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제의 자작나무 숲 그리고 양양과 강릉의 바다
회사 생활을 돌이켜보니 나에게 적대적인 것과 별개로 그들은 절박했다. 마치 생존을 위해서. 여기가 아니면 안 된다는 것처럼. 하지만 나는 절박하지 않았다. 내가 좀 더 행복해지기 위해, 나의 발전을 위해 그 회사를 택한 거였다. 행복을 추구할 순 있어도 행복에 절박하지 않으니까. 그러니 나는 더 좋을 만큼만 노력했다.
회사는 자신에게 절박한 이들을 택했다.
절박했으면 더 좋은 결과가 있었을 수도 있었기에 아쉽긴 하지만 이제는 후회하지 않는다. 나는 최선을 다했다. 결과가 좋지 않더라도 나는 내 노력을 인정하는 법을 배웠다. 노력이 곧 성과라는 자만심을 버리기로 했다. 노력해도 얻지 못하는 게 있다는 걸 받아들이기로 했다.
나는 행복이라는 태양을 끊임없이 바라보는 해바라기 같다고 생각한다. 여름에 피는 해바라기가 겨울에 살아남기 위해 자신을 다른 종류의 꽃으로 바꿀 필요는 없다. 언젠간 나와 비슷한 가치관을 가진 사람들을 만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곳은 단지 나의 계절이 아니었을 뿐이다.
맞지 않는 옷에 나를 욱여넣지 못했다고 해서 내가 틀린 것은 아니었다. 봄부터 책을 읽고 모닝 페이지라는 일기를 쓰면서 외면하고 싶은 과거를 마주하며 괴로운 시간을 보내기도 했고 나를 인정하는 방법을 깨닫기도 했다.
이래서 다들 일기를 쓰나 보다.
'내가 이렇게 힘든 순간을 겪었었구나. 내가 이렇게 이겨냈구나.
과거에 힘든 순간을 이겨냈듯이, 나는 또 이겨낼 수 있겠구나'하는 걸 깨닫기 위해서.
나의 답을 스스로 찾아낼 용기를 얻기 위해서.
책과 일기는 그동안 감고 있던 내 눈을 뜨게끔 해주었고, 봄과 여름의 강원은 미처 보지 못했던걸 발견할 수 있도록 해주었다.
인제 자작나무 숲은 겨울의 설경으로 유명한 곳이다. 하지만 나는 웬일인지 봄의 자작나무 숲이 그렇게 만나고 싶었다. 산불 조심 기간을 지나 봄이 절정과 여름의 길목 그 사이 어디쯤 이곳을 방문했다. 눈부시도록 아름다운 하얀 나무 기둥과 연둣빛과 초록색의 반짝거림은 이제 그만 무기력한 우울을 보내주라고 손짓하는 듯했다. 언젠가 숨이 다해 눈을 감는 순간 반드시 떠올리겠다고 다짐한 장면은 바로 이곳에서 보낸 시간이었다.
사실, 인제 자작나무 숲은 자연히 생긴 곳이 아니다. 자작나무 숲을 만들 것이라며 기획을 하고 만든 곳도 아니었다. 원래 이곳은 소나무 숲이었다. 하지만 병충해를 입은 후 소나무를 모두 벌목하고 자작나무를 심었다고 한다. 몇십 년이 흐른 후 수많은 관광객이 찾는 명소가 되었다.
인생도 그와 같은 거 아닐까. 처음 계획했던 것과는 다르다 해더라도 위기를 기회로 삼고 도약한다면 더 좋은 결과가 언제든 나를 기다리고 있는 희망과 설렘 같은 것. 자책만 하고 방안에 혼자 틀어박혀 있기에는 아쉽다는 생각이 들었다. 날 기다리고 있을 수많은 기회들을 나는 언제고 다시 찾아 나서고 싶어졌다.
나는 우리나라의 바다와 산에는 큰 감흥이 없었다. 그다지 새롭지도 않고 아름답지도 않다고 생각했다. 나는 의연 중에 익숙한 소중함을 외면해왔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여태 내 눈을 제대로 사용할 줄 몰랐던 거다.
그렇게 찾아 헤매던 에메랄드빛 바다가 바로 이곳에 있었는데 그것도 모르고 외국의 바다만 동경해왔다.
눈부시도록 찬란했던 여름 하늘과 푸른 바다가 맞닿은 곳. 스노클링을 하러 멀리 갈 필요가 없었다. 가까운 곳이 바로 천국이자 행복이었다. 언제나 내 주변에 있어주었던 익숙한 소중함에 비로소 감사할 줄 알게 되었다.
수많은 젊은 사람들로 북적이던 어느 여름날, 이끌리듯 들어갔던 양양의 서 피비 치는 기대 이상으로 흥겨운 곳이었다. 이곳은 어디든 축제로 만드는 신비한 매력이 있었다.
젊음과 흥겨운 축제 사이에서 나는 잠시 여름 바람을 만끽했다. 문득, 봄과 여름을 기다리느라 겨울을 즐기지 못했다는 아쉬움도 생겼다. 그 계절만의 즐거움을 잊고 살아왔다. 모든 계절은 돌아오고, 각각의 의미가 있었다.
이제는 원하는 걸 얻는 것만이 유일한 행복이 아님을 안다.
지금 바로 이 순간 내 곁에 있는 모든 것에 대한 감사함을 갖는 것.
그것이 앞으로 살아가며 내가 발견할 행복이자 즐거움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