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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희수 Aug 29. 2022

타인과 내가 바라보는 나

나는 누구인가에 대한 질문은 철학, 심리학 등 인문학에서 가장 기본적으로 던지는 것이다. 

그러나 아마도 독자들은 평소에 가장 관심을 두고 있지 않은 질문이기도 할 것이다. 



세상은 나와 나 이외의 것들로만 구성되어 있다. 

우리는 보통 나 이외의 것들에 대해서 대부분의 시간을 소모하고, 또한 사회는 그것들을 잘 알아야 사회에 잘 적응하게 되어있다. 나에 대해서는 그나마 외적인 것에 주의를 기울이는 경향이 있다. 나의 외모, 가족, 학력, 배경, 직업 등이 그렇다. 

나의 실체와 깊숙한 내면에 대해 생각해 볼 여유는 많지 않다. 


내가 볼 수 없는 유일한 것은 나다. 

나는 오직 거울을 통해서만 볼 수 있다. 거울의 상태에 따라서 내가 달리 보일 수 있다. 이것은 내가 나를 정확하고 객관적으로 보기가 어렵다는 것을 상징한다. 

나는 주로 다른 사람이 알려주는 정보를 통해서 나를 판단한다. 사회에서는 나를 부를 때, 나의 직함을 부른다. 때로는 교육수준을 부르기도 한다. 자녀 이름으로 불리기도 하고 촌수에 따라 불리기도 한다. 지역을 벗어나면 살고있는 지역으로 불리기도 한다. 그러다 보니 나에 대한  주체적인 판단이 자꾸 보류된다.      


나는 누구이고 어디서 왔으며 무엇을 위해 살고 있고 어디로 가는가? 나를 잘 알고 나에 대해서 정확히 말해 줄 누군가는 없는가?


우리의 자아상은 주로 우리를 잘 아는 사람들에 의해서 주어진다. 

우리를 규정하고 이렇게 살아가고 있고 이렇게 살아가야 한다는 의견은 우리가 아직 스스로 판단할 나이가 되지 않았을 때 우리를 잘 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로부터 전해진다. 어린 시절 왜곡된 자아상은 성장에 영향을 미치고 성인이 되어서도 끝까지 떨어지지 않고 따라다닌다. 


그러나 우리를 잘 안다고 하는 사람들은 많지만, 우리를 제대로 아는 사람은 적다. 부모도 자신들이 물려받은 대로, 혹은 제대로 된 사고의 과정을 거치지 않았을 때, 자녀에게 잘못된 자아상을 심어주는 경우를 적지 않게 본다. 나와 밀접한 사람들이 오히려 나의 격을 떨어뜨리는 경우가 많다. 

어린 시절 칭찬받은 기억은 평생 따라다니며 나를 살리고 직업선택에 영향을 주며 굳건한 버팀목이 되어준다. 그러나 잘못된 평가에 의해 나의 자아는 왜곡되고 실제의 나보다 나를 평가절하하게 된다.     


만난 지 1년쯤 되는 두 연인이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여자가 남자에게 말했다. “자기야, 난 자기 없으면 단 하루도 못살 것 같은데 자기는?” 그러자 남자가 대답했다. “응, 나도 나 없이는 하루도 못살아!”     


‘조하리의 창’에 대해서 한번쯤 들어봤을 것이다. 미국의 심리학자 조셉 루프트와 해리 잉햄이 1955년 발표한 논문에서 제시한 내용으로, 대인관계에 있어서 자신이 어떻게 보이고 또 어떤 성향을 가지고 있는지를 파악할 수 있도록 한 심리학 이론으로 '자기 인식' 또는 '자기 이해‘ 모델이라고도 불린다.         


 



재능있는, 솔직한, 융통성 있는, 대담한, 동정하는, 성숙한,  의존적인, 수줍은, 쾌활한, 까다로운, 위엄있는 등과 같은 형용사 57개를 제시하여 그중 자신을 가장 잘 표현한다고 생각하는 6개의 형용사를 자신과 타인이 선택하게 한 후, 분류하여 각 창에 집어넣는 것이다. 

나와 타인이 선택한 같은 형용사는 열린 창에, 나는 선택했는데, 타인이 선택하지 않은 형용사는 숨겨진 창에, 타인은 선택했는데 나는 선택하지 않은 형용사는 보이지 않는 창에, 모두 선택하지 않은 형용사는 미지의 창에 분류한다. 

