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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희수 Sep 12. 2022

보편성

생각을 다시 생각한다.

세상에 수많은 사상과 철학이 있지만 단 두 개로 구분하라면 인본주의(人本主義)와 신본주의(神本主義)라고 말할 수 있겠다. 


인본주의는 신의 존재를 부정하거나 신을 인간과 동일한 존재로 여긴다. 인간을 중시하고 세상의 근본으로 여긴다. 중세시대를 거치면서 기독교의 타락을 경험하고 과학의 힘을 중시하면서 인간은 신이 필요하지 않음을 주장한다.

중세 후반, 진화론이 널리 퍼지면서 신의 존재를 부정하는 경향이 가속화되어 인본주의가 정착하게 되었다. 인간을 존중하고 인간이 모든 결정의 중심이 되어야 한다는 인식은 모든 사상의 변화를 가져왔다.


우리나라에서는 단군신화에서 인본주의를 엿볼 수 있다. 홍익인간은 인간을 널리 이롭게 하는 것으로서 인간을 중시한다. 

이후에 중국에서 들어온 유교는 사람에 관한 사상으로 사람들이 세상을 살아나가는 방법에 관한 사상이다. 유교는 공자에 의해 주창되었고 사람 간의 예의, 도리와 같은 도덕, 그리고 조상을 숭배하는 것을 중심에 두고 있다. 그의 뒤를 이은 맹자는 인간은 천성적으로 선하다고 하는 성선설(性善說) 사상을 가지고 있다.


우리는 12년간의 공교육을 통해 유교와 과학이 바탕이 되는 이러한 인본주의적 교육을 받았다. 

하지만 그것 자체에 대해서 진지하게 토론하고 따져 보는 시간은 얼마나 되었나? 

우리의 주입식 교육은 정부에서 정해준 내용을 그대로 암기하는 학생이 최고의 점수를 받는다. 그것이 틀리든 맞든 따지지 않는 학생이 우수한 학생이다.     


하지만, 이제는 좀 생각해야 하지 않을까? 

무엇이 진리인가? 

종교의 영역으로 분류되기 때문에 이대로 공교육적인 터부로서 언급되어서는 않되는 것이 아니라 그 규모와 역사를 보아서도 최소한 균형이라도 맞추기 위해 좀더 깊이있게 생각해 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신본주의는 신의 존재를 인정한다. 

고대로부터 사람들은 경이한 현상이나 불안에서의 자유를 위해 신을 섬겼다. 두려움의 대상이고 절대적인 의지의 대상이었다. 

그러다가 기원전과 후를 나누는 분기점인 예수의 탄생으로 신본주의가 비로소 정립을 하게 되었다. 

그는 성경을 통하여 잠깐의 어린 시절과 30세 이후 단 3년간의 행적만을 보여 주었으며 인간적인 면보다 오히려 신적인 족적을 더 많이 남겼다. 

그를 3년간 따라다니던 제자들과 부활을 목격한 약 500명의 사람들에 의해 그의 말과 행동, 부활이 전파되어 인근으로 불같이 퍼져나갔다. 

그가 설계한 기독교를 통해 완성된 신본주의는 중세까지 이어지다가 인본주의와 부딪혀 현재에 이르고 있다. 그 사실들, 그 역사들이 인본주의와 충돌하며 지금까지 평가되어져왔다.     


인간은 사실 존중받아야 마땅하다. 인본주의에 흐르는 철학은 당연한 것이다. 

인간은 동물들과는 비교 대상이 아니며 이만한 문명을 이루고 지금도 이루어가고 있다. 

인류 역사에 닥친 수많은 멸절의 역경을 지혜와 협동으로 이겨왔다. 

그러나, 인본주의를 좀더 깊이 살펴보면, 인간을 포함한 모든 생명체는 단세포에서 진화되어 왔기 때문에 인간은 동물과 같은 정체성을 가졌다고 말하고 최종 고등생물인 인간에 이르러 이성이 생기고 스스로의 운명을 책임지는 경지에 이르렀다고 주장한다. 

그들은 성선설(性善說)을 지지하며 인간은 선하게 태어나고 스스로 완전하다고 말한다. 


그러나, 인간사회가 전쟁과 범죄가 끊이지 않는 무수한 악한 면에 대해서는 명확한 대답을 못한다. 

그들은 완전한 인간이 올바른 제도를 만들기만 하면 이상적(理想的)인 사회가 될 것을 주장하지만 우리가 그동안 무수히 많은 제도나 법률을 만들고 고쳤지만, 이상사회는 요원한 것을 목격해왔다. 


인본주의자들은 과학과 기술을 신봉하며 죽음은 무(無)이고 죽음에 대한 아무런 대비가 필요없다고 한다. 그래서 쾌락을 좇고 현실을 중시한다. 

그들은 인간의 죽음을 마치 더이상 가동하지 않는 기계와 같이 여기는 것 같다.


하지만, 우리의 삶이 기계와 같은 삶인가? 

수억 마리의 정자 중에 지극히 운이 좋아 선택되고 뱃속에서 자연적으로 성체가 되어 태어나 이렇게 살다가 죽는 것인가? 

죽은 이후는 무(無)이기에 나의 일생과 경험은 잠시 가족과 지인들에게 회자(膾炙)되고 얼마 지나지않아 사라지는가? 묘지나 납골당에 이름만 남아 있는가? 

그럼, 무엇을 위해서 살고 사라지고 아무것도 남지 않은 채 무엇을 위해 존재하는가? 사후에 자신의 삶이 어떻게 평가받고 후손들이 어떻게 살아가는지 전혀 알 수 없다면 어떤 의미가 있는가?




인본주의는 허무를 남길 수밖에 없다는 것이 나의 결론이다. 

신봉하는 과학과 기술은 죽음 앞에서는 바로 무(無)가 된다. 인본주의는 인간 스스로 운명의 주인이라고 하는 인식이 있는데, 우리는 운명을 스스로 통제할 수 없고 심지어 아무것도 할 수 없이 그저 바라만 봐야 하는 경우도 많다.  


세상에서 믿고 있는 것이 다가 아니다. 아무 생각없이 받아들이고, 아무 생각없이 기정사실화하는 것들이 진리가 아닐 수 있다. 

더글러스 호튼(Douglas Horton)은 이렇게 말했다. “복잡함의 가장 큰 수수께끼는 그것이 단순함에서 잉태되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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