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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희수 Sep 15. 2022

관점의 전환

리프레이밍

최근에 나오는 책들을 보면 관점(觀點)에 대한 언급을 많이 한다.

제품에 대한 아이디어는 관점을 달리하여 개발할 수 있다던가, 기존의 고착화된 사고방식에서 탈피하여 관점을 전환하면 새로운 길이 보인다고 한다.

고정 관념을 깬 생각으로 생활을 혁신한 이야기들도 종종 보게 된다. 사람들에 대한 관점을 바꾸어 대인관계를 개선한 사례도 본다. 

심리학에서는 프레임(Frame, 틀)이라는 말을 많이 쓰며 관점을 전환하는 것을 리프레이밍(Reframing, 틀 바꾸기)이라고도 한다.



그러나 평생 고정관념을 벗어나지 못한 채 무덤에 들어가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물에만 사는 물고기는 물 안이 세상의 전부라고 느낄 수 있다. 개미들은 고도화된 군집 생활을 하지만 인간의 존재조차 염두에 두지 못할 것이다. 벼룩을 가두어 두면 자신의 영역이 전부인지 알고 높이 점프하는 능력을 잊는다. 지구가 평평하고 끝이 절벽이라고 믿은 사람들은 멀리 항해하지 못하고 신대륙의 발견이 지연되었다.


짐 캐리가 주연한 영화 ‘트루먼쇼(The Truman Show)’에 보면 태어나고 자란 것이 모두 기획된 한 사람이 세상은 자신이 살고 있는 섬이 전부라고 믿는다. 자신이 모르는 카메라에 의해 모든 일상이 세상 사람들에게 노출되고 사람들은 마치 드라마를 보는 것처럼 그의 생애를 지켜본다. 

그러나, 어느 날 이상한 점을 발견하게 되고 그는 죽음을 무릅쓰고 거친 물살을 헤치고 콘트롤 타워에 도착한다. 그리고 자신의 인생이 조작된 것임을 알게 되고 그동안 믿고 있던 고정관념을 깬다.   

  

고정관념을 깨기위해서는 거친 물살을 헤쳐가야 한다. 우리는 지구에 살고 있고, ‘세상’이라고 하면 지구를 가리킨다. 

우리는 땅에서 하늘을 바라보고 하늘, 즉 우주가 이러 이러하다고 이야기한다. 지구가 네모꼴이라고 확신했던 오래전에는 배를 타고 멀리 가지도 못하고 세상 끝은 이러 이러하다고 믿었다. 우리는 땅, 즉 세상의 관점에서 하늘에 대해서 이야기한다.     


그럼, 내가 하늘을 기준으로 땅, 지구를 바라보면 어떨까? 

입장을 바꾸어보면 몰랐었던 것들이 보이게 되고 상대방을 이해하게 된다. 

다행히 항공기술 때문에 누구든지 비행기를 타고 땅을 내려다 볼 수 있다. 

나는 처음으로 탄 비행기에서의 경험을 잊지 못한다. 사람이 보이지 않고 집들도 점으로 보이면서 내가 저런 세상에서 살았었구나 하는 깨달음이 있었다. 그러면서 마음이 넓어짐을 느꼈었다.

비행기보다 훨씬 먼 거리에 위치한 우주정거장에서 지구를 바라보다보면 인생관이 달라진다고 한다. 중력에 갇혀있는 지구에서 벗어나 400km 거리에 있다는 자체로 관점의 변화가 오는 것이다. 저 둥그런 구(球)에서 아옹다옹하며 살고 있다는 것을 깨달으면 욕심과 미움의 마음이 엷어진다. 내가 무엇 때문에 사는가를 다시 한번 생각하게 된다.


세상은 불완전하다. 인간이 불완전하기 때문이다. 불완전한 곳에서 하늘을 바라보기보다 완전한 곳인 하늘에서 세상을 바라보는 것이 더 나를 잘 알 수 있게 된다. 하늘은 지구를 제외한 곳으로 지구를 내려다볼 수 있는 곳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나무 하나만을 면밀히 쳐다보면 전체 숲을 보지 못할 가능성이 크다. 

그러나, 하늘에서 땅을 내려다보면 땅의 불완전성을 쉽게 볼 수 있다.     

하늘에 있는 나의 관점에서 가장 안타까운 것은 무엇일까? 가난?, 죽을 병?, 아니면 사람들에게 버림받음?

아마 하늘의 비밀이 제대로 알려지지 못하는 것일 것이다.

그럼, 가장 기쁜 것은? 부유함?, 혹은 유명세?, 아니면 존경받음?

아마 하늘의 실체가 제대로 알려지는 것일 것이다.     


하늘에 있는 나의 입장에서 보면, 그 이외에는 잠깐 있다가 사라지는 것들이다. 돈도 많고 친구도 많으며 많은 사람들로 부터 존경을 받아도 하늘의 실체를 모르면 허망한 삶일 것이다. 

그 권세와 물질, 존경도 내가 떠나고 나면 나에게는 아무것도 남지 않는다. 세상에서 누렸던 기억마져도 사라진다. 후세의 사람들이 나를 아무리 칭송하고 역사책에 기록하여 기념한다고 해도 내가 떠나고 나면 나에게는 남지 않는다. 이것은 염세주의(厭世主義), 회의주의(懷疑主義)와는 다른 것이다. 역사적인 위대한 인물들을 폄하(貶下)하는 것도 아니다.      


