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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희수 Sep 14. 2022

깊은 곳의 만짐

50% 확률의 세계

 부인1: “매일 어디 다니세요?”

 부인2: “저요, 네. 남편이 매일 반찬이 맛없다는 얘기를 하길래 학원엘 좀 다녀요.”

 부인1: “아 ~ 요리학원에요?”

 부인2: “아뇨, 유도 학원에요.”       


우리의 근본적인 깊은 곳을 건드려 보자. 

평소에는 바빠서, 그리고 겁이 나서, 혹은 괜히 마음이 이상해질까 봐 건드리지 않던 것.



우리가 죽어서 육체만 남고 결국에는 없어진다면? 

그럼 우리의 사는 목적은 무엇인가? 그동안 즐기고 욕구 충족을 위해, 혹은 다른 사람들을 위해, 가족을 남기기 위해? 나의 존재는 나를 볼 수 없고 나의 결과물을 볼 수 없다면?


이쯤 되면 더이상 생각을 안하려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허무해지거나 골치 아파서 외면하려 할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곧 맞이할 현실이다. 

그냥 대충, 적당히 살다 가면 되는가? 나의 존재가 그것밖에 되지 않는가? 내가 그 보잘것없는 나를 위해서 그토록 살아왔는가?

 빠르면 빠를수록 좋다는 것은 이런 경우를 두고 하는 말이다. 빨리 알면 알수록 내 삶의 자세가 달라진다. 정확한 의미를 알고 사는 것과 모르고 사는 것의 차이는 너무 크다. 

죽기 직전에 그동안 잘못 알고 살아왔구나 하고 후회를 할 것인가?     


나는 초등학교 4학년 때 동생과 함께 집 앞 도로에서 놀다가 동생이 승용차에 치어서 기절하는 것을 봤다. 그리고는 쏜살같이 집으로 달려가서 눈물을 흘리며 엄마에게 알려주고 무릎을 꿇고 누군가에게 기도를 했다. 

교회에도 절에도 가보지 않은 내가 죽은 것처럼 보인 동생을 살려줄 누군가를 절실히 필요로 한 것이다. 엄마는 죽은 동생을 살릴 능력이 없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었던 것 같다. 

내 기도를 들은 누군가의 손길이 임했는지 동생이 죽은 것으로 알고 차 트렁크에 싣고 한양대학교 뒷산에 버리고 달아난 뺑소니 운전사는 잡혀서 처벌을 받았다. 동생은 다리가 골절되는 부상만 당하고 지나가는 행인에 의해서 구조되었다.

어려서 그랬는지 조금 지나자 그 사건은 까맣게 잊고 있었다. 성인이 되어서야 내가 어느 절대자에게 청하던 그 최초의 기도를 떠올리며 그 절대자에 대해서 의문을 가지게 되면서는 가끔 생각나는 사건이 되었다.      

 

우리는 의미 있는 존재들이다. 

그냥 죽어서 결국은 없어지는 존재가 아님이 분명하다. 

그렇지 않다면 무슨 의미로 살 것인가? 자기 합리화에 의한 두려움의 경감이 아닌 본질을 직시해보자. 

그리고 진리를 알고자 결심한다면 노력이 필요하다. 이것이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노력이라고 생각되지 않는가? 그냥 대충 얼버무리고 말아야 할 일이 아니라고 생각되지 않는가?

결국은 우리는 죽어야 그 실체를 알 것이다. 그리고 후회하기도, 만족하기도 할 것이다. 

그러나, 그 결과는 너무도 끔찍이 중요할 수 있다. 그 결과는 너무 가혹하다고 말하기에도 부족할 것이다. 그동안 헛살아온 것은 그 이후의 상반될 수 있는 대가에 비하면 지극히 미미할 것이다.     


불안은 인간의 원초적 본능이다. 

불안을 극복하기 위해 인간은 눈부신 문명을 이루었다. 

하지만 그 불안은 사라지지 않는다. 불안은 위험으로부터 나를 지키고 미래를 대비하게 한다. 

크고 작은 불안이 있지만 가장 큰 불안은 죽음에 대한 것일 것이다. 불안의 원인을 계속 파고 들어가면 결국에는 죽음에 대한 불안이다. 

자동차를 타고 가면서 사고에 대한 불안은 결국은 죽음에 대한 것이다. 실업의 불안은 일을 못해서 좀 더 안락한 삶을 포기해야만 하는 불안보다 생계를 걱정하는 불안이 훨씬 크고 생계는 곧 사는 것, 즉 죽음에 대한 것이다.


