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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해 Sep 22. 2022

7. 별도 내리는 아름다운 인제

잊지 못할 인제의 설산

나를 탓했다가, 사람들을 탓했다가 매일 지옥을 벗어나지 못했다. 지옥은 벗어나는 게 아니었다. 나는 내가 있는 모든 곳을 지옥으로 만든 거였다. 암전 된 나는 설상가상으로 몇몇 친구들과 멀어져서 기분이 매일 신저가를 기록했다. 건강 검진 결과에도 빨간불이 들어왔다. 모든 것이 최악으로 치닫는 중이었다. 하지만 매일 눈은 떠졌고, 일정한 시간이 되면 배가 고팠다.


겨울이 된 인제는 깜깜한 나와 다르게 하얀 눈을 맞이하고 있었다. 나는 비와 눈이 싫었다. 특히 눈이 오는 날이면 신발이 더러워지고, 가뜩이나 빨래가 불편한 겨울 옷들이 더러워지는 게 마음에 들지 않았다. 보기에 예쁜 눈은 쉽게 더러워져서 불편함으로 남았으니까. 자연이 왜 좋은지 알지 못했고, 관심이 없었다. 우리나라의 바다나 산은 아름답지 않다고 생각했다. 겨울에 잎사귀가 다 떨어진 겨울나무는 앙상하다고 생각했다. 추운 겨울에 세탁기가 얼어 고생할 때도 강원도는 살 곳이 못된다고 생각했다.


그날도 어김없이 바닥에 누워있었다. 3년간 짓밟히고 버려진 후에 잊어버렸던 나의 꿈이 다시는 나를 찾아오지 못할 거라 생각하면서.


오늘 별이 엄청 많이 보여.
나랑 별 보러 가지 않을래?


낭만적인 말 앞에 귀찮음이 들러붙었지만, 못 이기는 척 옷을 주워 입고 나갔다. 문 밖을 나섰는데, 눈앞에는 수많은 하얀 점의 별이 빛나고 있었다.

멀리 갈 필요도 없이 내 집 마당이 별을 품고 있었다. 인제의 밤은 불평하던 나에게 말없이 선물을 주었다. 살면서 내가 이렇게 별을 많이 본 적이 있었나? 추웠지만 한참을 서서 넋을 놓고 바라봤다. 핸드폰으로는 아무리 찍어도 담기지 않는 것을 오롯이 만끽할 수 있도록 해주는 내 두 눈에게 감사했다.


아주머니가 이거 먹으라고 꼭 전해 주래.


한 번도 얼굴을 본 적도 없고, 인사해본 적도, 이름도 모르는 배우자 직장의 식당 아주머니가 나에게 전해주라며 돈가스를 주셨다. 그 후로도 잡채, 탕수육, 소시지 등 맛있는 반찬들이 나오면 배우자는 방문을 두드리러 왔다. 어쩌다 마주친 직원분들은 반갑게 인사해 주셨다. 나는 쭈뼛거리며 함께 인사했다.


한동안 내 세상의 타인은 차가운 회사 사람이 전부였는데, 따뜻한 마음이 고마우면서도 어색했다. 받을 줄 몰랐던 나는 어떻게 반응해야 하는지도 모른 채 그분들의 마음을 그저 받기만 했다. 이유 없는 따스함은 나를 당황하게 했고, 이 감정을 어떻게 불러야 할지 그때는 알지 못했다.


미시령 고속도로 경관이 좋데.
오늘 일찍 가서 맛있는 것도 먹고 데이트 하래.


하루는 배우자가 낮에 퇴근했다. 맛집 리스트들을 잔뜩 받아 들고선 나한테 빨리 나갈 준비 하자고 했다. 해 떠있을 때 외출이 오랜만이라 들떴다. 미시령 도로에서 만난 설악산은 고고한 아우라를 뿜어냈다.

왜 설악산이 명산이라고 하는지 알 것 같았다. 장엄한 바위산의 절경에 마음을 뺏겼다.


금요일에 일찍 퇴근해서 춘천으로 가는 길이었다. 그날도 우울했다. 대인관계도, 회사도, 미래도 모두 내 마음속과 머릿속에 자리를 잡고선 단 한순간도 딴생각을 하지 못하게 했다. 어떤 노래를 들어도 마음에서 울리는 슬픈 메아리는 결국 두 귀도 닫게 만들었다. 무슨 생각을 하냐는 배우자에게 상황이 너무 절망적이라 우울하다고 이야기하는데, 눈앞에 아름다운 설산이라는 장관이 펼쳐졌다. 심각한 대화를 하던 나는 나도 모르게 문장을 끝맺지 못한 채 감탄을 연발했다.


근데 있잖아, 너무 아름다운데?


설산. 그냥 눈 덮인 산이 아니었다. 인제의 모든 산이 눈으로 덮였다. 사진찍을 생각조차 못한 채 파란 하늘 아래 하얀 산은 춘천으로 가는 길을 멈추고 싶을 정도로 아름다웠다. 끊임없이 이어지는 모든 산이 내 마음에도 펼쳐졌다. 겨울에 왜 나무가 나뭇잎을 떨어트리는지 이제는 알 것 같았다. 초록색 잎에 내린 눈은 이런 장면을 연출하지 못하니까. 겨울을, 눈을 온전히 맞이하기 위한 준비였다.


그때 사람들에게 받았던 따스함이 너무 고마워서, 인제의 설산과 별이 너무 아름다워서 왈칵 눈물을 쏟진 않았다. 다만, 지금은 그곳이 너무 그립다. 그땐 미처 몰랐던 그 감정은, 미래의 내가 과거의 나에게 보낸 기억해야 할 추억이자 그리움이었다. 나의 신혼은 따뜻한 기억으로 남았고, 아름다운 곳에서 보냈다는 걸 깨달았다.


밤하늘의 별과 장엄한 바위산과, 끊임없이 펼쳐진 설산은 자신만의 방법으로 이방인인 나를 맞이해주고 있었다. 사진첩에는 도저히 담을 수 없는 장면들이 내 마음에서 잊히지 않길 간절히 바랄 뿐이었다.


앙상한 나뭇가지에 내리는 눈이 사택의 창문을 한 폭의 작품으로 만들어 주었다. 괜찮냐는 눈들의 다독임에 아직은 잘 모르겠다고 대답했지만 대신 궁금한 게 생겼다. 여름, 가을, 겨울을 보내고 있는 이곳의 봄은 어떤 아름다움이 있을까 기대하고 싶어졌다.

나는 그렇게 조금씩 인제가 좋아지고 있었다. 봄이 기다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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