하늘에서 지구에 있는 나를 바라보면, 내가 무엇을 하고 무엇을 하지 말아야 할지가 분명해진다. 고정관념을 벗어나 세상을 보는 관점을 전환하자. 불완전한 곳에서 허우적거리기보다 완전한 곳에서 나를 바라보자. 내가 지금 무엇을 하고 있고 무엇을 향해서 달려가고 있는가? 나는 세상을 벗어나 있는가? 아니면 세상에 얽매여 있는가?

나를 자유롭게 하는 것은 무엇인가? 나는 진정 행복하게 삶을 마칠 수 있는가? 내가 준비한 세상의 삶 이후의 삶은 무엇인가? 

관점의 전환이 이르면 이를수록 좋다. 나의 앞길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하늘에 위치해 있으면, 자연적으로 나의 존재에 대해서 생각하게 되고, 또, 신(神)의 존재에 대해서 생각하게 된다. 

우리가 믿던지, 믿지 않던지, 신(神)을 생각할 때, 많은 가람들이 자연적으로 범접할 수 없는 초월적인 존재로서 감히 입에 올리기도 두려워한다. 하지만 어떤 사람들은 그딴 것은 없으니 아무렇게나 대해도 상관없다고 무시하기도 한다.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던지, 이것 역시 한 번 관점을 전환해볼 가치는 있다. 내 입장에서 신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신이 있다고 가정하고 신의 입장에서 나를 바라보는 것이다. 


내가 하늘에 있는 신이고 이 우주를 창조했으며, 만물을 만들고 사람을 만들었다면 세상과 인간을 어떻게 생각할까?   

우선 내가 만든 것에 대해서 기쁨이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귀중하게 생각할 것이다. 신이기에 하늘, 바다, 땅을 어렵지 않게 만들었지만 설계도가 있었을 것이다. 그 설계도는 매우 정밀하고 광범위한 그야말로 신만이 만들 수 있는 설계도이다. 

우주의 크기, 행성의 수, 그들을 구성하는 재료, 지구의 모양, 태양과 달 그리고 위성의 위치와 관계. 지구의 구성 물질과 자연, 그리고 동물과 사람. 

신이 만든 모든 것은 그들이 어떻게 움직이고 살아 가는지에 대해서도 설계에 포함되었을 것이다. 

사람에게는 특별히 신경을 써서 매우 미세하게 만들었으며 창의력과 탁월한 능력을 지닌 존재로 살아가게 했을 것이다. 그들을 통해서 문화가 재창출되고 문명이 발달하게 하기 위해서다. 

그러러면, 로봇과 같이 동일하고 명령에 의해서만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생각하고 권리를 찾으며, 자신들의 책임하에 살아가도록 만들어야 했을 것이다.

그러나, 인류의 문명이 아무리 발달해도 우주의 끝에 가서 그 비밀을 볼 수 없게 설계했을 것이다. 보지 않고도 알 수 있는 방법이 있기 때문이다.     


신은 자신의 창조물들이 원래 계획한 대로 잘 움직이고 살아가는 것에 흐뭇할 것이다. 특별히 인간의 놀라운 능력과 그들이 이루어낸 문명을 보면서 신은 대견해 할 것이다. 

그리고  신은 인간이 자신을 알고 자신과 교류하기를 원할 것이다. 직접 그들에게 나타나지는 않았지만, 특별히 선택한 몇 명을 통해서 자신이 누구이고 무엇을 원하는지, 그리고 인간이 어떻게 하면 잘못 없이 살아갈 수 있는지에 대해서 알려주기 원할 것이다.

 

신은 동물들과 다르게 인간에게만 이성을 주어 자유롭게 생각하고 선택하게 만들었다. 

그러나, 인간은 신이 아니기에 불완전하고 작은 환경의 변화에 좌절도 하고 분노도 낸다. 열정과 더불어 욕심이 있어서 굳이 하지 않아도 될 죄를 저지르기도 한다. 때에 따라서는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서 수백만 명을 죽이기도 한다. 그래서 그들에게 해야 할 것과 해서는 안될 것들을 선택한 몇 명을 통해서 알려주려고 했을 것이다. 

신은 인간을 대견하고 소중하게 생각하면서도 때로는 그들의 이탈에 화가 난다. 

그러나, 신은 자신이 만든 창조물을 끔찍이 사랑하고 자신이 불어넣은 능력을 통해서 나온 결과들이기에 안타까워하면서도 이해를 한다.

신은 비록 그가 창조하였지만, 오늘도 사랑하는 모든 사람들의 일거수일투족을 살펴보고 울고 웃고 실망하면서도 또 희망을 가져볼 것이다.     




‘팡세’를 쓴 프랑스의 수학자이자 물리학자, 그리고 철학자인 파스칼이 한 말을 곰곰이 생각해보면, 공감이 간다.

“신의 존재를 믿는 것이 인간에게는 최선의 전략이다. 실제로 신이 있으면 보상을 받을 것이고, 설사 신이 존재하지 않더라도 손해 볼 것 없다.”      

그의 말을 간단하게 확률적 기대치로 나타내보면, 아래와 같을 것이다.     


  신을 믿는다 -> 신이 있다 = 100점

  신을 믿는다 -> 신이 없다 = 0점

  신을 안믿는다 -> 신이 있다 = (-)100점

  신을 안믿는다 -> 신이 없다 = 0점

  결론 : 신을 믿는게 이익이다.(믿으면 100점, 믿지 않으면 마이너스 100점)     


나는 여기에서 신의 존재에 대한 변증론을 펼치려고 하기보다는, 때로는 관점의 전환에 의해 몰랐던 사실을 알 수 있음을 역설하고 그 경험을 권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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