combat of despair against grief and rage. The first line of the Goths at length gave way in disorder; after a fierce and obstinate struggle, the barbarians retreated in confusion. In this morass the Roman army, after an ineffectual struggle, was irrecoverably lost; nor could the body of the emperor ever be found. Such was the fate of Decius, in the fiftieth year of his age; an accomplished prince, active in war and affable in peace; who, together with his son, has deserved to be compared, both in life and death, with the brightest examples of ancient virtue.


전투는 끔찍했고, 절망, 슬픔, 분노에 맞선 싸움이었다. 결국 게르만족 고트족의 첫 번째 전열이 무너졌고, 치열한 저항 끝에 야만인들은 혼란 속에서 후퇴했다. 하지만 이 늪지에서 로마 군대는 효과적으로 싸우지 못하고 회복 불가능하게 패배했으며, 전사한 황제의 시신조차 발견되지 않았다. 전쟁에서 활약하고 평화에서 온화한 왕이었던 데키우스는 아들과 함께 가장 빛나는 모범적인 미덕이었고 생사를 같이할 만한 인물로 평가받았으나, 그의 나이 50세에 이런 운명을 맞이하였다.


이 문장은 로마 군대와 게르만족 간의 격렬한 전투와 그 결과를 묘사한다. 데키우스 황제의 전사는 로마 제국의 큰 손실을 상징하며, 그의 리더십과 인품을 강조한다.

데키우스 황제의 초기 생애 및 출신 배경


9장은 로마 황제 데키우스 그리고 그 당시 있었던 게르만족과 로마제국의 전쟁에 대해서 서술하고 있다.  데키우스는 서기 200년경, 판노니아 시르미움 근처 부달리아 (현재 세르비아 지역)에서 태어났다. 그의 본래 성씨 '메시우스'는 이탈리아 라틴 성씨로, 이는 그가 이탈리아 평민 출신이라고 여겨졌다. 하지만 그의 인맥과 귀족사회에서 받았던 대우를 짐작해 보았을 때 데키우스는 속주 태생의 기사계급 출신 상류층 출신이라고 추정한다.


정치적 경력 및 황제 즉위


젊은 시절부터 군사, 행정 분야에서 두각을 나타낸 데키우스는 232년경 첫 집정관을 역임하고, 이후 여러 고위직을 맡아 활동하였다. 248년경 모이시아와 판노니아에서의 반란을 진압한 후 군대에 의해 황제로 추대되었고, 필리푸스 황제와의 전투에서 승리하여 황제로 등극했다.


로마 다신교 부흥 및 기독교 박해


데키우스는 로마 다신교의 부흥을 추구했으며, 신전 건축과 복원 사업을 이끌었다. 그는 250년경 희생제물을 바치도록 요구하는 칙령을 발표했는데, 기독교인들이 우상숭배라고 이것을 거부하자 대대적인 기독교 박해 정책을 단행했다.


게르만족 전쟁에서 전사한 황제


250년, 고트족의 침입으로 인해 발생한 아브리투스 전투에서 데키우스는 전사했다. 그는 로마 제국 최초로 외적에게 전사한 황제로 기록되었다. 데키우스 사후에 평가는 대조적이다. 군사적 재능과 훌륭한 인품으로 긍정적 평가를 받는 동시에 기독교 박해 정책으로 비판을 받고 있다.


데키우스의 통치가 시사하는 점


데키우스의 통치와 전쟁에서의 결정들은 리더십과 위기관리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그는 군사적 리더십, 정치적 안목, 그리고 종교적 결정에서 어려운 균형을 유지해야 했다. 데키우스의 치세는 국가 지도자로서 복잡한 도전과 그 결정이 국가의 안보와 운명에 미치는 영향을 잘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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