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an Walker가 부릅니다, Faded.
지옥이라고 표현했지만 돌이켜보면 좋은 일들도 참 많았다.
나는 똑같이 행동했는데 팀원들만 몰라줬고 모른척했을 뿐, 다른 부서 사람들은 하나하나 다 알아주고 고마워했다. 시간이 지날수록 친밀도는 높아졌고, 서로 끈끈해져서 매달 함께 업무를 해야 할 때는 서로 으쌰으쌰하며 헤쳐나갔다.
업무가 바뀌어서 함께 일하는 부서가 달라져도 마찬가지였다. 회사에서는 적응 못하는 문제아로 낙인찍었지만, 어떤 이는 나를 우수사원으로 추천했다. 익명의 추천서를 받았을 때의 기쁨은 그동안의 고생을 위로해주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회사는 멀어졌지만, 가까워진 타 부서의 동료들은 아직도 내 곁에 남아있어서 종종 만난다.
나에게는 소중한 사람들이 남았다.
그렇게 지옥을 하루, 한 달을 버텨갔다. 시간이 어느 정도 지나니 버틸만해졌다. 하지만 세상에서 제일 나쁜 지옥이 바로 그 버틸만한 지옥이라고 했다. 월급날은 매달 돌아왔고, 인사 고과만큼 큰 상처와 충격을 받는 일은 없었다. 그때만큼은 아니더라도 끊임없이 상처를 받아오던 나는 서서히 죽어가고 있었다.
예….? 인제 발령요?
그러던 어느 날, 배우자가 인제로 발령받게 되었다. 이제는 정말 뒤도 돌아보지 않고 퇴사할 마음이 생겼다. 부모님들은 그 산골에서 어떻게 사냐고 걱정하셨지만, 나에게는 구원이었다. 회사와의 악연을 만 3년만에 그렇게 끊어냈다.
우리는 주중에는 인제에서 거주하고, 주말에는 펜션 마냥 춘천집으로 왔다. 인제로 갈 때도, 춘천으로 올 때도 여행하는 기분이 들어서 괜히 들떴었다. 하지만, 설렘은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흔히 말하는 두 집 살림이란 건 쉬운 일이 아니었다. 우선 인제에는 이마트나 홈플러스 같은 큰 마트가 없다. 있어도, 품목이 다양하지 않았다. 그리고 물가는 춘천이 더 저렴했다. 춘천에서 일주일 장을 보면, 5일 치는 인제로, 2일 치는 남겨두는 식으로 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세탁기가 없었다. 빨래를 모아서 춘천집에 가져와서 해야 했다. 매주 갈 때마다 짐이 양손 가득이었다. 짐을 이고 지고 계단을 오르락내리락하는 일은 어느 순간 지치고 짜증 나는 일이 되었다.
장을 봐서 가야 하는 이유는 간단했다. 인제에는 식당 자체가 별로 없었고 그나마도 내가 즐겨 찾는 메뉴를 하는 곳은 없었다. 무엇보다 배달이 안된다. 갑작스레 발령이 난 거라 정신없이 가다 보니 불편함을 예상할 겨를 따윈 없었다. 모든 것을 부딪히면서 깨닫게 되었다.
‘하늘 내린 인제’는 정말 하늘이 내리긴 하더라.
여름에도 겨울에도 끊임없이 무언가가 떨어지는 곳이 바로 인제였다. 맑은 날을 좋아하는 내게 대부분 흐린 날인 이곳은 습하고, 어두운 곳이었다. 게다가 벌레를 극혐 하는 나에게 온갖 종류의 크고 개성 넘치는 벌레들이 시도 때도 없이 인사하러 왔다. 운동이라도 하고 싶었지만 가까운 헬스장은 차를 타고 30분을 가야 하는 곳이었다. 당연히 동네 커뮤니티는 없고, 젊은 사람들은 보이지 않았다. 나는 배우자가 출근해서 일하는 시간 동안 철저히 혼자였다.
