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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해 Sep 29. 2022

9. 네? 이번엔 횡성이요??

이건 정말 아니지 않아?

뭐라고? 또 발령?
횡성? 그 횡성 한우?


인제에서의 봄을 손꼽아 기다리고 있었는데, 웬걸. 배우자가 갑자기 횡성이라는 곳으로 발령받게 되었다. 이번에도 고민할 틈을 주지 않았다. 집을 속초 쪽으로 옮기지 않길 잘했다는 생각만 가지고 나는 횡성으로 몸을 실었다. 문득 아직은 추운 겨울, 소들은 어디서 지내는 걸까 궁금해졌다. 그때는 소를 걱정할 때가 아니란 걸 미처 알지 못했다.



음… 저기.. 횡성 사택은 좀 열악해.
인제가 훨씬 좋아. 여긴 좀 노후됐어.


사택을 사전 답사했던 배우자가 미리 언질 해줬다. 뭐.. 나빠봤자 얼마나 나쁘겠냐고 생각했다. 복층이었는데, 1층은 좁았지만 인제보다는 TV가 커졌다! 무엇보다 복층에 로망이 있었는데 오히려 좋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설렘은 언젠간 끝난다.


인제에서 유일하게 적응하지 못한 것이 벌레였는데, 좀 더 다이내믹해진 벌레들이 나를 맞이해주고 있었다. 내가 외롭고 심심한 건 어떻게 알았는지, 매일 찾아왔다. 차라리 고독과 친구 먹는 게 더 낫겠다고 생각했다. 외풍이 심해서 창문마다 비닐을 막아야 했고, 그 결과 환기가 잘 안 되는 불상사가 생겼다. 보일러가 온돌 형식이 아니라 바닥만 뜨겁고 공기는 차가웠다. 라디에이터를 켜야 했는데, 그러면 매우 건조해졌다. 안구건조증을 달고 사는 내게 눈이 살려달라고 소리쳤다. 한동안 잊고 있었던 사막이 떠올랐다.


뿐만이 아니다. 늦겨울에 갑자기 온수가 단수가 되었다. 온수 수리는 차츰차츰 미뤄졌고 나의 분노는 하루가 다르게 쌓여가고 있었다. 씻는 것도 문제였지만 설거지를 하지 못했다. 그리고 볼일을 볼 수가 없었다. 엎친데 덮친 격이라고 가스까지 나갔을 때도 간신히 참았는데, 냉장고까지 고장 났다. 불편함을 토로했지만 배우자는 조금만 더 기다려달라고 했다. 냉장고에서 음식물이 썩어가는 걸 본 순간 달그락달그락거리던 내 머리 뚜껑이 결국 나를 힘껏 이탈했고, 그 뚜껑은 정확히 배우자의 가슴에 명중했다.


아니.
아무리 온 지 얼마 안 됐어도 수리해달라고 강력하게 요청해야지!
도대체 여기서 얼마나 더 기다리란 거야?
온수, 냉장고, 가스까지 나가면 나는 뭐 어쩌란 거야?
이건 정말 아니지 않아?


배우자가 머뭇거리며 기어가는 목소리로 이야기했다.


옆 집 팀장님도 온수가 고장 났는 데, 한 달째 다른 곳에서 씻고 계셔…
내가 매일 요청하는데 여기 인력이 부족해서 그래....
정말 미안해..


정말 오즈의 맙소사였다. 여기도 음식점까지는 차로 10분 이상 나가야 했고, 배달은 당연히 안됐다. 음식을 해 먹을 수밖에 없는 상황인데도 모든 것이 중단되어 나는 당장 오늘 뭘 먹어야 하고 어떻게 버텨야 할지 고민해야 했다. 산 중턱에 위치한 이곳은 인제와 기후가 다를 바 없었다. 사택이 서향이라 해가 아주 잠깐 들었고, 그마저도 흐린 날이 훨씬 더 많았다. 이곳의 겨울은 유독 힘이 셀 것 같다는 예감이 들었다.


너무 절망적으로 이야기했지만, 한 가지 좋은 점이 있었다. 인제보다는 횡성이 춘천과의 거리도, 친정인 대구까지의 거리도 가까워졌다는 것이다. 그만큼 나는 춘천집이 그리워졌다.


인제 때는 대중교통 환승에 나름 적응해서 배우자가 당직일 때는 한 번씩 친구 집에도 놀러 갔다. 하지만, 내가 머무는 이곳은 오지 중에서도 오지였다. 대중교통을 타고 어디로 이동하기가 쉽지 않았다. 친구 집에 놀러 가는 건 포기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인제보다 교통이 불편한 곳이 존재하리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아, 택배 표시 중에서 “미배달”이라는 말이 무엇인지 아는가? 나는 태어나서 올해 처음 봤다. 분명히 지점에 도착해서 오늘쯤이면 도착해야 하는 택배인데 다음날까지도 오지 않아서 사이트의 운송장 번호 조회에 남겨진 직원에게 전화했다.


아.. 거기 산이라 제가 자주 못 가요.
내일요? 내일... 못 가는데..
많이 급하시면 모레 갖다 드릴게요.


인제는 로켓 배송은 아니더라도 매일 택배가 오는 곳이었는데, 횡성은 택배사 직원과 매번 배송 일자를 딜해야했다. 횡성은 내가 예상하지 못한 일이 매일 벌어지고 있는 신기한 곳이었다. 설상가상으로 인제 때는 배우자가 매우 일찍 퇴근했다는 사실도 깨닫게 되었다. 횡성에서는 매일 회식에, 야근에 자정에 가까운 시간에 겨우 사택으로 퇴근해서 돌아왔다.


문득, 나는 나대로 불편하지만 6개월 만에 근무지가 변동된 배우자는 괜찮은 걸까 걱정도 되었다. 몇 날 며칠 이어지는 야근에 표정이 점점 어두워졌고, 나의 마음도 다시 잿빛으로 돌아가려고 하고 있었다. 인제 때가 행복했다는 걸 실감하고 있었다.


나는 나에 대해서 한 가지 깨달은 게 있었다. 기쁨은 오래 기억하지 못하지만, 불편하고 힘들었던 건 매우 상세하게 잘 기억한다는 거다. 인제에서의 즐거움을 기록하는데 1시간이 넘게 걸렸지만, 횡성에서의 불편함을 기록하는 건 20분도 채 걸리지 않았다.


봄이 오긴 하는 걸까. 겨울의 끝자락에서 아직은 매서운 바람이 나를 덮쳐왔다.

내겐 유독 긴 겨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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