그 죽음에 대한 불안을 해소하기 위하여 다양한 방법이 동원된다. 

죽으면 잠자는 것과 같이 아무것도 없는 무(無)라고 믿으며 이렇게 고통스럽게 살기보다 죽는 게 낫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다. 죽으면 어떻게 될지 모르기 때문에 최대한 흥청망청 즐기는 것이 최선이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 다른 사람들을 괴롭히며 손가락질을 받으면서도 죽으면 아무것도 아니기에 내 맘대로 사는 사람들이 있다.  

종교를 통해서도 불안을 해소한다. 이슬람 극단주의 테러조직원은 성전(聖戰)을 하면 300명의 미녀와 영원히 안락하게 살게 된다고 믿어 스스로 불길에 뛰어든다. 수행(修行)을 통해서 죽음 후에 좋은 곳에 간다고 생각하며 사람들이 드문 곳에서 철저한 금욕의 생활을 하는 사람들도 있다. 동물이나 자연의 어떤 것을 잘 섬기면 좋은 곳에 간다고 하는 사람들도 있고 착하게만 살면 다시 인간으로 태어난다고 믿는 사람들도 있다.     


주일 아침 예배시간에 목사님이 설교를 하다가 물었다. “성도 여러분, 우리가 천국에 가려면 어떻게 해야 하죠?” 그러자 한 어린이가 손을 번쩍 들고 하는 말, “네, 우선 죽어야 합니다!!”     


죽음 이후는 죽어봐야 안다. 잠시 죽었다가 다시 살아날 수 있으면 좋으련만. 

하지만 죽음에 대한 대비는 가장 현명한 행동이다. 

죽음 이후에 어떤 또 다른 세상이 있을지, 아니면 정말 잠자듯이 완전한 무(無)인지를 확률적으로 굳이 나타내자면 50%다.

무(無)가 아닌 또 다른 세상이 존재할 확률이 50%라는 것은 우리가 그것에 대비를 해야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0.1%를 밑도는 바이러스 감염을 막기 위해 마스크를 쓰고 백신을 맞는다. 

아무 생각 없이, 흥청망청 살기에는 너무 리스크가 크다. 게다가 얼마나 그 세계가 지속되는지도 모른다. 천년, 만년이 아니라 영원히 지속된다면? 잘못된 선택으로 100년간의 오류가 영원한 시간 속에서 땅을 치며 후회하는 삶을 가져올 수 있다. 

진지하게 생각해야 함은 명확하다.


우리는 확률이 낮은 교통사고, 암 등에 대비하여 보험을 든다. 심지어 여행 중 사고에도 대비하여 보험을 든다. 그러나 죽음에 대한 보험은 들지 않는다. 비교할 수 없을 만큼 큰 리스크에 대비를 안하는 것이다. 

보험을 들지 않아 교통사고에 의해 큰 손해를 입을 수도 있다. 그러나 죽음은 100% 누구나 맞이한다. 사후 세계를 이야기하면 현실적이지 못하다는 말을 하는 사람들이 있다. 하지만 그것은 대단히 현실적인 문제다. 단지 우리가 일상생활에 쫓겨서 깊이 생각을 하지 않거나 너무 큰 문제이고 너무 큰 공포여서 생각 자체를 안하려 하기 때문이다.


가장 큰 불안인 죽음에 대한 각자의 생각, 믿음은 각자의 자유이고 각자의 책임 영역이다. 하지만 진지하게 고민하고 탐구하며 제대로 된 철학을 정립할 피할 수 없는 매우 중요한 문제다.     




생각을 해본다. 지금 깊은 내면으로 진입해본다. 심연의 저 깊은 곳에 있는 나의 실체. 내가 태어난 이유. 내가 어디로 가고 있고 어디로 갈 것인지. 눈을 감고 어떤 존재에 대해서, 나의 생각을 이끌어줄 누군가에게 나를 의지해본다.

나의 아집과 세상의 논리에 집착하는 것에서 벗어난다.   

손을 내밀어 본다. 혹시, 누군가가 나를 잡는다면 나는 이제 그와 함께하게 될 것이다. 이제 혼자가 아닐 것이다. 두려움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이다. 그가 나를 떠받치고 있기 때문이다. 

나는 자유하고 내 어깨는 편안할 것임이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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