살면서 하고 싶은 일이, 해야 할 일이 아무것도 없었던 적은 처음이라 적응이 안 됐다. 나에게 취미는 없었다. 그나마 따릉이(서울시 대여 자전거)를 타며 한강을 다녔던 게 전부였다. 개인 자전거도 없거니와 자전거를 탈만한 곳이 전혀 없었다. 한 달간은 미뤄둔 드라마를 실컷 봤다. 게임도 해봤지만 효과는 짧았다. 인제의 사택은 좁았기에 친구들을 초대해서 놀 수도 없었다. 교통도 불편한 이곳에서 친구들 집에 가려면 시외버스를 환승에 환승을 해서 가야 했다. 대장정이기에 한 번 갈 때마다 큰 결심을 해야만 했다. 겨울이 다가오고 있어서 배우자가 마치면 우리를 반겨주는 건 까만 하늘뿐이라 기분전환을 하러 가기에도 애매했다. 둘이서 어디 외출하려니 그마저도 가게들이 일찍 문을 닫았다. 게다가 승진 후라 배우자는 할 일이 많아서 퇴근이 점점 늦어졌다. 나의 고립은 겨울밤과 함께 깊어갔다.
나는 심심한 게 외로운 건지 몰랐다. 친구들은 취미를 가져보는 것이 어떠냐고 했고, 스마트폰이 있고, 인터넷이 되고, 티비가 있고, 넷플릭스가 있는데 왜 외로운 건지 왜 힘든 건지 잘 이해하지 못했다. 다만, 또래의 사람들을 만나는 시간이 비약적으로 줄어들어 심심할 순 있겠지만, 혼자 놀 거리는 세상에 너무 많다고 위로해주었다. 심지어 퇴사를 축하한다며 진심으로 부러워했다.
내가 살려고, 행복해지려고 한 결정인데 불행한 건 여전했다. 회사만 떠나면 내 인생은 완벽하다고 확신했는데 여전히 우울했다. 배우자나 시댁과 갈등이 있었던 것도, 친정과 갈등이 있었던 것도 아니었다. 나는 자식이 없어서 자식 문제가 있는 것도 아니었고, 지금 당장 굶어 죽을 입장도 아니었다. 그런데 나는 매일 아침 눈을 뜨는 게 싫었다.
회사에서 겪은 일들이 불쑥 떠올라 괴로웠다.
내가 왜 그때 멍청하게 당하기만 했을까?
그때 내가 왜 그런 말을 했을까?
그때 내가 이렇게 행동했다면 더 좋지 않았을까?
분한 마음이 밀물처럼 밀려와 속상함을 남기고 갔지만 이제와 다 무슨 소용일까 하는 생각들도 들었다. 몇 년간 수없이 깎인 내 자존감은 재건을 포기할 지경에 이르렀다. 자신감은 인제의 하늘처럼 흐렸다. 억울한 마음이 퇴사 때부터 마중 나와 내 곁을 지켰다. 그때도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지금도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생각에 괴로웠다. 아니야, 못한 게 아니라 그냥 내가 하지 않은 거라며 우기면서 키워온 무기력함은 괴로운 마음을 유일하게 달래주는 자기 위로였다.
회사가 문제라고 생각했는데. 내 인생의 유일한 오류라고 믿었는데. 회사에서 그렇게 스트레스받을 때도 울지 않고 굳건히 버텨내던 나였는데..
왜 행복해야 하는
해방감에 즐거워야 하는
지금에서야 마음이 이렇게 힘든 걸까. 너무 괴롭고 답답한데 눈물조차 나지 않았다. 해소되지 않는 감정들 속에서 어쩌면 나 자체가 문제일 수도 있다는 생각은 또 다른 수렁으로 나를 밀어 넣었다. 나는 실패자이자 패배자 같았다. 20대를 갈아 넣은 노력의 대가가 고작 이런 걸까. 커리어 우먼이라는 꿈은 나의 환상이 되어 흩어졌고, 어느 회사를 가도 뿌리내리지 못하고 사람들과 잘 지내지 못할 것이라는 불안감이 남았다.
무기력하고 외로운, 우울이라는 거대한 파도가 나를 삼켰다.
그렇게 깊고 넓은 바다에 빠졌다. 끝없는 어둠 속으로 떨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