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양제랑 아이크림은 챙기면서 마음에는 아무것도 안 해주고
초복, 중복, 말복. 이렇게 복날이 되면 어김없이 엄마께 문자가 온다. 복날인데 닭은 먹었느냐고 못 먹을 것 같으면 늦게라도 집에 오라고 말이다. 어른들에게 여름 몸보신은 빠뜨리면 안 될 중한 연례행사인가 보다. 사시사철 닭을 너무 많이 섭취하고 있어 미안할 지경인데 때 맞춰 또 몸보신용 닭을 먹으라 하시니 참. 그 수많은 닭은 다 어디서 오는 것일까. 복날 하루 단 한 명의 사람을 보신해 주라고 잉태된 생명이라니, 맛이나 영양과 별개로 미안스럽다.
복날 몸보신에 그리 큰 신경을 쓰고 있다고 말하진 못하지만 그래도 최근 들어 영양제는 잘 챙기고 있다. 삼십 대 중반이 되면서 피부며 체력이며 몸의 모든 컨디션이 예전과 다르다는 것을 자각하는 중이라 빠뜨리지 않고 섬세하게 챙겨 먹으려고 한다. 특히 콜라겐의 섭취는 매일 빠뜨리지 않는다. 조금이라도 노화를 늦추려고 발악 중이다.
그리고 또 다른 발악의 한 방편은 기름칠이다. 엄마도 내 나이까지는 관리를 잘해 주름이 없었다고 한다. 나는 이십 대 후반부터 크림이나 오일을 얼굴과 목에 많이 발라 주름 녀석들이 터를 잡도록 놔두지 않았다. 아직은 그럭저럭 기름칠의 효과를 보고 있어 만족스럽다. 앞으로도 계속해나갈 예정이다. (김희애 언니가 놓치지 않는 한, 나 또한 놓치지 않으리라. ^^)
헌데 문득 이런 생각이 든다. 몸에는 이렇게 기름칠을 잔뜩 하면서 마음 기름칠은? 몸에는 여름철 세 번을 나누어 몸보신을 해주면서 마음 보신은? 우리는 정작 내 마음을 위해서 무엇을 하면서 살아가고 있나. 무엇을 챙겨주고 있나. 몸을 위한 영양제 같은 것은 한 주먹씩 챙겨 먹고 뭐가 좋다더라 정보를 공유하면서, 마음을 위해서는 노력하는 바가 없다. 눈에 보이지 않아서 그런 걸까?
애써 노력했던 일이 무산되거나 허사가 되고, 나의 노력과 쏟아부은 시간 자체가 부정당하면 마음은 큰 타격을 입는다. 당장에 이를 다스리지 않고 넘어가도 아무 일 없이 느껴질 수 도 있을 것이다. 또, 모든 것은 시간이 해결해준다는 말이 진리처럼 느껴질 수도 있을법하다. 하지만 이런 문제들이 한참 뒤에 나도 모르게 불쑥 튀어나와 내 커리어에 방해가 될 수 있다. 마음을 잘 풀어주지 않으면 가끔 뒤늦게 고생할 때가 있다. 마음 기름칠은, 마음 보신은 제때 해주어야 한다. 그리고 자주 해주어야 한다.
요즘 환절기라 그런지, 피곤해서인지 며칠 내리 초저녁에 곯아떨어지고 있다. 나에게는 마음 기름칠 행위 중 하나가 모든 것을 다 잊고, 아주 긴 시간 잠을 자는 것이다. 최근의 몇 주간 해결해야 할 일들이 너무 많았는지도 모르겠다. 혼자의 시간이 많았음에도, 혼자서 '내 마음'에게 내어 줄 시간이 부족했는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어제는 저녁 무렵 술 한잔 하자는 지인의 요청도 거부하고 집에 와 열두 시간을 내리 잤다. 그렇게 오늘 아침 일곱 시에 깔끔하게 눈이 떠지고! 나는 이제야 살 것 같다.
밤새 매끈한 기름칠로 마음을 보듬고, 새롭게 마주한 익숙한 내 얼굴에 세수를 시켜주면서 나는 허옇게 떨어져 나가는 그것들을 바라보았다. 마음속의 허기와 조바심과 헛된 욕심과 진정성 없었던 태도와 풀잎보다도 작았지만 쓰라려 몇 날 며칠을 따가워해야 했던 비수의 말들. 지난밤에 떨쳐내고, 오늘 아침에 흘려보냈구나. 비로소 나는 홀가분해졌다. 뽀송하고 개운하게 씻고서 아침을 차려 먹으려 냉장고 문을 열었더니 떡볶이 재료가 눈에 보인다. '아침부터 떡볶이는 좀 그런가?' 생각하다가, 그냥 먹기로 한다. 그러다 불현듯 생각났다. 지난 중복에 닭 대신 떡볶이를 먹었던 기억이. '그때 내가 제대로 안 챙겨 요즘 이렇게 피곤한 걸까? 아유 모르겠다! ' 결론은 몸보신도 마음 보신도 잊지 말고 제때에!
*** 이 글은 에세이 베스트셀러 ‘너의 사회생활이 힘들지 않았으면 좋겠어’ 에 수록된 초고입니다.
*** '가장 빛나는 순간은 아직 오지 않았다'라는 제목의 책을 썼습니다.
*** 불면증 오디오클립 '책 읽다가 스르륵'을 연재 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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