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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해 Sep 27. 2022

8. 속초가 이렇게 재미있는 곳이었다니

강원, 어디까지 도장 깨 봤니?

우리는 평일엔 해가 빨리 지니, 금요일에 일찍 마치면 속초로, 고성으로 투어를 다녔다. 대구나 서울에 살 땐 올 엄두도 못 낼 곳들을 두 시간 이내로 갈 수 있었다. 고성의 조용한 겨울바다부터, 젊고 활기찬 속초의 번화가와 시장까지 돌아다녔다.


속초는 미시령 도로를 타면 둘러 갈 수 있기에 가는 즐거움이 또 색달랐다. 해안도로만 좋아했던 내가 산이 아름답게 펼쳐진 구불구불한 길을 좋아하게 될 줄이야.

한 번은 인제까지 와 준 엄마랑 속초 나들이도 갔다가

백담사

인제의 그 유명한 백담사도 다녀왔다. 백담사도 정말 가는 길이 여행 같았다.

용대 바위

인제의 용대 바위는 얼마나 웅장하고 멋진지! 인공으로 얼린 거라고 들었는데, 듣지 않았다면 자연이 그린 걸작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리고 인제 황태구이가 그렇게 맛있는 지도 처음 알았다. 누구보다 심심해했던 내가, 강원도를 좋아하게 되었고 시켜만 준다면 강원 홍보대사라도 하고 싶었다. 다들 여름에만 강원도를 오는 게 아쉬울 정도였다. 강원도는 겨울도 이렇게 멋지고 볼거리가 가득한데 말이다.


추우면 추운 데로, 해가 짧으면 짧은대로 그냥 자연의 순리를 받아들이고 자연이 베푸는 것을 마음껏 즐겼다. 그러다 보니 하루하루가 구분 없이 똑같던 내가 이젠 주말이 기다려졌다. 주말마다 춘천 도장깨기를 할 것이냐 아니면 고성부터 속초, 양양, 강릉까지 내리 달릴 것이냐 고민이었다. 사실 강원이 엄청 넓어서 바닷가 쪽 말고도 평창, 횡성, 원주, 정선 등 갈 곳이 너무 많았다. 계절별로 가는 것도 또 하나의 재미일 것 같았다.


내가 새롭게 찾은 취미가 있는데, 그건 바로 네이버 지도에 가고 싶은 곳을 체크해 놓고 주말마다 가서 간 곳으로 다른 표시를 해 두는 거다. 강원 도장깨기라는 취미가 생겼다. 강원도는 이렇게나 넓고 갈 곳이 많은데 한 계절당 3개월밖에 안된다. 부지런히 움직여야 다 돌아다닐 수 있다고 생각하니 마음이 바빠지고 점점 할 일이 많아졌다.


강릉은 크게 계획하고 가야 했다면, 속초는 마음만 먹으면 한 시간 내로 갈 수 있으니 속초부터 도장깨기로 했다. 한 가지 아쉬운 점은, 속초 같은 관광지는 6시쯤엔 거의 가게 문이 닫는다는 거다. 진정한 맛집을 조용히 가려면 평일 6시 이전에 가야 한다.


차갑고 조용한 겨울 바다를 보니, 여름이 꿈만 같았고 여름의 속초 바다는 어떨지 기대하게 되었다.

(왼) 양양의 겨울 바다, (오) 섭국

양양을 겨울에 놀러 온 친구가 있었는데, 그 친구 덕분에 섭국이라는 것도 태어나서 처음 먹어봤다. 이건 한 입 먹고 깨달았다. SOJU각이구나. 겨울의 양양은 이렇게나 조용한데, 여름의 양양은 또 얼마나 핫한 곳으로 바뀌어 있을지 생각만으로도 설렜다. 눈이 내리는 날에는 아무도 밟지 않은 흰 눈을 양껏 밟을 수 있었다. 그것도 많이 내려서 푹푹 밟히는 즐거움도 함께. 겨울왕국, 그곳이 바로 이곳에 펼쳐져 있었다.


주말에 놀러 가는 것 말고는 여전히 하고 싶은 게 없었다. 하루에 수십 번을 나에게 되물었지만 20대 초반부터 꿈꿔왔던 내 직무의 커리어 우먼 말고는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았다. 하지만 나에게 더 이상 재촉하지 않기로 했다. 지금 없다고 해도 영원히 없는 것은 아니니까.


하고 싶은 일은 못 찾았지만, 매주, 매일 챙겨 볼 드라마와 예능, 웹툰은 찾아냈다. 주말만 기다렸던 내가 이제는 주 중도 기다려졌다. 하루하루의 낙을 만드니 매일매일이 기다려졌다. 여전히 과거의 일들을 생각하면 기분이 저조해지고, 친구들의 사소한 말이나 표현에도 자주 속상했다. 하지만 잠시도 쉴 틈 없이 몰아치던 감정들이 이제는 쉴 틈에 찾아온다는 작은 변화는 스스로 깨닫지 못했다.


건강에 들어온 적신호는 나에게 건강도 신경 쓰라는 경각심이 되었다. 아직까지 무기력한 나는 운동은 엄두도 안 나고, 미처 맞지 못했던 예방주사를 A형 간염부터 차근차근 맞아나갔다. 하나씩 완료할 때마다 체크해 나갈 때의 뿌듯함이란. 작은 성취들은 쌓여서 내가 눈치채지 못하게 조금씩 쌓여가고 있었다.


추운 겨울,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은 앙상한 가지처럼 나에게도 빈 가지만이 남아 더욱 마음을 휑하게 해주는 계절이라고 생각해왔다. 하지만 겨울이야말로 무한한 가능성을 품고 있는 쉬어가는 시기라는 걸 깨달았다. 지금의 나는 그저 어둡고 차가운 겨울을 보내고 있는 중이었다. 견디기만 해도 봄은 오지만, 이왕 견디는 거 즐기면서 견뎌보자고 마음을 먹게 되었다.


나는 인제라는 곳에서 겨울이라는 계절과 하늘에서 내리는 눈이 좋아지고 있었다. 차갑고 매서운 바람이 조금씩 힘을 잃어가고 있었다는 걸 이제는 느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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