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와 햇살이 기분 좋은 횡성
주말마다 장을 보고 빨래를 해서 무겁게 이고 지고 가져가는 것도, 그 와중에 자주 내리는 비에도 점점 짜증이 났다. 명절 때마다 300km가 넘는 길을 4시간 넘게 달려서 고향에 가는 것도 부담으로 다가왔다. 친구들도 못 만난 지 오래되었고, 아무도 없는 곳에서 혼자 오늘은 뭘 하면서 시간을 보내야 하나 고민하게 만드는 횡성이 싫었다. 매번 바뀌는 환경, 이웃을 사귈 수 없는 낯선 곳들을 떠돌면서 이젠 어디 정착하고 싶어졌다. 대구가 그리워졌다. 대체로 맑은 날씨의 따뜻한 남쪽 나라. 이제는 내 마음에 안정을 주는 곳이었다.
이상했다. 싫어서 떠났던 건데 이제 와서 그립다니. 그러다 문득, 내가 거쳐온 모든 곳들은 행복해지고 싶어서 선택한 길이었는데 어느 기점 이후로 매번 불평하는 나를 깨닫게 되었다. 서울에 간 것도, 춘천으로 신혼집을 구한 것도, 인제 발령을 계기로 잘됐다며 퇴사한 것도 나였다. 아무도 나에게 서울이나 강원도에 가라고 떠민 적이 없었다. 오롯이 내가 한 선택이었다. 불운이 유독 나만 찾았던 게 아니라 내가 매 순간을 불행하게 만들고 있었다.
앞으로 내가 어디를 가게 되더라도 그곳은 내가 더 행복해지고 싶어서 한 선택일 것이다. 새롭게 가게 될 곳에서 내가 또 적응을 못하거나 우울해할까 봐 두려웠다. 여태 내가 선택해서 갔던 곳들 중에서 진정으로 행복하다고 생각했던 곳이 있었나? 내가 뿌리를 내리며 지냈던 곳이 있었나? 정착하지 못해서 떠돌아다니기로 한 건 내가 내린 결정 아니었나? 수많은 생각 끝에, 여기서 행복하지 못한다면 어딜 가나 또다시 불행을 만나게 될 것이라는 결론에 닿았다.
나는 여기서 행복을 찾아보기로 결심했다.
외롭고도 긴 시간에 뭐라도 해야 한다는 걸 알았지만, 그 무렵 나는 심각한 무기력증으로 내 몸뚱이를 씻는 것조차 귀찮아했다. 유일하게 하는 거라곤 친구에게 심심하다며 전화 거는 일이었다. 하루는 친구가 불렛 저널(*)을 써보면 어떠냐고 제안했다. 필사도 같이 하자고 했다.
친구가 유튜브 영상과 본인이 구매한 다이어리 사이트를 공유해주었다. 사실 흑역사를 굳이 기록으로 남기고 싶지 않아서 일기도 쓰지 않았고, 어쩌다가 생긴 다이어리도 회사 업무를 체크하는 수첩 정도로만 써왔다. 친구의 성의를 봐서 동영상을 봤지만 너무 복잡해서 도무지 따라 하고 싶은 생각이 들지 않았다. 세상에는 참 열심히 사는 사람이 많다고 생각했다. 한때는 나도 열심히 살았던 것 같은데, 노력할수록 상처로 남아서 다시 도전하기가 두려웠다.
고민했던 나는 친구의 제안이 고맙기도 하고 필사는 주 1회라서 부담이 없을 것 같아서 함께 하겠다고 했다. 이왕 하는 거 이면지에 대충 쓰는 게 아니라 노트에 꾸준히 기록하고 싶었다. 한참을 고민하던 나는 친구가 보내줬던 사이트에서 다이어리를 구매했다. 가볍게 생각하기로 했다. 내가 할 수 있는 만큼만 불렛 저널도 써보고, 필사도 같이 기록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쓰다가 중도에 포기하게 되더라도 필사 공책으로 쓰겠다는 마음으로.
다이어리를 사니 스티커를 사게 되고, 스티커를 붙이기 위해서라도 열심히 쓰고 싶어졌다. 예쁜 스티커를 적재적소에 붙일 때의 뿌듯함이 좋아졌다. 그 뒤로 나는 설거지하기, 청소하기 같은 사소하지만 해야 할 일들을 다이어리에 기재하고 할 때마다 체크하기 시작했다. 작은 성취들이 모여 뿌듯함으로 다가왔고, 어느 순간부터는 나를 지탱해주는 힘이 되었다. 필사를 하다 보니 수년간 읽지 않았던 책도 읽게 되었다. 오랜만에 읽은 책과의 만남도 좋았고, 가장 마음에 드는 구절을 정성스레 필사했는데 생각보다 뿌듯했다. 처음엔 1달에 1권 읽는다는 목표로 가볍게 독서도 시작했다. 그러다 점점 주 1회에 한 권 씩 읽게 되고, 나중에는 욕심내서 좀 더 자주 읽게 되었다.
해야 할 일들을 처리하다 보니 점점 하고 싶은 일이 생기기 시작했고, 언젠가부터 운영하고 싶었던 블로그도 시도해 볼 용기가 생겼다. 책을 읽고 있으니 도서 블로그로 운영을 시작했다. 가끔 기분 나쁜 일을 겪으면 길게는 며칠 짧게는 당일은 흔들리며 영향받는 내가 짠했다. 내가 어떤 일에 우울하고, 기분이 나쁘고, 행복해하는지 나에 대해서 알고 싶어서 모닝 페이지도 시작했다. 줄도 그어져있지 않은 연습장에 무작정 100일간 하루 3페이지씩 빼곡히 써갔다. 팔이 아프고 한 시간 반에서 두 시간이 넘도록 내가 고민하고 머릿속에 드는 생각들을 써 내려갔다.
친구의 제안을 가볍게 받아들였는데 작지만 확실한 변화들이 생겨났고, 활력도 함께 나를 찾아왔다. 아침마다 내 기분을 체크하면서 나의 내면을 돌보면서도, 블로그 활동도 게을리하지 않았다. 늘어나는 독서량만큼 리뷰도 부지런히 남겼다. 블로그에 이웃들이 늘어나면서부터는 심심하다는 생각은 비집고 들어올 틈이 없어졌다. 그렇게 매일 글을 읽고 쓰면서 몇 개월을 지내다 보니, 내가 글을 읽고 쓰는 일을 즐거워한다는 것과 그게 바로 지금 내가 하고 싶은 일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 깨달음은 언젠가는 작가가 되고 싶다는 막연함을
새로운 꿈으로 안겨주었다.
책에서 가장 크게 배운건, 행복은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발견하는 것이었다. 날씨가 따뜻해지면서 사택 근처를 산책하기 시작했는데, 햇살 아래 저마다 조금씩 다른 연둣빛으로 반짝이는 나뭇잎들을 보며 감탄하게 되었다. 기분 좋게 지저귀는 새소리와 시냇물이 흐르는 소리에 감사하게 되었다. 흙길을 걸으며 기분전환을 한 나는 여태 가져보지 못한 새로운 행복함을 알게 되었다. 봄은 늦게 온 만큼 내게 오래 머물러주었다.
내가 과연 이곳에서 혼자서 생각을 할 기회를 갖지 못했다면, 나는 다시 일어설 수 있었을까? 내가 무너지지 않았다면, 나의 새로운 꿈을 찾을 수 있었을까?
내가 이 아름다운 초록빛을 진심으로 느낄 여유가 있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