6개의 형용사가 나를 충분히 설명할 수 있는지는 의문이지만 이 모델은 내가 생각하는 나의 모습과 타인이 생각하는 나의 모습이 다르다는 것을 알아차리는 효과를 주며 대인관계 개선에 도움을 주는 것은 분명하다. 


여기에서 주목할 것은 '개방된 영역'이다. 

내가 나에 대해서 알고 있다고 스스로 주장하는 영역이지만, 타인이 나에 대해 내리는 프레임(Frame, 창 혹은 틀)은 내가 예상하지 못하고 나에게 영향을 미친다는 것을 깨닫는 것이 또 하나의 큰 소득이다. 타인이 나를 만드는 프레임은 지속적으로 나의 실체를 왜곡시키고 다른 방향으로 나를 인도하는 경우가 많다.  


나는 나이 40이 넘어서 겨우 3년간 알고 지내던 한 분으로부터 내가 쓴 글에 대해 칭찬을 받고 수십 명 앞에서 낭독을 했다. 그 경험은 나의 기억에 뿌리내려 원래의 나 자신의 능력보다 더 긍정적인 자아상을 갖게 되었다. 

사람들이 나에게 부정적으로 이야기하고 이러쿵저러쿵하는 것에 영향을 받고 그대로 나의 삶을 적용해서 살만큼 나의 시간은 많지 않다. 내가 온 곳을 규정하고 내가 무엇을 하고 있고 어디로 가는지에 대해서 규정하는 사람들의 말, 문화, 트랜드, 미디어는 나를 묶어둘 자격이 없다. 


타인의 영향에 의해 형성된 것인지, 내가 정말 타인의 말과 눈을 떠나 독립적으로 정확하게 자신을 설명하는 것인지 곰곰이 따져 보아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내가 태어나면서 가지고 있는 장점을 모르고 그것을 발전시킬 기회를 잃는다. 가까운 사람들이 바라는 이상적인 인물은 내가 아니다. 노력에 의해서 타인이 바라는 인물에 가까이 갈 수는 있지만 최상의 결과는 얻을 수 없다. 

우리는 50세가 넘어서야 자신의 소질을 발견하고 새로운 인생을 사는 사람들을 종종 목격한다. 진작에 그것을 알았더라면 몇십 년간의 세월을 훨씬 알차게 살 수 있었을 것이다. 개성이 묻히는 것을 방지할 수 있었을 것이다. 본연의 나를 알고 그것을 빛낼 때 가장 원만한 발전과 최상의 결과를 볼 수 있다. 타인의 창에서 주어진 나를 향한 노력은 열등감을 야기시키기가 쉽다.   

     

다른 사람과 나의 관계와 함께 또 하나 살펴볼 것은 나와 나의 관계이다. 다른 사람과 나의 관계와 마찬가지로 나는 나와 대화하고 느끼고 서로 관계한다.

내가 나 스스로 말하는 것에 어떻게 반응하는가? 그것을 일방적으로 따라가는가? 아니면 그 말을 잡아서 분석하는가?  나와 나는 높고 낮음의 관계에 놓여 있는가? 아니면 일체가 되어 갈등하지 않는가? 나와의 대화는 동등하고 슬기로운가?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나에게 하는 말은 무언가? 부정적인 말을 그대로 따라가는가? 아니면 그 말은 좋지 않으니 다시 하라고 타이르는가?        



북한에서는 국가원수를 국가 존엄이라고 하여 모욕하거나 비난하면 반란죄에 해당하는 최고 수준의 죄를 묻는다. 

그러나 우리 각자도 모두 존엄한 사람들이다. 우리는 사랑받고 귀하게 대접받을 자격이 있다. 사람들의 평가에서 자유로워지고 이 땅에 태어난 이유, 목적, 목적지에 대해서 분명한 소신이 필요하다. 나와의 관계를 원만하게 하고 현명한 대화를 할 권리가 있다.  


나의 가치를 평가절하하는 사람들을 거부할 권리가 있다. 누가 감히 내 신분을 마음대로 정하는가? 

나의 가치에 대한 나의 평가를 누구에게 맡기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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